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파벨레 상송은 초조했다. 이델라 에클레어는 뭐를 하느라 정신이 팔렸는지 책에 코를 박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다.
쉬는 시간에 찾아오라니까!
대가는 그렇게 밝히더니 기억력이 나쁜 여자다. 그녀가 먼저 파벨에게 와서 돈을 요구해야 그림이 그럴듯하지 않겠는가?
그의 무리가 주변에서 속닥거렸다.
“저 여자야? 리본?”
“왕자 전하의 연인이라고?”
“연인은 아니라니까. 전하께서 속고 계신다고.”
파벨이 짜증스레 말했다.
“밀회하는 모습을 봤다며? 빼도 박도 못할 정도라며. 속고 계신 건 어떻게 알아?”
“너라면 손에 물 묻히고 일하는 여자를 만나겠냐?”
“너 전에 파티에서 만난 여자 평민이었잖아?”
“그건 내가 놀아 준 거고!”
파벨이 짜증을 내자 친구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델라 에클레어의 앞자리 여학생이 그녀의 책상을 툭 치더니 뭐라고 말을 걸었다. 이델라는 그제야 일어났다. 파벨은 그녀가 곧장 그에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강의실 뒷문으로 향했다.
“가는데?”
“에이, 진짜!”
파벨은 책상을 밀치며 일어났다.
그는 이델라를 바로 따라가려다가, 마음을 바꿔 조프리 왕자에게 향했다.
이델라를 추궁하는 일이 강의실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왕자가 그 모습을 볼 수 없지 않은가? 밑밥을 깔아 두자는 생각이 들었다.
파벨은 왕자에게 다가가서 그의 진실한 마음을 보였다. 왕자를 걱정하는 마음이 잘 드러났을 것이다.
왕자가 이델라의 이름에 당황하는 걸 보며 파벨은 거의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왕자가 이델라와 도서관에서 또 나란히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왕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는 못 들었지만, ‘그날…… 걱정…….’ 같은 핵심 키워드는 들었다.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중이다. 파벨은 직감했다. 이델라는 원하는 만큼 왕자에게 걱정을 끼친 듯했다.
파벨은 한참 전부터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에, 이델라가 왕자와 부딪혀서 책을 떨어뜨리는 장면도 목격했다.
이델라의 수작이 경지에 올라 있어서 왕자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가자.”
파벨은 정의의 사도처럼 복도로 나갔다. 강의가 시작하기 전에 이델라 에클레어는 돌아올 것이다.
범인은 현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패거리는 파벨의 뒷모습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들은 따분하고 지루했다. 사건 사고라면 언제든 환영이었다.
* * *
이델라는 룸메이트와 강의실을 나갔다. 그녀가 룸메이트와 말을 튼 건 바로 지난주였다.
그 전까진 그녀가 정신없이 바빴고, 룸메이트도 모임이며 뭐며 방에 들어오지 않아서 인사만 하는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이델라가 시험을 보고 돌아온 룸메이트에게 말을 걸자, 룸메이트는 뜻밖에 쾌활한 인사를 돌려줬다.
‘이제 바쁜 일은 끝났어? 너 늘 피곤해 보이더라.’
이델라의 바쁜 일은 언제가 되어도 끝나지 않겠지만, 그녀는 ‘응, 일단은.’ 하고 웃었다.
룸메이트의 이름은 체레니아 플랑베였다.
인맥 관리는 중요했다. 아카데미의 설립 목적 중 하나는 젊은 귀족들 간 교류의 장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델라도 귀족 부모를 둔 덕에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이 그런 걸 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친구를 만들기에 그녀는 너무 여유가 없었다.
나가서 놀 돈도 시간도 부족했다. 이름만 귀족이니까. 진짜 귀족 아이들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나 이델라가 장대한 계획을 세우면서, 그녀에겐 약간의 시간이 남게 되었다.
이델라는 도서관 방문을 제외하고 주말에 외출하지 않았다. 그녀가 방에 붙어 있자, 체레니아도 나가지 않았다.
‘약속이 취소됐어. 그래서 말인데, 혹시 슈크림 좋아해?’
두 사람은 유명 제과점의 슈크림을 먹으며 수다를 떨었다.
체레니아는 이델라가 생애 처음으로 사귄 친구였다. 이델라는 체레니아가 부담스러워할 테니 그 얘기는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체레니아는 쾌활하고 사교적이어서 친해지기 쉬운 성격이었다. 더불어 연애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와 어울린 지 하루 만에 이델라는 아카데미의 모든 연애 사건에 통달하게 되었다.
이 아카데미에 남학생들 간의 연애가 그렇게 흔했단 말인가? 이델라는 의문이었으나, 어쨌든 룸메이트가 체레니아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연애를 어떻게 하는 걸까?’
‘사랑 고민이야? 어쩌면 좋아.’
체레니아는 기뻐하며 이델라의 고민거리를 해결해 주려고 했다. 그녀는 사랑을 주제로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조예가 깊었다.
그녀가 선뜻 어떤 무도회에 같이 참석하지 않겠냐고 권해 준 덕분에, 만남에 대한 걱정도 한결 덜었다.
며칠이 지나자, 이델라는 그녀와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붙어 있게 됐다.
이델라는 친구랑 그렇게 딱 붙어 다니는 생활이 처음이었다.
파벨레 상송이 이델라에게 다가온 건 그때였다.
맞다. 이 사람도 있었지. 이델라는 이런저런 시도를 하고 있었다. 파벨에겐 별 기대 없이 떡밥을 던져 놓고 잊어버렸지만, 상대는 해 줘야 할 것이다.
파벨의 계획은 이랬다. 이델라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구슬리는 것이다.
‘돈을 더 챙겨 왔으니, 얼마 전 왕자 전하를 만난 자리에서는 뭘 했는지 말해 봐라. 네가 도서관에서 전하와 밀회한 걸 알고 있다.’
돈주머니를 보여 주면 이델라는 술술 불 것이다.
그때 파벨은 돈주머니를 바닥에 내던지며 호통칠 생각이었다.
‘왕자 전하를 팔아 장사하다니! 너 같은 것이 왕자 전하를 속이게 둘 순 없다!’
소란이 일면 왕자가 복도로 나오겠지.
‘무슨 일이야?’
‘전하, 이 여자는 전하를 팔아 사적인 이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밝혀내고 일벌백계하는 중입니다!’
왕자는 다소 충격받겠지만, 파벨이 위로해 주면 될 것이다.
‘내 곁엔 그대 같은 사람이 없군. 로웰보다 훨씬 쓸모 있어.’
완벽한 계획이었다.
이델라 에클레어와 체레니아 플랑베는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파벨은 이델라를 발견하자마자 대뜸 화를 냈다.
“쉬는 시간에 찾아오라고 했잖아. 왜 안 찾아와?”
“뭐?”
반응한 건 이델라가 아니었다. 체레니아가 험악한 얼굴로 되물어서 파벨은 움츠러들었다.
“너 말고! 네 친구 좀 치워 봐. 너 나한테 받을 게 있잖아?”
“받을 거?”
이델라가 되물었다.
“돈! 돈!”
그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이델라는 아,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자신의 친구에게 손짓했다. 잠깐 이따가 봐. 그리고 파벨을 쳐다봤다.
“주시게요?”
그녀의 태도가 다시금 순진해졌으나 파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 너 왕자 전하랑 얼마나 자주 만나? 돈은 더 줄 테니까 말해 봐.”
“자주 못 뵈어요. 왕자 전하신걸요.”
“최근에 언제 만났다거나, 그런 게 있을 거 아냐.”
“최근에?”
여자가 기억해 내지 못해서 파벨은 초조해졌다.
“도서관, 도서관!”
“아…….”
이 여자 바보인가?
“돈을 받고 싶으면 돈값을 해야지. 쓸모 있는 얘기를 좀 해 봐!”
이델라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순진하게 물었다.
“그런데요, 제가 왕자 전하를 도서관에서 뵈었다는 건 어떻게 아세요?”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궁금하잖아요.”
“뭐, 전하 스토킹하는 데라도 사용하게?”
파벨이 비웃자 여자가 “그런 데도 쓸모가 있겠네요.” 하고 대답했다.
“자주는 아니고요, 최근에 잠시 뵈었어요.”
“그 정도면 충분히 자주로군! 전하와 만나면 둘이 무얼 하는데?”
“전하께서는 상냥한 분이시니까요…….”
“그래, 그렇지.”
덫에 걸려드는 것도 모르고 술술 불고 있다.
파벨은 흥분했다. 품에 든 돈주머니를 움켜쥐었다. 에클레어가 모든 걸 털어놓으면 주머니를 던지고 훈계할 생각이었다.
‘왕자 전하를 팔아 번 더러운 돈, 실컷 사용해라!’
친구 한 명은 왕자를 부르러 갔다. 이 모습을 왕자가 보게 해야 한다!
“제게 많은 걸 주셨어요. 제가 달라고 부탁드리지 않아도 말이에요.”
에클레어가 수줍게 말했다. 그러느라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그랬겠지. 그래서 뭘 주셨는데?”
“그러니까…….”
파벨은 저도 모르게 앞으로 다가섰다.
아무것도 부탁드리지 않았다니, 그럴 리 없지. 원래 그런 건 은근히 요구해야 더 받을 확률이 높지 않은가?
파벨도 노골적인 수작에 모르는 척 자주 놀아나 줬다. 왕자야 진짜 모르고 속았을 테니 그가 인생 선배로서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파벨은 ‘그러니까’ 뒤의 말이 신경 쓰였다. 왕자의 상냥한 성품을 이용해서 유혹했다고? 울기라도 했나? 그래서 뭘 받아 냈는데?
에클레어의 표정이 순간 매서워졌다.
“전하의 뒤를 캐고 다니는 너 따위에게 들려줄 얘기는 없다는 거야! 무슨 속셈으로 캐고 다니는 거지? 전하가 가는 곳마다 스토킹을 하고 전하의 인간관계를 염탐하면서, 무슨 짓을 꾸미는 거야?”
파벨은 어이가 없어서 입을 딱 벌렸다. 뭐, 왜 반말이야?
아니, 왜 그가 추궁당하고 있는 거지?
“스토킹 혐의로 경비대에 고소할 테니 방어할 말이나 준비해 둬. 네가 며칠간 날 따라다닌 것도 알고 있어. 왕자 전하의 연인이라도 된다고 생각했나 보지? 정말로 내가 전하의 연인이었다면, 그런 사람을 협박해서 뭘 꾸미고 있었던 거지?”
그녀가 매섭게 추궁했다.
파벨은 입만 헤벌리고 있다가, 주변에 사람이 몰린 걸 보고 정신을 차렸다.
언제 이렇게 사람이 모였지?
“누, 누가 스토킹을 했다는 거야! 난 전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에, 아니, 이 꽃뱀이 누구를 모함해?”
“뭐라고?”
에클레어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동시에 “야!” 하는 고함이 들렸다. 체레니아 플랑베가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어진 얼굴로 분노하고 있었다.
“감히 그런 말을 해! 어떻게 감히!”
그녀가 에클레어 뒤에 섰다. 반면 파벨의 패거리는 그와 거리를 두고 구경꾼들 사이에서 남인 듯 서 있었다.
‘미쳤어?’
패거리 중 하나가 입 모양으로 물었다. 구경꾼의 반은 여학생이었고 파벨은 단번에 그들의 적이 되어 있었다.
흰 눈에 둘러싸여서 파벨은 궁지에 몰렸다. 저 무식한 것들이!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끼어들지 마! 저 여자는…… 저 여자는…….”
파벨은 무언가 불쾌한 단어로 이델라를 격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떠오르는 말을 바로 입 밖으로 던졌다.
“왕자의 정부라고!”
“…….”
복도는 침묵에 잠겼다.
파벨은 투석기로 공성에 성공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전하를 상류 사회로 진입할 발판으로 이용하고 있는 거야! 내게도 무도회 초대장을 구해 달라는 둥 유혹했다니까? 그래 놓고선 왕자 전하랑은 또, 울면서 흠뻑 젖어서 아주…….”
“어떤 왕자?”
파벨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 왕자.
파벨은 뒤늦게 복도가 조용해진 이유를 알았다.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