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3화 (143/293)
  • 143.

    파벨은 용기를 내 왕자를 쳐다봤다. 이 나라에서 영웅 취급을 받는 금발의 왕자는 언제 봐도 인간 같지 않은 미모였다.

    “조, 조프리 전하입니다.”

    “조프리의 애인이라고?”

    에드워드가 이델라를 돌아봤다. 그녀는 넋을 놓고 있다 화들짝 놀랐다.

    “아니에요!”

    “맞잖아?”

    파벨이 윽박질렀다. 그러느라 슬쩍 쳤을 뿐인데 이델라가 바닥에 넘어졌다. 복도가 다시 소란해졌다.

    “왜, 왜 넘어지고 그래?”

    “너 돌았어?”

    체레니아가 진심으로 물었다. 주변 학생들도 그녀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뭐야, 돌았나 봐. 파벨이 변명하기도 전에 에드워드가 이델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날 수 있어?”

    “예, 전하…….”

    “조프리와는 무슨 관계야?”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다행이네.”

    에드워드는 몸을 굽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봉투를 주웠다.

    “이건 그대 건가?”

    “아니요.”

    파벨은 그게 뭔지 알아챘다. 그가 준비해 온 봉투였다. 언제 떨어뜨렸지?

    “자, 잠깐…….”

    에드워드가 봉투를 열었다.

    적당히 자른 종이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한가운데 ‘초대장’이라고 조잡하게 쓰여 있었다. 물론 그건 제대로 된 초대장이 아니었다. 이델라가 초대장이니 뭐니 말해서, 그녀를 놀려 주려고 만들어 온 거였다.

    “하…….”

    이델라는 한숨을 쉬더니 치마를 툭툭 털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이런 일을 목격하시게 해서 죄송해요.”

    그녀는 에드워드에게 인사하고 파벨을 경멸의 눈길로 쳐다봤다.

    파벨은 다른 무엇보다 그 눈이 견딜 수 없었다. 감히 저런 여자가…….

    “셔벗에는 왕족의 일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풍습이라도 존재합니까? 그대가 외국의 귀족이라고 모든 무례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마세요. 에드워드 전하의 관대함에 감복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세요.”

    그레이 크래커가 말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관대하게 넘어가서 학생들은 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왕자는 친절하게도 피해자인 이델라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듯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이델라는 감동해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자가 떠나자마자 귀족들은 파벨을 외면하고 가 버렸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하, 진짜. 별…….”

    파벨의 무리마저 그를 두고 들어갔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았으나, 아무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손발이 차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그때 창문 너머에서 파벨을 쳐다보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조프리 왕자.

    파벨은 그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자신은 왕자를 위해 나서지 않았던가. 왕자가 지켜 줄 것이다!

    그러나 조프리는 등을 돌렸다.

    파벨은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27. 게임 공략

    파벨은 강의실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학생들은 강의실에 들어오자마자 그 일에 대해 함구했다. 에드워드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본 건 그가 이델라를 챙겼다는 사실뿐이었다.

    에드워드는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는 성격이 아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나는 모르겠고, 일단 사람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애라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툭하면 다른 사람을 의심하고 토라지는데 연애는 어찌 하려는지 모르겠다.

    그 에드워드가 이델라에게 관심을 보였다…….

    “전하?”

    알렉스가 졸다 말고 나를 불렀다. 생각에서 깨어나 필기를 보니, 기어가는 글씨체로 이델라의 이름만 반복해서 써 놨다.

    노트를 덮고 앞을 쳐다봤다. 맨 앞자리에 앉은 이델라는 고개를 치켜들고 강의를 듣는 중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목표만 생각하자.

    이델라와 에드워드를 무도회에 보내야 한다. 이델라는 기회를 마다하는 성격이 아니니, 무도회 초대장을 받으면 참가할 것이다.

    에드워드는…… 그레이를 쑤셔 볼까?

    첫 무도회는 중요했다. 이델라와 공략 캐릭터의 호감도가 크게 움직이는 이벤트였다.

    에드워드라는 공략 캐릭터는 이델라에게 백마 탄 왕자님 역할이었다.

    이델라가 그를 보고 ‘와, 정말로 말까지 백마야…….’ 같은 생각을 했다는 건 차치하고라도, 어쨌든 전형적인 왕자 캐릭터로 만들어졌다는 건 확실했다.

    그가 백마 탄 왕자처럼 활약할 기회였다.

    이델라에게 첫 무도회는 고난스러운 사건이니까.

    아카데미 내 파티는 전부 학생들이 주최했다. 학생 개인이 주최자인 경우는 없고, 동아리나 그 외 학생 모임들이 연합해서 꾸려 나갔다.

    중간고사 직후 열리는 전 학년 무도회는 학생회 임원들이 주축이었는데, 모든 학생을 환영하는 듯한 이름과 달리 역시 초대장이 필요한 파티였다.

    물론 조프리 왕자는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초대받을 것이다.

    문제는 이델라였다. 그녀를 조프리의 파트너로 동행시킬 순 없었다. 그렇다고 알렉스나 로웰의 파트너로 만들 수도 없으니 따로 초대장이 필요했다.

    누가 초대장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가까이는 기숙사장이 있었다.

    점호 시간까지 기숙사장을 기다려 볼까 했는데, 로웰이 기숙사장의 위치를 알려 줬다.

    “매일 전하께서 인수하신 그 카페에 죽치고 있던데요.”

    “아직도?”

    난 로웰과 알렉스를 대동하고 카페로 향했다.

    시험이 끝나서인지 거리는 북적북적했다. 카페가 위치한 길목에 들어서도 수가 크게 줄지 않았다.

    “이상하네요.”

    로웰이 말했다.

    “뭐가?”

    “이렇게 사람이 많을 곳이 아닌데. 제가 저번에 왔을 때는 카페만 학생들이 들락거렸거든요.”

    카페는 물론이고 주변 가게도 성황이었다. 로웰은 상인처럼 고민에 잠겼다.

    “딱히 요인이랄 게 있나? 전하께서 가게에 안 찾아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카페로 들어서자 정신없이 바쁜 주인이 보였다. 주인은 음료를 만들고 있었고 그와 비슷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들인 듯했다.

    “어서 오세요. 주문하시겠어요……. 아버지!”

    아들이 맞았다.

    직원의 외침에 카페 주인은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왜?”

    “아버지, 아버지!”

    “아, 왜?”

    “전하께서 오셨어요!”

    “뭐? 그걸 왜 이제 말해!”

    카페 주인이 손을 앞치마에 대강 닦고 모자를 정돈했다. 그가 활짝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전하! 오셨군요!”

    “응. 잘 지내는 것 같네. 누굴 좀 보러 왔는데.”

    “예, 예! 전하의 은덕에 제가…….”

    “응.”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난 로웰을 돌아봤다. 그가 나서서 기숙사장의 신상 정보를 설명했다.

    “제임스 퐁듀, 주변에서 다들 젬이라고 부르는 갈색 머리 남자. 여기 단골이라던데, 안에 있어?”

    “아, 예! 친구들과 방을 빌려 들어가 있습니다. 안내해 드릴까요?”

    카페 주인은 흔쾌히 손님 정보를 제공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나는 기숙사장과 그 친구들이 이곳에 거의 상주하다시피 살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카페 주인의 아들이 어떻게 내 얼굴을 알아봤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이게 뭐야?

    “으음, 엄청나네요.”

    로웰이 침음했다. 저렇게 돌려 말할 필요가 있나? 어이없다고 말해도 되는데.

    “부끄럽습니다. 거리 화가의 조악한 솜씨라…….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고 싶은 마음이 너무 커서요. 다음엔 이름 있는 화가에게 부탁하려고 합니다.”

    카페 주인은 쑥스러운 듯 말했다.

    복도 벽에 조프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거울에서 자주 보아 오던 얼굴이 실물보다 열 배는 미화되어 그려져 있었다.

    왕비님의 사실에도 이런 게 걸려 있긴 하지만, 그건 어릴 적 조프리의 모습이라 차라리 나았다. 이건 소름 끼친다!

    “그 거리 화가가 누구입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알아내서 조치하려나 했는데, 알렉스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그냥 갖고 싶은 것 같다.

    “왜 이런 걸 먼저 생각해 내지 못했을까요? 엄청 팔렸을 텐데!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나…….”

    로웰은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저거 언제부터 걸려 있었어?”

    “잘 기억나진 않지만, 아마 2주는 된 듯합니다. 그렇지?”

    카페 주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이 “그럴걸요?” 하고 대꾸했다.

    괜찮은 건가? 일하는 두 사람이 카운터를 안 지키고 있는데.

    아무튼 카페 손님이란 손님은 전부 저 초상화를 봤을 것 같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내리면 안 돼?”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수준 낮은 화가에게 전하의 초상을 맡기다니. 훌륭한 화가에게 그림을 다시 의뢰해서, 비단과 금으로 장식해 놓겠습니다!”

    눈치 보던 카페 주인이 엎어졌다. 그 아들도 어어 하더니 같이 고개를 조아려서, 복도에 쿵 소리가 났다.

    방에 있던 학생들이 문을 열었다.

    “밖이 왜 이렇게 시끄러워?”

    가장 먼저 나온 기숙사장이 나를 발견하고 안에다 외쳤다.

    “숨겨! 왕자 전하다!”

    뭘?

    “저, 전하. 안녕하세요.”

    기숙사장은 안경을 제대로 올리고 태연한 척 인사했다. 손에 땀이 배는지 자꾸 교복에 문대고 있다.

    “응, 안녕. 뭐 하고 있어?”

    “별거 아닙니다. 하하. 저희 모임 활동을…….”

    “무슨 모임?”

    “그, 저, 아카데미 내 지식인들의 사유 활동, 어, 그러니까 사건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싣는…….”

    누군가 기숙사장의 등을 때렸다. “쟤 좀 닥치게 해!”, “너 미쳤냐?” 안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가 문을 열었다. 기숙사장은 버티려 했으나 힘으로 당해 낼 수 없었다.

    문이 쾅 열리고, 기숙사장은 알렉스에게 목덜미가 붙잡혔다.

    “안 돼요! 잠시만요! 잠깐만! 전하!”

    그가 버둥거렸다. 안에서도 비명이 들렸다.

    로웰이 가장 먼저 안으로 들어가 공모자들을 붙잡았다.

    “이 배신자!”

    “로웰 몽블랑!”

    활짝 열린 문으로 방 안이 들여다보였다.

    원고지와 잉크, 옛날 타이프라이터처럼 보이는 것들이 널려 있어서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니까, 7, 80년대를 다룬 영화 속 학생 운동 조직 장면 같은…….

    너네 뭐 하고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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