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5화 (145/293)

145.

‘이델라 에클레어 양에게 초대장이요. 예. 내일 중에 보내겠습니다.’

기숙사장에게 약속받고 나는 기숙사로 돌아갔다.

벚나무 아래에서 왈츠를 연습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춤을 추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학생들은 눈을 마주치고 수줍게 웃었다. 막 사귀기 시작한 연인들인 모양이다.

흐뭇한 광경이었다. 이델라와 에드워드도 저렇게 돼야 하는데.

다른 학생들이 걸어오며 떠들었다.

“들었어? 에드워드 전하께서 누구한테 무도회 파트너를 신청하셨대.”

“엄청 로맨틱했대. 공개 프러포즈 같았다던데?”

“상대가 누구야?”

“이름이…… 이델라 에클레어?”

난 지나치는 학생들을 붙잡았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

* * *

그레이 크래커는 경비대장에게 포상하고 찾던 자를 인계했다.

그 남자는 혈색이 나쁘고 자세가 구부정해서 퍽 불쌍한 몰골이었다. 오랜 시간 어둡고 좁은 곳에서 일한 사람 같았다.

그레이가 들어오자 남자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저,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자식에게 물어보십쇼, 다 그놈이 시켜 놓고 도망간 겁니다!”

그레이는 인상을 쓰며 물러섰다. 그가 턱짓하자 병사들이 남자를 바닥에 무릎 꿇렸다.

그레이는 남자를 살펴봤다. 남자는 발버둥 치다 진이 빠졌는지 멈췄다. 그러면서도 그레이의 눈치를 보는 건 멈추지 않았다.

“수도의 고아원에서 열두 살까지 머물다 항구 노예로 팔려 갔습니다. 범선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반년 전 수도로 도망치다 잡혔다고 합니다.”

경비대장이 남자의 신상을 말했다.

“항구 노예였다면 달리 면천받을 기회가 많았을 텐데?”

그레이는 의문이 들어 물었다가 금방 답을 찾았다.

사업병 걸린 귀족들이 아무 노예나 큰돈을 주고 부려 먹는 것은 아니다. 사업에 필사적인 만큼 건장하고 믿음직한 노예를 부리기를 원했다.

이자야 해당 사항이 없었을 것이다. 키도 작고 왜소하다.

그레이는 남자 앞으로 걸어갔다. 발치에서 남자가 고개를 필사적으로 틀어 그레이를 올려다봤다.

“일을 하나 해 줘야겠다. 잘 해내면 너를 감옥에서 빼내고 신분도 복권해 주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네가 아는 사람 하나를 설득해 내면 되는 일이니까.”

남자는 입을 벌리고 그레이를 쳐다봤다.

저 귀하신 분이 한낱 노예에게 누구를 설득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네가 수도 고아원에 있을 때 알던 사람이다. 그때도 이름이 알렉스였던가? 붉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아주 인상적인 생김새이니 기억하겠지.”

“알렉스! 그놈! 예. 물론입니다! 기억합니다!”

알렉스는 남자와 나이가 엇비슷했으나, 고아원에서의 처지는 달랐다. 알렉스 놈은 원장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같은 빵을 먹어도 그놈의 것이 더 크다는 걸 모르는 원생이 없었다. 남자는 알렉스가 그 빵을 어린아이들에게 양보하곤 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네가 아는 알렉스는 바움쿠헨 백작의 양자가 되어 왕자를 모시고 있다.”

“백작의 양자? 그놈이?”

“그래. 네가 노예로 힘들게 일하는 동안. 알렉스 바움쿠헨은 나라의 영웅이 됐지.”

“알렉스 바움쿠헨!”

남자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들으면서도 한 번도 그 알렉스와 연관해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네가 노예로 팔린 연유를 아직 모르겠지. 네가 지내던 고아원은 왕비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노예로 팔 고아들을 관리하던 곳이다. 현재 바움쿠헨이 모시는 왕자가 그 왕비의 아들이지. 네가 할 일은 바움쿠헨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노예로 팔려 간 네가 얼마나 괴롭게 살아왔는지를 얘기하는 것이다. 왕자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면 충분해. 할 수 있겠나?”

“예, 예, 나리. 맡겨 주십시오.”

남자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알렉스 놈만 왕자를 모시며 호강하고 있다니, 그 왕자가 자신을 노예로 팔아 버렸다니.

알렉스 놈은 그렇다면 왕자의 노예로 팔려 갔단 말인가?

그놈은 예쁘장해서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그가 고생하는 동안 그놈은…….

남자를 내보내고 그레이는 병사에게 명령했다.

“하루 더 굶겨. 너무 기운이 넘쳐서 설득력이 떨어지겠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조프리 왕자의 측근이다. 불유쾌한 추측이 아니더라도 1순위 제거 대상이었다.

그레이는 이마를 문지르며 다음 목표에 대해 생각했다.

로웰 몽블랑.

이자를 건들 필요가 있나? 그레이는 상인의 신의라는 걸 믿지 않았다. 왕자 곁에서 얼쩡거린대도 기회주의자의 행태일 뿐이다.

그러나 최근 보고서를 넘기면서 그레이의 표정은 점점 딱딱해졌다.

조프리 왕자는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지?

* * *

알렉스 바움쿠헨은 방문자를 만났다. 어두운 안색의 마른 남자를 그는 처음에 알아보지 못했다.

“알렉스, 오랜만이다. 널 만나서 다행이야. 나, 나 기억해? 같이 고아원에 있었잖아…….”

“잭.”

알렉스가 이름을 기억해 내자, 잭은 작은 눈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기억하는구나! 네가 너무 대단한 분이 돼서, 나 깜짝 놀랐잖아. 그간 어떻게 지냈어?”

잭이 한숨을 쉬었다. 그가 너무 말라서 알렉스는 놀랐다. 고아원의 생존자를 보면 반사적으로 차오르는 그리움이 알렉스를 지배했다.

“네가 만나 줄 줄은 몰랐는데, 나, 나는 말이야, 네가 영웅 바움쿠헨 경이라고 해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하……. 정말, 너 만나러 오기 힘들었어.”

알렉스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가만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대답을 하게 만드는 건 권력자들의 태도였다.

잭은 예상대로 안절부절못했다. 알렉스도 그 입장이었던 적이 있었다. 잭이 얼마나 불안할지 알고 있었다.

“너는 나 별로 안 반가운가 보다. 그렇겠지. 잘 살고 있을 테니까. 나는 항구로 팔렸어. 알잖아, 몇 년 전만 해도 항구 노예들이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난 어린애였으니까 힘도 제대로 못 써서, 좁고 더러운 곳을 청소하거나 잔심부름을 하는 것밖에 못 했다고. 매일 맞아 가면서, 가축이나 쓸 법한 데서 잠자고. 한밤중에도 일하고…….”

더듬거리던 잭은 고통스러운 세월이 떠올랐는지 숨도 쉬지 않고 말했다. 잿빛 머리카락, 혈색 나쁜 얼굴이 붉어져서 목에 핏대가 섰다.

이윽고 잭이 훌쩍거렸다. 그러면서 잭은 알렉스를 힐끗 올려다봤는데, 그 표정을 보고 알렉스는 그와 있었던 일을 떠올려 냈다.

잭은 고아원에서 어린 원생의 실적을 가로채거나 먹을 것을 빼앗곤 했다. 알렉스가 저지해서 못 하게 되자, 한밤중에 알렉스의 침대에 뱀을 풀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범인이 잡히지 않고 넘어갔으니, 잭은 알렉스가 모르는 줄 알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왕자 때문에 일어났다는 거야. 너 알고 있었어? 우리가 구걸하고 도둑질하며 살아야 했던 것도, 고아원 식구들이 노예로 끌려가서 소식도 없이 뿔뿔이 흩어진 것도 왕자 때문이래.”

알렉스는 멈칫했다. 그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이자, 잭은 신나서 말했다.

“네가 모시는 분을 나쁘게 말하긴 그렇지만……. 나도 그렇고 다들 너무 고통받았어. 어디 우리만 그랬겠어? 그런 고아원이 우리 하나였겠냐고. 넌 모를 거야. 얼마나 괴로웠는지. 지금도 얼마나 괴로운지. 넌 착한 애였잖아. 정의롭고. 항상 우리를 지켜 줬잖아. 너 어린 레나 기억나? 걔가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지? 귀여운 애였으니까 아마 그런 데 팔렸겠지…….”

“그 앤 바움쿠헨령에 있어.”

“어?”

“성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어. 행방을 궁금해했잖아.”

“아. 살아 있구나! 네가 구한 거야? 둘이 만났어? 다행이네!”

잭이 어색하게 말했다.

“그때 많이 죽었지. 빠르게 처분하기 힘들 법한 애들은 다 죽여 버렸으니까.”

알렉스는 건조하게 말했다.

“네가 왜 죽지 않았는지 알아. 다른 애인 척 마차에 올랐지. 그 어린애가 죽어 버릴 걸 알면서 밖으로 밀어 버리고 마차로 기어들어 갔잖아.”

“너……. 무슨 소리를…….”

잭은 부들부들 떨었다. 그때 고아원에선 많은 아이들이 죽었다. 다들 정신없었고 알렉스는 진작 기절할 정도로 맞아서 어딘가 끌려갔다.

그가 알 리 없다. 잭은 진정하려고 했다.

“그 애가 바움쿠헨령에 있다고 말했잖아. 전하께서 고아원 아이들의 수색을 명령하셨지. 아니었다면 어떻게 팔린 아이들을 찾아서 구했겠어.”

“전하? 그러니까 왕자가……. 그럼 대체 왜 난…….”

잭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난 왜 구하지 않은 거지?

“수색이 쉽진 않았어.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 몇 년에 걸려 찾으면서, 네가 어디 있는지 알았어. 항구에 묶여 있으니 원하면 언제든 데려올 수 있었지.”

“그런데 왜!”

잭이 고함쳤다. 친근한 척하던 가면이 깨져 나간 얼굴을 알렉스는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널 보면 죽이고 싶어질 게 뻔하잖아.”

알렉스를 찾아온 손님이 있다고 하인이 말하자, 왕자 전하는 ‘고아원 생존자가 있었어? 만나고 와.’ 하고 권했다.

전하는 알렉스가 기뻐하길 원하실 것이다. 알렉스는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그가 검을 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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