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7화 (147/293)
  • 147.

    음악 소리가 커진 듯했다. 실제로는 학생들이 말을 줄였기 때문에 생긴 효과일 것이다.

    셋이 함께 입장하자는 생각은 꽤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주목받고 있었다.

    난 두 애인을 다정하게 대하려고 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가 파트너 신청하는 장면 봤어?”

    “아니요, 전하. 이야기만 들었는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엄청났다던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말하자, 로웰이 내 손을 가져갔다. 손등에 입술을 누르며 그가 물었다.

    “뭐가 걱정되세요, 전하? 아카데미에서의 자유연애야 흔한 일인걸요.”

    “우리가 하는 것처럼 말이지.”

    내가 웃자 로웰은 눈웃음 지었다.

    알렉스는 자신이 잡고 있던 내 오른손을 가져갔다. 휙 들어 올려서 겨드랑이가 아팠다.

    깜짝 놀라서 쳐다보자, 그는 당황해서 내 팔을 내려놓았다. 로웰처럼 해 주려던 건 알겠지만 팔을 뽑는 건 로맨틱하지 않다.

    아카데미 내에서 열린, 공식적인 첫 무도회였다. 무도회의 주최 측인 학생회 간부들이 서로를 보며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주제는 우리인 듯했다.

    이윽고 그들 중 한 명이 떠밀려서 이쪽으로 다가왔다. 난 로웰과 눈을 마주쳤다. 불운한 목격자가 가까이 다가오면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이미 상의가 되어 있었다.

    그 학생회 간부는 불행히도 우리가 준비한 걸 보지 못했다. 남자 기숙사장이 학생회 간부의 어깨를 잡았다. 기숙사장이 엄지로 뒤를 가리키자, 학생회는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기숙사장에게 자기 일을 떠넘길 수 있어서 행복한 듯했다.

    “전하, 오셨군요!”

    기숙사장은 기뻐하며 다가오다가 발이 굳었다. 로웰은 내 장갑을 벗기고 손바닥에 입을 맞추고 있다가, 상대가 기숙사장이라는 걸 알고 김이 샜다.

    “뭐야, 선배였네요. 신문은 잘 만들고 계세요?”

    “전하께 뭐 하는 짓이야! 이 문란하고 파렴치한…….”

    “놔둬. 나한테 인사하러 온 거 아니야?”

    기숙사장은 허둥지둥했다.

    “맞지만, 전하. 공공장소에서 저자가 하는 짓이 심히 발칙하여……. 저런 자를 가만두시면 안 됩니다!”

    “기사에 조프리 왕자의 남성 편력이 심하다고 써도 돼.”

    “예? 아니, 전하. 그런 문제가 아니라…….”

    기숙사장이 가리고 있어서 다른 학생들은 우리의 애정 행각을 보지 못한 듯했다.

    도움이 안 되는 기숙사장이다. 난 그에게 이만 가라고 손짓했다.

    “인사는 받은 걸로 칠게.”

    알렉스가 도전하려고 준비 중이었다.

    해도 된다고 눈짓하자, 그가 내 장갑을 조심스레 벗겼다. 흰 장갑의 검지와 중지 사이가 쭉 찢어져서 회생 불가능한 상태가 됐다.

    “…….”

    “아니, 이자들은 왜 전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인 겁니까? 전하, 혹시나 괴롭힘을 당하고 계신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기숙사장이 분개했다.

    근처에 있던 학생들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우리가 뭘 하는지 헷갈린다는 얼굴이다.

    도무지 방탕한 분위기 형성이 안 되고 있다. 제일 큰 원인은 물론 기숙사장이었다.

    난 기숙사장을 치워 버리려고 했다. 그때 하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에드워드 비스코티 1왕자 전하와 이델라 에클레어 양,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 드십니다!”

    나를 포함해 모든 사람이 문으로 고개를 돌린 듯했다. 열린 문으로 화제의 한 쌍이 들어왔다.

    에드워드는 엄청난 금발을 뒤로 넘긴 채였다. 이마가 시원하게 드러나서 평소의 섬세한 인상보다 훤칠한 미남자라는 느낌이 강했다.

    그의 팔에 손을 올린 이델라는 목이 드러난 드레스를 입어 백조 같았다. 머리카락을 어떻게 관리했는지 색이 옅어져서, 거의 금갈색에 가까웠다.

    금발의 한 쌍은 압도적으로 아름다웠다.

    그 뒤에서 따라오는 그레이 크래커가 그림자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사람의 눈이란 비슷해서, 학생들은 조용해졌다. 춤을 추러 가던 학생들도 벽으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가는 길에 장애물이 없었다.

    난 저 모습을 휴대폰 화면으로 본 적 있었다.

    저런 느낌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눈을 뗄 수 없었다.

    에드워드의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무도회장의 불빛이 너무 강했다. 보기 좋은 머리카락인 건 알겠는데 고개를 그만 움직이면 좋겠다.

    금발이 반짝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다른 각도로 빛을 받으니 당연했다.

    반면 이델라는 가만히 있었다. 고개를 거의 움직이지 않고 멍하니 주변을 보고 있어서 피곤한 듯한 표정이 더 잘 보였다.

    에드워드가 한 걸음 걸으면 이델라가 보폭을 맞춰 따라 걸었다. 에드워드가 회장을 둘러보자 그녀도 따라서 무도회장을 둘러봤다.

    그게 서로에게 맞춘 행동이 아니라 원래부터 각자가 하려던 행동처럼 보였다.

    난 한 걸음 옆으로 움직였다. 에드워드와 나 사이에 기숙사장이 서게 됐다.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커플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였다.

    알렉스가 망가진 장갑을 자기 품에 넣는 것도 다른 쪽 장갑을 로웰이 제거해서 짝을 맞추는 것도 주목받지 않았다.

    “전하, 제 장갑이라도 가져올까요? 크기가 맞지 않아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괜찮아.”

    친절을 발휘하려는 기숙사장을 보내고 로웰에게 음료를 받았다.

    지금부터는 조용히 보고 싶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진전되는 모습을.

    별 도움은 안 됐지만, 난 이 커플을 성립시키려고 노력했다.

    무도회 이벤트가 무사히 끝나면 고개 하나를 넘는 셈이었다. 그 다음에는 어지간한 방해가 아니면 무난히 둘이 이뤄질 것이다.

    조프리와 그레이 크래커라는 방해물만 아니면.

    무도회 이벤트는 작은 사건으로 인해 발생했다. 에드워드에게 말을 붙이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이델라가 가장자리로 밀려나다, 누군가 쏟은 와인에 드레스를 더럽히는 일 때문에.

    “전하.”

    “전하. 오늘도 현양하십니다…….”

    사람들이 기쁜 듯 에드워드에게 모여들었다. 그들이 ‘전하, 전하’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난 무알코올 음료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델라는 처음에는 에드워드 옆에 붙어 있었다. 그레이가 그녀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고, 이델라가 그에게 대답하려고 고개를 돌린 순간 일이 일어났다.

    이델라의 몸이 비틀리더니 뒤로 확 밀렸다.

    쨍!

    유리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델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개미처럼 흩어져서, 그녀의 옷에 퍼진 와인 자국이 눈에 띄었다.

    마음이 놓였다. 사건이 벌어졌다.

    난 음료를 계속 마시며 그 모습을 구경했다. 브라운관 속에서 일어나는 소란 같았다.

    이델라가 치맛자락을 들었다. 미색 치마에 붉은 와인이 꽃처럼 퍼져 있었다.

    “저런. 곤란하게 됐네요.”

    로웰이 혀를 찼다.

    여주인공의 고난이었다. 첫 번째로 참여한 무도회에서 드레스를 망친다.

    심지어 그 드레스는 이델라가 유일하게 소유한 드레스였다.

    중간고사와 무도회는 엇비슷한 시간대에 일어나는 이벤트였다.

    내가 플레이어일 때, 난 중간고사와 무도회 중 어느 쪽에 이델라의 시간을 투자해야 할지 고민했다.

    이 게임은 연애 게임이니까, 무도회에 힘을 쏟는 게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옷 가게에서 판매하는 드레스는 대부분 유료 결제 아이템이었다. 드레스가 없으면 무도회에 참여할 수도 없는데.

    난 게임 머니로 살 수 있는 유일한 드레스를 노렸고, 그 때문에 여주인공은 중간고사 직전까지 아르바이트만 해야 했다.

    성적과 바꿔 구매한 드레스가 와인 때문에 망가졌을 땐 내가 다 화났다.

    뭐 이런 게임이 다 있어? 심지어 와인을 쏟은 엑스트라는 실수한 게 아니었다. 이델라를 질투해 벌인 일이었다.

    엑스트라이기 때문에, 비웃는 대사만 뜨고 게임 화면에 얼굴은 공개되지도 않았다.

    그 범인을 보게 되겠네.

    “어쩌면 좋아.”

    “얼룩지겠다.”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이런, 실례. 너무 꼴사나워서.”

    파벨이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삼켰다. 언제 거기까지 접근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어느새 이델라 근처에 몰려 있던 무리에 끼어 있었다.

    그 엑스트라가 너였냐?

    생각 없는 학생들이 무심코 따라 웃어 버리는 바람에 분위기가 묘해졌다. 악사들도 연주를 멈추고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로웰이 물었다.

    “파벨을 끌어낼까요, 전하?”

    “왜?”

    로웰은 괜찮으시다면 됐다며 자기도 벽에 등을 붙였다. 세 사람이 나란히 벽에 기대서 남의 고난을 구경하는 꼴이었다.

    이델라와 에드워드는 침착하게 대화 중이었다.

    “죄송해요, 전하. 옷이 망가져서 먼저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가릴 건?”

    “예? 아, 옷을 가릴 거……. 그냥 빨리 돌아가면 되니까요.”

    손수건.

    빨리 손수건을 줘.

    속으로 말을 걸었다.

    에드워드의 뒷모습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것밖에 없잖아.

    게임에서 에드워드는 이델라에게 손수건을 주고 춤을 신청한다. 이델라는 손수건으로 얼룩진 부분을 대강 조치하고 그의 손을 잡는다.

    에드워드가 이델라를 배려하고, 이델라가 당당하게 행동하기만 하면 된다. 이델라의 드레스가 망가진 사건은 로맨틱한 이야기로 바뀔 것이다. 에드워드가 손만 내민다면.

    에드워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전하를 두고 가겠다고요?”

    그레이가 물었다.

    “옷이 더러워졌으면 갈아입고 돌아오세요. 기숙사가 먼 것도 아니잖습니까? 전하께서 파트너를 신청해 주셨는데 혼자 두고 들어가겠다니.”

    그레이가 끼어들 자리가 아니다. 좀 조용히 했으면 좋겠다. 파벨과 달리 그레이는 여주인공의 연애에 도움이 안 되는 방해자였다.

    쓸데없이 설득력이 있어서 여주인공을 휘두르기나 한다.

    지금만 해도 학생들이 ‘그런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어요. 드레스가 한 벌밖에 없는 불쌍한 사람도 세상엔 존재하는 법이니까.”

    파벨이 학생들 속에서 이죽거렸다.

    “어쩌면 좋아.”

    학생들이 아까와 다른 의미로 탄성했다. 말은 안타까워하는데 표정이 웃고 있다. 귀족들은 신데렐라를 좋아하지 않는다.

    결정했다. 이벤트가 끝나면 드레스의 복수를 하자.

    파벨은 악역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 에드워드가 파벨을 닥치게 하고 여주인공에게 춤을 신청하면 멋질 것이다.

    화가 나서 잔을 들기 어려울 지경이다. 난 에드워드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 같다. 빨리 좀 해.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에드워드 정확히 나를 쳐다봤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