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1화 (141/293)
  • 141.

    원작의 여주인공은 연애를 하기 위해 만남의 장소로 갔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실전파였지, 책으로 연애를 배우려 하진 않았다.

    그러니까 저런 책은…….

    난 그녀가 품에 끌어안은 책을 쳐다보다 입을 닫았다. 아니면 이상한 소리를 낼 것 같아서.

    이거 돌발 이벤트잖아!

    아마 초반 이벤트였던 것 같다.

    여주인공이 모퉁이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힌 상황에서 선택지가 뜬다.

    [누구랑 부딪힌 걸까?]

    -에드워드

    -조프리

    -…….

    공략하고 싶은 상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게 뻔해서, 난 에드워드를 골랐다.

    하필 그게 공략 캐릭터가 이델라가 떨어뜨린 책을 주워 주는 이벤트일 줄은 몰랐다.

    모퉁이 너머에서 나타난 에드워드는 책을 주워 주다가 제목을 읽고 어리둥절한 상태가 된다.

    이델라는 재빨리 책을 받고 감사하다는 인사까지 깍듯이 남긴 채 복도를 달려 나간다…….

    그런 이벤트였다.

    솔직히 이런 이벤트는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여주인공에게 대입해서 부끄러워하라는 건가? 플레이어가 부끄러워해서 어쩌자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난 입을 막은 손을 내리고 그녀를 떠봤다.

    이델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인지는 말해 줄 계획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아차 한 듯 덧붙였다.

    “물론 제 처지가 누굴 만나고 그럴 정도로 여유롭진 않지만요. 전하께 한심하게 보이겠지만,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이 사람이 없으면 정말 힘들 것 같아서요!”

    “맞아. 인생엔 낭만이 필요하지. 낭만은 사람을 살게 하니까.”

    왠지 이 말 익숙한데.

    “그래서 상대가 누구야?”

    “…….”

    알렉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델라까지도 당황스러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뭐 하게, 라는 시선이었다.

    물론 조프리는 알아도 쓸모가 없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이델라의 첫사랑 상대라는 건 공략 캐릭터가 분명했다.

    네 계획을 알아야 내가 도움을 주지.

    그런데 이델라가 교감을 쌓은 공략 캐릭터가 많던가?

    “나는 아니지? 나한테 반하면 안 돼.”

    이델라의 시선이 떨떠름해졌다.

    “네. 전하는 아니세요.”

    “알렉스야?”

    “그게 누군데요? 아…… 바움쿠헨 경.”

    그녀가 알렉스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알렉스도 고개를 마주 끄덕였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전혀 신경 안 쓰는 듯했다.

    “그럼 말해 주면 안 돼? 너한테 뭐든 힘이 되고 싶은데.”

    “와아, 제 첫사랑을 도와주시려고요?”

    이델라가 당황했다.

    “왜? 사랑이 어때서. 중요하잖아.”

    연애 게임에서 그보다 중요한 건 없다.

    그렇다기보다, 내겐 무엇보다 중요했다.

    “혹시 전하께서는 낭만주의자이신가요?”

    이델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낭만주의자? 연애결혼을 하는 귀족들?

    “응. 물론이지.”

    이델라의 연애를 지지한다는 뜻으로 대답하자, 그녀의 안색은 한층 어두워졌다.

    고개 숙인 그녀가 시계를 확인하더니 당황했다.

    “아! 시간이! 저, 동아리 입단 심사가 있어서 가 봐야겠어요. 죄송합니다, 전하.”

    “동아리?”

    “예, 전하. 정말 죄송합니다. 도움 주신다고 말씀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이델라는 대화를 단절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감사 인사를 하고 가 버리면 이쪽에서는 붙잡을 수 없다.

    아니, 그런데 여주인공이 무슨 동아리야?

    여주인공은 동아리 같은 데 속했던 적이 없다. 여주인공의 소속은 학생회였다.

    아, 그거구나.

    무도회 초대장을 얻기 위해 학생회에 들어갔듯, 지금은 동아리에 들어가려는 거였다.

    이델라는 언제나 방법을 찾아낸다.

    하지만 무도회 초대장을 얻기 위해서라면 훨씬 간단한 방법이 있을 텐데?

    눈앞의 왕자라든가.

    결국 이델라의 공략 대상이 누군지는 못 들었다.

    무슨 실험 같은 게 떠올랐다.

    어떤 캐릭터가 있다. 그 캐릭터가 어떤 성향을 가졌고 어떤 행동을 할지 나는 알고 있다.

    해당 캐릭터를 다른 조건에 투입한다.

    캐릭터가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까?

    이델라의 대답은 ‘그렇다’다.

    당연했다. 이 게임은 여주인공의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난 여주인공을 궤도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된다.

    이델라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속도가 느릴 뿐이다. 학기 초부터 행동했던 원작의 그녀와 달리, 지금의 그녀는 촉박한 시간 속에서 너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시험이 끝나면 아카데미에선 여러 무도회가 열릴 것이다. 인맥으로 서로 초대장을 주고받으며, 저들끼리 모이고 친해지는 무도회가.

    에드워드 루트에서 현재 임박한 중요 이벤트는 그 무도회였다.

    이델라를 에드워드와 같은 무도회에 어떻게 참가시키지?

    * * *

    주말이 지나고 맞이한 월요일. 첫 강의는 철학이었다.

    학생들은 시험 얘기는 일절 하지 않았다. 학생들의 마음은 온통 아카데미 무도회에 쏠려서 파트너와 구두, 장식과 음악 등의 얘기로 정신없었다.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난 에드워드와 이델라부터 찾았다. 에드워드는 보이지 않았고, 이델라는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강의가 시작하는데도 에드워드가 들어오지 않아서, 난 그의 수업 태도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원작 에드워드의 수업 태도 같은 건 나온 적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린 에드워드라면, 수업 같은 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조프리가 꼴 보기 싫어서 나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한번 삐딱하게 생각하니 또 그게 맞는 듯했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에드워드에 대해 떠들었다.

    “에드워드 전하, 강의 옮기셨다는데.”

    “역시 수준이 너무 낮았던 거지. 그분 수석이셨잖아.”

    “하지만 차석인 조프리 전하께선 계속 듣고 계신데?”

    “아닌데, 안 듣고 노시던데.”

    정말 꼴 보기 싫었던 건가?

    아니겠지. 게임 속 에드워드도 그랬다. 성적 우수자답게 행동했고 그를 따라다닌 건 조프리였다.

    게임을 따라 에드워드와 같은 수업을 들어야 할까? 그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중간고사 결과가 나오면 다들 에드워드가 얼마나 우수한지 확인하게 될 테니까.

    목검으로 맞은 곳이 아직도 아팠다. 그냥 멍일 뿐인데 도트가 붕대를 감아 놔서, 씻을 때마다 풀기도 귀찮았다. 그때마다 에드워드가 생각나는 것도 싫었다.

    정말 이상한 건, 원작대로 에드워드가 행동해도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였다.

    에드워드가 다가올 땐 무서웠다. 하지만 외면하는 것도 신경 쓰인다니 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하긴 게임 속 조프리는 에드워드에게 매여 있었다.

    에드워드와 자신을 비교하며 정체성을 찾는 애였으니, 그가 어디에 있든 신경 쓰일 것이다.

    내가 이성을 찾아야 한다.

    그때 파벨과 그 패거리가 다가왔다. 파벨은 매점에서 사 온 빵과 우유를 내 자리에 놔주고 있는 알렉스를 힐끗 보더니 침을 삼키고 책상 앞에 섰다.

    “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제가 엄청난 걸 알게 되었는데요. 주말 내내 많은 고민을 했지만, 역시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말해 봐.”

    “이델라 에클레어가 전하의 이름을 팔고 제게 돈을 요구했어요.”

    “뭐?”

    “놀라셨겠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확인해 드릴 수 있어요.”

    파벨은 놀라운 헛소리를 하더니 주먹을 꾹 쥐고 책상을 내리쳤다. 비장해 보였다. 그러나 각오는 대단치 않은지, 알렉스가 그를 쳐다본 것만으로도 손을 내렸다.

    “전하. 지금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침을 드시지 못하면 두뇌 회전이 잘 안 되고, 성장기 신체 발달에 좋지 않다고 합니다.”

    알렉스는 도트와의 재회를 가장 반긴 사람일 것이다.

    아무래도 출처가 특정되는 정보를 말하면서 우유에 빨대를 꽂아 줬다.

    난 우유를 빨아 먹으며 파벨을 쳐다봤다. 파벨 같은 인종이 무슨 일로 이델라랑 엮였는지 상상도 안 갔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났는지, 파벨은 얼굴을 붉히면서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고 강의실을 나가 버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빵을 다 먹었는데 돌아오지 않아서 화장실이라도 갔나 했다. 복도가 시끄러워지더니 웬 남학생이 앞문을 열고 소리쳤다.

    “복도에서 싸움 났다! 다들 빨리 나와, 장난 아냐!”

    결투도 아니고 싸움? 여기가 혈기왕성한 학생들이 모인 곳이긴 하구나 싶었다.

    그런데 그냥 넘길 수 없는 말이 들려왔다.

    “누구랑 누구?”

    “파벨레 상송이랑…….”

    “또 그 자식이야?”

    “……이델라 에클레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다 우유를 쏟을 뻔했다.

    누구랑 누가 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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