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6화 (146/293)
  • 146.

    로웰은 몽블랑 상단 아카데미 지부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그를 찾는다는 사람이 있었다. 하인을 보내서 귀찮게 구는 바람에 씻지도 못하고 나와야 했다.

    “해가 중천인데 얼굴이 그게 뭐냐?”

    집무실에서 기다리는 사람은 로웰의 큰형이었다.

    몽블랑의 첫째인 버트 몽블랑은 5남인 로웰과 상당한 나이 차가 있었다. 버트 쪽은 이미 첫 애가 열 살이었다.

    어렸을 때는 로웰과 놀아 주기도 했을 것이다. 기억엔 없지만.

    로웰은 자신의 형을 도무지 좋아할 수 없었는데 이런 태도 때문이었다.

    탁.

    버트가 서류를 로웰 앞으로 던졌다. 로웰은 받지 않고 쳐다만 봤다.

    “이게 뭔데?”

    “사업 지원 계획서.”

    “누가 하는 거야? 형?”

    “네가 전하를 설득해야지.”

    “밥 잘 먹고 또 헛소리하러 왔어? 요즘 다들 왜 그러나 몰라. 힘쓸 곳이 없나? 아버지는 형이 여기 있는 거 아셔?”

    “못 하겠으면 넘겨. 전하를 독점하고 무슨 꿍꿍이냐? 네가 그런다고 아버지가 지부라도 넘길 것 같아?”

    “아, 또 시작이네.”

    로웰은 현기증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눈알을 빙글빙글 돌리자 버트가 고함을 쳤다.

    “네 수작을 누가 몰라? 둘째 놈 물 먹여 놓았던 것처럼 나도 묻어 버리려고! 네놈을 가만두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가만두다니, 아니면 뭐 어쩌시려고…….”

    로웰은 웃으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개요라도 살피자 싶어 팔랑팔랑 넘기다 기가 차서 버트를 쳐다봤다.

    “형, 혹시 돌았어? 요즘 뭐 약 먹는 거 있어?”

    “이 자식이!”

    “난 형들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유산 받기 전에 이 집안 망하면 안 되는데. 다른 상단 사주라도 받은 거 아냐? 아무래도 첩자인 것 같은데.”

    로웰은 빈정거리며 서류를 던져 놨다. 버트가 책상을 내리쳤다.

    “유산 같은 소리 하고 있어! 내가 네놈 앞으로 한 푼이라도 가는 꼴을 볼 줄 알아?”

    “아버지 앞에서 말씀드리든가. 내가 일에서 손 떼고 한량 생활로 돌아간다 말씀드리면 아버지 혈압 올라서 쓰러질걸. 형보다 백배 더 쓸모 있는 자식이잖아? 나도 노는 게 더 좋지만, 형이 너무 무능한 걸 어쩌면 좋아.”

    “말이면 단 줄 알아! 네가 처음에 왕자 전하를 내게 소개하기만 했어도 이미……!”

    “형이랑 합작했으면 그 사업 말아먹었지……. 아니, 전하께선 기뻐하셨으려나.”

    로웰은 내심 한숨을 쉬며 형을 따스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버트는 왕자의 속내를 짐작도 못 할 것이다.

    “아버지 허락이나 맡고 오지그래. 둘째 형 상대하기도 귀찮은데 정말.”

    “그놈이 왕자 전하를 넘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이냐? 저한테 맡겨 놓은 경매장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무슨!”

    버트라고 자기가 맡은 사업을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로웰은 그러려니 했다. 이 집안 형제들은 스스로를 몹시 사랑해서 안 되면 남 탓이고 잘되면 자기 덕이라는 생각을 상비하고 다녔다.

    로웰은 형과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트가 음흉하게 웃었다.

    “그래, 아버지 허락을 맡으면 된다는 거냐? 내가 허락도 없이 왔을 것 같아?”

    “아, 뭐야.”

    아버지가 또 넘어간 건가?

    로웰은 정말 귀찮아졌다.

    아버지는 상인으로서는 대단한 분이고 존경할 만한 부분도 있었지만 가솔을 다루는 문제는 꽝이었다.

    로웰 자신에게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만, 형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 가관이다.

    귀족은 장자 계승이 원칙 아니냐며, 누가 봐도 무능한 첫째를 어떻게든 잘 데려가 보려고 애쓰는 모습이 이제는 짜증스럽지도 않았다.

    로웰에게 일을 배우라고 종용하는 것도, 아버지 사후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라는 뜻이 아닌가?

    “요즘 왕자 전하께 이상한 물이 들었다며? 갑자기 풍류를 즐기시고 밤 문화를 평정하고 계신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아버지가 직감하셨지. 거기에 네가 관여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고. 응, 전하랑 요즘 무슨 재미를 보고 있냐? 소문이 사실이야?”

    버트가 입을 다셨다. 로웰은 책상 위의 서류를 들어서 그에게 던져 버렸다. 버트는 깜짝 놀랐다.

    “이게 무슨 짓이야!”

    “좀 가!”

    “야! 네가 왕자 전하를 술로 녹이든 유흥으로 녹이든 난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이번에는 진짜 아버지가 화를 내신 거라고!”

    “좀 꺼지라니까!”

    버트는 기가 죽었다. 그는 로웰이 소리치며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봤다.

    “왕자 전하께 사업 소개는…….”

    “닥쳐!”

    아니 저런 못된 놈이! 안하무인으로 커서는!

    버트는 씩씩대며 나갔다. 그러며 로웰의 눈치를 봤다.

    로웰은 머리칼을 헝클고 있었다.

    버트가 다시 집무실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이번 일 해명 못 하면 아버지가 직접 오실걸?”

    “버트.”

    “왜?”

    “아버지는 그 소문을 어디서 들으셨어?”

    몽블랑 상단의 주인은 얼마 전 상행에서 돌아왔다.

    “투서를 받으셨다던가? 너 평소에 행실이 어떻기에 그런 게 날아오냐?”

    로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구겨졌다.

    * * *

    뭔가 이상하다.

    로웰은 골목길을 걷다 말고 고민에 잠겼다.

    왕자 전하는 최근 몹시 바빴다. 스스로의 드높은 평판을 망치기 위해서였다.

    왕자의 밤놀이에 대한 소문은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외국에 계시던 아버지에게까지 소식이 도착한 건 이상하다.

    로웰이 왕자의 놀이에 연관되어 있단 투서가 날아와 봤자, 상단 입장에서 뭘 하겠는가?

    왕자의 담당자 자리를 로웰 말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거나 하겠지. 그 외에 상단에 피해가 가는 것도 아니었다.

    왕실에서 단속에 나선다면 피해가 생길 수도 있겠지만…….

    로웰이 기대서 있는 골목을 장신의 남자가 통과했다. 알렉스 바움쿠헨이었다. 로웰은 반사적으로 왕자를 찾았다가, 바움쿠헨이 혼자라는 걸 확인하고 다가갔다.

    “혼자 어딜 가? 별일이네.”

    로웰은 걸음을 멈췄다. 바움쿠헨에게서 피비린내가 났다. 로웰은 관찰력이 좋은 편이었고, 바움쿠헨이 평소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에 알던 사람을 만났어.”

    “그래서?”

    “내가 전하를 따르는 건 배신이라고 말하더군.”

    “으으응? 뭐에 대한? 그래서, 전하를 저버리라는 거야?”

    “그자는 대가를 치르게 했어.”

    알렉스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로웰은 물론 그의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난 방금 몽블랑의 후계자를 만나고 나왔는데. 전하 곁에서 떨어지라는 말을 들었거든.”

    로웰은 눈을 굴리다 알렉스를 쳐다봤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전하를 생각하는 자로군.”

    이 자식이랑 말을 말아야지.

    “예감이 안 좋아. 전하께 빨리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로웰은 근거를 덧붙이려고 했다. 그러나 바움쿠헨은 ‘안 좋아.’라는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저만치 가 있었다.

    로웰은 이마를 문질렀다. 예감이 정말로 좋지 않았다.

    그들은 조프리 왕자의 최측근이었다. 내막이 어떻든, 겉으로 보기에는.

    그들에게 동시에 ‘왕자에게서 떨어져’라는 신호가 들어온다면, 그게 우연이겠는가?

    * * *

    아카데미 무도회 당일은 분주했다. 기숙사는 낮부터 개미굴처럼 북적거리더니, 저녁이 되자 미어터질 듯했다. 방마다 문을 활짝 열어 놓아서 복도를 걸어가기도 힘들었다.

    로웰은 내게 무슨 할 말이 있다고 해 놓고 이내 말을 바꿨다.

    “다음에 상의드리고 싶어요. 확실해지면요.”

    난 그러라고 했다. 아마 소문에 관한 게 아닐까.

    알렉스와 로웰은 한껏 꾸몄다. 둘 다 머리를 올리고 정장을 입어서 꼬리를 세운 공작새 같은 게 연상됐다.

    그들을 각자 침대에 구겨 놓고 도트는 내 머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하인을 이렇게 사적으로 부려 먹어도 되나? 하지만 다른 방에도 하인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학생들이 직접 자신을 돌보는 아카데미 정신은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완벽해요, 왕자님!”

    도트가 빗을 놓고 일어났다. 로웰은 턱을 괴고 보다가 “정말이네요. 눈이 부셔요, 전하.” 하고 칭찬했다.

    도트는 기분이 좋은지 로웰에게 시비를 걸지 않았는데, 난 그게 이상했다.

    사실 이쯤 되면 도트의 기분이 좋아서는 안 됐다. 난 로웰과 알렉스를 대동하고 요즘 밤 무도회를 다니고 있었으니까. 도트 귀에 안 들어갔을 리가 없는데.

    밤까지 시간을 보내다가, 때가 되어 둘을 데리고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무도회장은 학생회관 건물에 위치했다. 길을 따라 나무에 조명이 매달려서, 밤하늘을 빛내고 있었다.

    분위기가 그만이었다. 손을 잡고 걸어가는 학생들이 보였다. 여학생은 파트너의 팔에 자신이 손을 얹거나, 파트너에게 자신의 허리를 내어주고 걷고 있었다.

    난 로웰의 허리에 손을 두르고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세 사람이 보폭을 맞춰 걸으려니 속도가 이상해졌다. 학생들은 전부 우리를 한 번씩 쳐다보고 가는 듯했다. 많이 봐 둬라.

    아카데미의 하인이 우리의 입장을 알렸다.

    “조프리 비스코티 2왕자 전하, 알렉스 바움쿠헨 경, 로웰 몽블랑 공자 입장하십니다!”

    하인은 교육받은 대로 고개를 숙였으나 우리를 구경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다. 삼 인 동반 입장은 나도 본 적 없었다.

    우리는 무도회장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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