소설리스트

0과 1-148화 (148/293)
  • 148.

    “저, 전하?”

    셋 다 벽에 붙어 있어서, 누구 뒤에 숨을 수도 없었다. 에드워드는 팔짱을 끼고 물러섰다. 사태를 관망하듯이.

    나는 그래도 된다. 제삼자니까. 하지만 그는 여주인공의 파트너였다. 그가 말을 삼가자 상황이 이상해졌다.

    여주인공이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주변을 둘러보고 몸을 휙 돌렸다.

    어디 가?

    로맨틱한 춤이나 반짝거리는 조명, 감탄하는 엑스트라들……. 이런 광경은 한순간에 흩어졌다.

    에드워드는 뭐 하는 거지? 네가 지금 그레이랑 떠들 때야?

    너 연애 안 할 거야?

    “잠깐만.”

    난 아무에게 잔을 떠넘기고 여주인공을 따라 나갔다.

    이델라는 구두를 신고도 걸음이 빨랐다. 복도에서 나는 거의 뛰어야 했다. 학생회관을 나가 산책로에서야 그녀를 따라잡았다.

    “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그녀가 나무를 걷어찼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조명이 흔들렸다. 떨어지지 않나?

    그보다, 구두 신고 있지 않았어?

    이델라는 몸을 굽히더니 다리를 쥐었다. 발이 아픈 모양이다. 구두 굽은 안 부러졌는지 모르겠다.

    “이델라?”

    “누구……. 전하?”

    그녀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더니 표정을 수습했다. 하지만 씩씩거리는 숨결은 숨길 수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첫사랑이라는 게 에드워드였어?”

    “첫사랑? 네? 그게 무슨……. 아! 그거요! 네, 그렇죠!”

    이델라는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방금 떠올린 게 분명한 얼굴로 대답했다. 뭐가 ‘네’야?

    “첫사랑이랑 잘되고 있었네. 내 도움이 필요 없을 만했어.”

    “으음, 그렇죠!”

    “그런데 둘이 싸웠어?”

    왜 이벤트가 망했지? 엑스트라가 와인을 쏟은 것까지 스토리대로였다.

    여기서 여주인공이 특별히 해야 할 행동이 있었던가? 이게 선택지가 있는 이벤트였어?

    떠올려 보자. 무도회장에서 당황스러운 상황에 처한 여주인공은, 에드워드를 보고…….

    -전하, 옷이 망가져서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전하, 손수건을 빌려주세요.

    -(아무 말 없이 운다)

    선택지가 있었다!

    손수건을 줬던 건 에드워드의 선택이 아니었다. 여주인공의 부탁이었다!

    여주인공의 엉뚱한 질문에, 에드워드는 손수건을 준다. 여주인공이 그 손수건으로 드레스의 얼룩을 감싸듯 리본으로 묶어 버리자, 에드워드는 그제야 손을 내밀었다! 호감도를 올리면서!

    ‘이제 얼룩이 안 보이네.’

    그가 웃으며 말해서, 여주인공은 설렘을 느낀다. ‘설마 너밖에 안 보여, 같은 말씀을 하진 않으시겠지’ 하는 불안감도 동시에 느끼지만.

    다행히도 에드워드는 그런 말 없이 ‘춤출까. 무도회에서 춤 한번 못 추고 나가기는 아쉽지.’ 하고 말한다.

    둘은 로맨틱한 분위기에서 춤을 추고, 악역 엑스트라는 분노하며 사라지는 그런 이벤트였다!

    이벤트를 기억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네? 제가 에드워드 전하랑요? 그럴 리가요. 싸우지 않았어요. 제가 실수하는 바람에 옷을 더럽힌걸요.”

    여주인공이 착하게 웃었다.

    “나무는 왜 찼어?”

    “……보셨어요?”

    “에드워드 성격 이상한 건 나도 알아.”

    여주인공의 표정이 확 펴졌다.

    “그렇죠?”

    에드워드, 너 무슨 짓 했냐?

    무도회장 근처는 드나드는 사람이 있어서 곤란했다. 창으로 나오는 빛이 휘황찬란해서 이곳에 있다간 눈에 띌 것이다.

    우리는 후원 쪽으로 들어갔다. 알렉스가 뒤따라와서, 그에게 망을 봐 달라고 부탁했다.

    이델라는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로 털어놓았다.

    “사실 전하께 거짓말했어요. 에드워드 전하는 제 첫사랑이 아니에요.”

    그렇겠지.

    “에드워드 전하께서 무도회에 동반하지 않겠냐고 물으셔서, 수락했을 뿐이에요. 그분도 제게 연애 감정 같은 건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흰 아무 관계도 아니니까요.”

    “아, 정말?”

    “네.”

    이델라가 확신했다.

    철벽같다.

    “에드워드는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관심 없는 사람한테 파트너 신청을 하는 사람도 있어?”

    “그건…….”

    이델라는 나를 잠시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생긋 웃었다.

    “호의를 베풀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마침 파트너가 필요했다고 하셔서요, 서로 도움이 되기 위해 나간 자리였거든요.”

    “그렇구나.”

    “그런데…….”

    “응, 그런데?”

    내막이 나올 것 같다.

    “아니에요.”

    뭐가?

    엄청나게 뭐가 있는 얼굴로 이델라는 입을 다물었다. 시선도 슬슬 피한다.

    난 어린 시종들에게 자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다 믿겠다는 표정이었다. 시종들에겐 잘 먹히던데.

    “괜찮아. 말해 봐.”

    이델라의 눈동자가 떨렸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제 드레스에 와인을 쏟으셨어요!”

    “뭐?”

    이델라는 아차 하고 입을 가렸다. 그녀가 눈을 내리떴다.

    “제 착각일지도 몰라요.”

    난 그녀의 팔을 잡은 손을 내렸다.

    “착각일지도 모르지.”

    그녀가 고개를 숙였다.

    “아닐지도 모르고.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잖아?”

    “제가 봤어요.”

    이델라는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했다. 내가 믿어 주지 않을 거라는 태도다. 난 일단 맞장구쳤다.

    “나쁜 놈이네. 그런 짓을 하고 사과도 안 했단 말이야?”

    “제 말을 믿으세요?”

    이델라가 놀랐다. 그녀는 확신하고 있었다. 착각이라는 건 그냥 해 본 말이다. 왕자를 확신에 차서 욕하기는 힘드니까.

    게임에서 여주인공이 억울한 상황에 몰린다면, 여주인공의 증언은 백 퍼센트 사실이다.

    유연호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게임의 법칙이 아니더라도 그녀가 진실을 말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봤다며.”

    “하지만, 역시 착각일지도 모르니까요.”

    “걔가 왜 그랬을까?”

    “실수였던 것 같아요. 무심코 손이 뭘 잘못 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델라는 도리어 에드워드를 변명해 주려고 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걜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줘. 물론 나쁜 애긴 한데…….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거야. 오히려 너랑 친해지고 싶었을걸.”

    “친해진다고요?”

    “응. 의도와 조금 다른 결과가 나온 거지.”

    “와아.”

    이델라는 전혀 납득하지 않은 듯했다.

    에드워드가 와인을 쏟았다면. 게임에서도 에드워드가 범인이었다면.

    이건 그런 이벤트였을 것이다. 에드워드가 관심 있는 여주인공에게 좀 더 접근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 이벤트.

    에드워드가 그렇게 침착하고 냉정한 사람이 아닌데, 여주인공에게 호감을 느끼면서 게임에선 왜 그렇게 목석처럼 굴었을까?

    궁금증이 풀렸다. 그게 아니라 뒤에서 수작을 부리고 있었던 거다.

    자기가 와인을 쏟아 놓고 ‘이런. 내 손수건을 써.’, ‘내가 편들어 줄게. 같이 춤추자’ 뭐 이랬던 거겠지.

    데이트 이벤트도 ‘어쩌다 보니 우리가 같이 외출하게 되었군’ 같이 꾸몄지만 실은 고도의 계산 끝에 길일을 잡은 거지. 여주인공과 둘만 외출하게 될 시간을.

    에드워드 루트에서 풀릴 ‘캐릭터의 비밀 속성’은 에드워드가 개수작의 달인이었다는 거 아닐까.

    “에드워드는 겉과 속이 다른 애거든. 좀 음험하지. 하지만 사실은 정이 깊어서 사람을 잘 곁에 두지 않는 거야. 애가 사연이 많아.”

    “와, 그렇구나.”

    “네게 파트너 신청을 한 건 정말 이례적인 일이야. 난 걔가 다른 사람에게 먼저 접근하는 걸 처음 봤어.”

    난 에드워드를 열심히 변호했다. 여주인공은 에드워드에게 특별하다. 그녀가 그걸 알아야 했다. 그래야 공략을 하지.

    어필이 됐는지 이델라는 대강 납득한 듯했다. 찡그린 얼굴이 펴져서 어느 순간부터 웃고 있었다.

    “그래도 드레스를 망친 건 속상해요. 전하께서 사 주신 옷인데. 죄송해요.”

    “뭐가 그렇게 자꾸 미안해? 또 맞추면 되지.”

    말하다 말고 이델라를 쳐다보자, 그녀가 생긋 웃었다.

    내가 옷을 보냈단 걸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어?”

    “전하께선 언제나 절 도와주시니까요.”

    내가 언제? ‘언제나’에 내가 모르는 뜻이 있었나?

    나무에 매달린 조명이 먼 데서 비쳤다. 얼굴을 분간하기도 어두운 곳인데 이델라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났다.

    마치 알렉스나 도트 같은 눈빛이다. 이 세계의 선량한 캐릭터들은 쉽게 감동하고 조프리를 선한 사람으로 믿어 버린다는 특징이 있었는데, 이델라에게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도 나한테 반하지 마.”

    난 이델라가 다시 웃을 줄 알았다. 떨떠름하게 웃고 그럴 리가요,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그런 짓은 하지 않아요, 절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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