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로웰은 원고를 수거해 내게 가져다줬다. 학생들이 원망에 찬 눈빛으로 로웰을 노려봤다.
로웰이 끄나풀이라도 되고 난 악역 경찰이라도 된 듯했다.
카페 주인과 그 아들은 카운터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어수선한 방 안을 보고 ‘아니, 이렇게 청소하기 어렵게 해 놓으시면, 손님들…….’ 하고 투덜대다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자신들과 관련 없는 일이라고 빌기 시작했다.
그럴 것 같았다.
카페 주인과 그 아들을 보는 학생들 표정도 ‘저 사람들은 뭐야?’였다.
난 원고를 몇 페이지 읽다 말고 로웰에게 넘겼다.
첫 문장부터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를 비판하고 있었다. 귀족들의 수사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도 요지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왕도 왕족도 별로다, 왕정은 잘못됐고 백성들을 위해서라면 다른 형태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건데.
이거 공화정 아닌가?
로웰은 원고를 정신없이 읽고 있었다. 손이 덜덜 떨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가 테이블에 원고를 던져 놨다.
“전하, 저는 정말로 이들과 아무 관계가 없어요. 믿어 주세요!”
“알아.”
난 그를 안심시켰다.
관계있다고 해도 상관없지만.
조프리 루트의 고난은 에드워드와의 경쟁이었다. 여주인공은 조프리가 열등감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면서 조프리의 호감을 얻는다.
에드워드 루트의 고난은 뭐였을까? 왠지 왕비님이었을 것 같기도 하지만,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레이나 다른 캐릭터들은 짐작도 안 간다.
공화정이니 뭐니 하는 얘기는 로웰 루트의 고난 아니었을까?
이 모임과 가장 깊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로웰이다. 로웰이 공화론자든 아니든 고난이 될 만한 사건이다.
지금은 내게도 고난이 될 것 같다.
“왜 모임을 카페에서 가진 거야? 왕자 소유라는 걸 몰랐을 리도 없고.”
난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다.
학생들은 한쪽 벽에 붙어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덜덜 떨고 있어서 ‘왕자들의 목을 어쩌고’ 하는 과격한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사람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긴 했다.
에드워드 말고 조프리 목을 노리는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줄 몰랐는데.
“자, 잘못…….”
“사죄가 아니라 이유를 듣고 싶은데.”
알렉스가 검집째로 사람을 찔렀다.
날도 없는데 콱 들어박혔다.
찔린 사람이 엎어져서 토할 듯이 기침했다. 학생들이 헉 소리를 내며 저들끼리 더 붙었다. 기숙사장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아니…….
“알렉, 그러다 죽지 않을까?”
“예, 전하.”
알렉스는 그게 뭐가 문제냐는 듯 대답했다가 깜짝 놀랐다.
“반역죄는 즉결 처형이 아닙니까?”
맞긴 한데.
바움쿠헨 백작은 애한테 뭘 가르친 거지?
학생들은 다시 숨을 삼켰다. ‘우린 죽었어’라는 표정이었다. 찌르면 울 것 같았다. 난 일단 구슬려 봤다.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왜 여기서 이런 위험한 작업을 했어?”
학생들은 서로를 돌아보다가 앞다투어 얘기해 줬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으니까요, 저 멍청이가 전하의 카페에서 작업하면 누구도 모를 거라고…….”
“전하께선 카페를 찾지도 않으신다고, 하지만 전하의 카페를 수색할 경비병이 있을 리가 없다고요!”
“다른 가게들은 정기적으로 순찰을 도니까요. 술집은 통째로 빌리기에 돈도 많이 들고요.”
“그런데 방을 빌려준다지 뭐예요. 음식점은 시간제한도 있는데 여기는 일정 금액만 내면 하루 종일, 며칠, 몇 주를 빌려도 괜찮고…….”
요는 아지트로 삼기 완벽한 조건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우습게 봤군요. 전하, 경비대에 신고할까요?”
로웰이 차갑게 물었다.
학생들은 떨기 시작했다.
게임에 이런 사건이 있었나?
물론 아니었다.
적어도 에드워드와 조프리 루트를 진행할 땐, 혁명 세력이니 뭐니 하는 건 나오지 않았다.
이건 다른 루트의 이벤트다.
“왕과 왕자의 목은 어떻게 자르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내가 물어보자 학생들이 깜짝 놀랐다.
“예? 무슨 말씀을?”
“그런 내용이 있어?”
“어떤 미친놈이야?”
“돌았나 봐.”
저게 연기라면 연기 대상감이다.
자기들이 받은 원고 내용도 몰라?
“너네 진짜 뭐야?”
“저, 정책 연구 모임…….”
누군가 모임 이름을 실토했고 방은 침묵에 잠겼다.
그런 거 조프리 초상화 달린 카페에서 하지 마…….
“이거 어디다 배포할 거야?”
기숙사장에게 묻자,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내저었다.
“저희끼리만 돌려 읽을 생각이었습니다, 전하. 그런 불온한 짓은…….”
“야! 좀 조용히 해!”
다른 학생이 기숙사장에게 화냈다. “아까부터 입만 열면 멍청한 소리야!” 또 누가 비명을 지르듯 속삭였다.
“배포도 안 한다고?”
“저, 저희는 반란 세력이 아닙니다. 그저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 모였을 뿐입니다.”
“여기 내 얘기 더 있어?”
학생들은 조용해졌다.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서 내가 찾았다.
「조프리 왕자의 행보는 위선에 가득 차 있다.」
「우민을 대상으로 한 포퓰리즘 사업」
그런 거 언제 했는데?
원고에 그림자가 졌다. 알렉스와 로웰이 양어깨 너머에서 원고를 읽고 있었다. 알렉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기어코 검을 빼 들었다.
“전하, 저 반란 세력을 제 손으로 처단하게 해 주십시오. 전하의 눈을 더럽힐 것도 없이, 저 쓰레기들은 제가 태워 버리겠습니다.”
“누가 모이자고 했어!”
“처음부터 이런 짓 하는 게 아니었어!”
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니, 이런 글 쓸 정도면 담력이 엄청나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와중에 기숙사장은 혼자 조용했다. 얼굴은 새파란데도 눈이 죽지 않아서 반란 세력의 수괴를 할 만했다.
“왜 배포 안 해? 내용 좋은데.”
난 다시 물었다. 이번엔 정말로 궁금해서였다.
기숙사장은 다른 학생들을 굳은 얼굴로 돌아보더니 말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치욕스러운 모습을 보이기 전에 죽여 주세요.”
“너나 죽어! 왜 우리까지 죽여?”
“네가 시작했지! 이런 데 들어오는 게 아니었어!”
학생들이 아우성쳤다.
“이 글 기숙사장이 썼어?”
난 조프리에 대한 원고를 들어 올렸다.
“네, 전하!”
“그놈 짓입니다!”
기숙사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닥쳐올 고통을 감내하려는 듯했다.
“이거 배포하자.”
“예?”
기숙사장이 눈을 떴다.
검을 든 알렉스가 나를 돌아봤다.
이 세계에도 신문이 있기는 하다. 관리들을 대상으로 한 정책 신문 같은 거였지만.
기사가 아니라 공문 같은 느낌으로, 위에서 아래로 하달되는 전달 사항이 기사로 실려 배포됐다. 조프리가 열한 살부터 읽고 공부한 그거다.
그 외의 다른 신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명도 기형적으로 발달해 있고 문맹률도 낮은데, 지식인이나 평민들을 대상으로 한 신문이나 잡지도 없었다.
왜 없을까? 그야 당연히 제작자가 귀찮아서겠지만. 게임에서 시간이 지날 때마다 새로운 신문 기사를 만들어 띄워 주려면 노력이 더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신문이 없어야 할 그럴듯한 이유도 있었다.
이 세계관에 신문이 있었으면, 여주인공이 에드워드와 첫 데이트를 한 날 바로 파파라치가 붙었을 테니까.
여주인공은 ‘왕자 전하의 연인? 상대는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모 양.’ 같은 기사의 주인공이 돼서 다른 캐릭터 공략은 시도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긴 이 게임이라면 신문이 있어도 여주인공과 공략 캐릭터는 신출귀몰하게 안 찍혔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내 격려를 들은 기숙사장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다양한 의견을 듣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해. 그대들이 여기에 모여 원고를 나눠 읽고 자판기로 찍어 내는 것도 서로의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잖아? 하지만 이러한 지식을 골방에서 소수의 사람만 독점한다면, 그대들이 주장하는 백성을 위한 정치에 합치할까?”
기숙사장은 눈만 크게 뜨고 있었다.
“하오면 어찌하라는 말씀이신지…….”
“그대들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고 싶은 게 아니야. 정치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는 것이 백성들이지. 그런데 왜 백성들에게 다른 견해를 접하게 해 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 그대들이 정말로 정책을 연구하고 싶다면, 백성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해서 그래.”
“그런 생각은 해 본 적 없었습니다.”
기숙사장은 깜짝 놀라 움직였다. 그 때문에 알렉스의 검에 꿰뚫릴 뻔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백성들에게 배포라니! 그렇군요, 저희끼리 말로만 떠들 게 아니라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고 진실을 알린다!”
괜찮은 건가? 목에 피 흐르고 있는데.
애초에 원고지에 쓰인 게 진실도 아니었다.
일단 조프리는 이런 훌륭하고 영리해 보이는 사업 진행한 적 없다.
기숙사장을 한번 배신한 친구들은, 어쨌든 같은 편이라고 기숙사장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기숙사장이 나를 힐끗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전하에 대한 얘기는 빼고 배포하는 걸로…….”
“무슨 소리야? 내 얘기도 해야지.”
“예?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이들 가운데 뚝심을 갖고 조프리 소문 퍼뜨리기에 일조해 줄 인재는 기숙사장밖에 없었다.
그런 기숙사장이 약한 소리를 해서야 안 될 일이다.
난 엄하게 말했다.
“허락의 문제가 아니야. 그대 양심의 문제지. 이 원고는 그대가 정책을 논하는 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넣은 거잖아? 자신의 행동에 책임감을 갖고 진행하도록 해.”
“전하…….”
기숙사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왕자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막상 왕자가 앞에서 격려해 주면 마음이 벅찬 모양이다.
“힘내서 신문 발행을 추진하도록 해. 꼭 나에 대한 기사를 읽고 싶군. 참고로, 난 요즘 밤 나들이에 빠졌어. 주색을 즐기며 술집과 수상한 가게를 내 집처럼 드나들고 있으니, 그 사실도 적시하면 좋을 거야.”
“예?”
이로써 조프리 평판 문제는 해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