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40화 (140/293)
  • 140.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손이 내 멱살을 잡고 한 손은 얼굴을 만졌다. 거친 손이 생김새를 확인하듯 뺨을 만지고 코와 입을 누르다가 떨어졌다. 눈을 뜰 수 없었다.

    끝난 건가?

    난 제대로 서려고 했다.

    에드워드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가슴팍을 짚었다. 손가락이 명치와 배를 따라 선을 긋듯 쭉 내려갔다. 멍이 눌려서 헉 소리가 났다.

    간신히 비명을 억누르는데, 그가 상처를 강하게 눌렀다.

    “악!”

    “조프리.”

    에드워드가 불렀다. 확인하듯 다시 조프리, 하고 이름을 중얼거린 에드워드가 내 몸에서 손을 떼고 벽을 짚었다.

    지금 내가 누군지 확인하려고 누른 거야?

    미친…….

    “왜 왔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멍 든 곳이 눈물 나게 아픈데, 저런 말을 들으니 눈에 불이 나는 듯했다.

    왜 왔냐고?

    “나 너한테 할 말 다 못 했어. 네가 피해 다녔잖아.”

    “별로.”

    “안 피해 다녔다고?”

    “별로……. 대답이 안 되는데. 피해 다니는 거 알면서 왜 찾아왔어?”

    사과든 변명이든 할 말이 많았다. 그랬는데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네가 그랬잖아. 전처럼 돌아가고 싶다고. 그게 이런 거야?”

    더듬더듬 말하자 에드워드는 조용히 물었다.

    “‘전처럼’이 뭔데? 조프리. 우리가 전에 어땠는데?”

    그건 내가 꺼낸 말이 아니다. 그가 했던 말이다.

    에드워드는 한 발짝 떨어졌다.

    “어차피 넌 못 하잖아. 책임질 수도 없는 짓 하지 말고 나가. 들어오지 마. 관심 갖는 척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너한테 관심을 안 가져?”

    내 목숨이 너한테 달렸는데?

    에드워드가 가볍게 웃었다.

    “또 듣기 좋은 말 해 주려고? 해 봐. 들어 줄게.”

    “…….”

    “왜? 그런 거 잘하잖아. 네가 가장 특별하다거나, 걱정돼서 참을 수 없다거나.”

    뭐 이런 배배 꼬인 게…….

    기가 막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다 안다는 듯 말했다.

    “할 말 없어? 그럼 나가. 찾아오지 마.”

    막힌 말문도 트이게 하는 화법이었다. 그래 놓고 에드워드는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널 기다리기 싫어.”

    그가 중얼거렸다. 몇 년쯤 나를 기다렸다는 투였다. 아니. 그건 나였다.

    “네가 날 언제 기다렸는데?”

    “계속.”

    “계속 언제?”

    에드워드가 오길 기다렸던 쪽은 언제나 나였다. 에드워드의 마음을 얻으려고 발버둥 친 것도 나였고 그가 토라지면 매달리고 밀쳐 내면 밀려나는 것도 나였다.

    에드워드와 내 사이에는 절대적인 우열 관계가 있었다.

    네가 그걸 모르면 안 되지. 그것만은 모를 수 없었다.

    “네가 날 불행하게 만들었을 때부터.”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에드워드의 얼굴 윤곽이 들어왔다. 그는 나를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가.”

    에드워드가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문이 열렸다.

    복도 벽에 걸린 촛불이 넘실거렸다. 난 방을 빠져나갔다. 자의가 아니었다. 에드워드가 내 어깨를 붙잡아 끌어냈다.

    귀신같은 힘이었다. 뒤돌아보기도 전에, 문은 바로 닫혔다. 다신 오지 말라는 것처럼.

    머릿속의 필름이 끊기는 것 같았다.

    제멋대로다. 자기가 필요할 때 다가왔다 수틀리면 버리는 건 그였다.

    에드워드는 그럴 자격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내가 널 불행하게 만든다고?

    그는 마치 불행의 원인이 전적으로 나인 것처럼 말했다.

    아니, 에드워드의 불행은 조프리 때문인 적이 없다.

    조프리는 그를 불행하게 만드는 데 약간의 도움을 줬을 뿐이다. 비탈길을 굴러떨어지는 자전거를 옆에서 밀어 준 것 정도로.

    내가 한 짓은 거기서 조금 더 심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세계에서 나만큼 에드워드의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선명한 결심이 떠올랐다.

    에드워드를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그를 이델라랑 이어 주고, 왕으로 만들고, 그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안겨 줘서.

    그에게서 불안이라는 단어를 빼앗을 것이다.

    그때가 되어도 모든 불행이 조프리 때문이라고 말하는지 보자.

    * * *

    목표를 세운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여주인공의 일정을 확인하는 거였다.

    난 도트를 시켜 이델라가 요즘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조사했다.

    “왕자님, 책임감을 느끼시는 거 아니죠?”

    “물론이지. 내가 이델라를 책임질 일은 전혀 없지만, 위험할 것 같아서. 에클레어 남작이나 약혼자나 제대로 된 사람은 아니잖아.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떡해?”

    “그렇군요. 현명하세요! 그러면 에클레어 양을 제가 보호하면 되는 거군요?”

    도트가 무슨 수로 보호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난 “응,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이델라의 동선을 손에 넣었다.

    이델라의 행동반경은 단순했다. 도서관과 기숙사, 강의실을 오가는 생활이었다.

    일을 그만두더니, 스케줄에서 학습 비중을 높인 건가?

    그렇다고는 해도 도서관에서 무슨 시간을 이렇게 많이 보내는지 모르겠다.

    2학년 시점에 원작이 시작됐다면, 이델라는 지금 학생회에 들어가 공략 캐릭터들과 마구 엮이는 삶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이런 말 하긴 뭐했지만 이델라는 지금 책이나 읽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난 도서관으로 들어가다 밖으로 나오는 이델라와 부딪혔다. 그녀가 잔뜩 들고 있던 책을 떨어뜨렸다.

    “죄송합니다! 전하?”

    죄송할 거 없었다. 어차피 난 이델라를 만나러 왔다.

    게임이 이렇게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면, 난 예정대로 학생회에 소속돼 이델라의 공략 방향을 조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조프리의 호감도는 전혀 올리지 않는 방향으로, 이델라가 에드워드에게 갈 수 있게.

    학생회의 존재는 이 게임의 핵심이었다!

    그녀가 2학년이 아니고, 그래서 학생회 소속도 아니고, 그래서 공략 캐릭터들과 자연스럽게 만날 일이 없다는 게 이렇게 끔찍한 결과를 도출해 낼지 몰랐다.

    그리고 일이 이렇게 꼬인 이유는 나 때문이다.

    아무튼 나는 이델라를 우연히 만난 척했다. 바닥에 떨어진 책을 줍고 이델라 품에 안겨 줬다. 알렉스도 주워 줘서 이델라 품으로 책이 척척 올라갔다.

    “전하,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나 때문에 떨어뜨렸는데. 여기서 공부하는 거야? 중간고사 기간도 끝났는데 열심이네. 그러고 보니 저번 일은 어떻게 잘 해결됐어?”

    “저번에 전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 드렸죠. 잊어 주세요.”

    이델라가 볼을 붉히며 말했다. 그녀가 책을 숨기려는 듯 허둥지둥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갔다. 사람은 숨기면 쳐다보게 되어 있었다.

    책 제목은…….

    <그 기사님의 마음을 얻는 방법>, <기초 연애학개론>.

    “…….”

    이델라는 공략 목표를 세운 듯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녀를 도서관에 둘 수 없었다. 그레이라도 공략하게 되면 낭패였다.

    우리는 도서관 입구에 서 있었는데, 신분이 왕자다 보니 비켜 달라고 말하는 학생이 없었다. 알렉스의 위압감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내 뒤에도 기다리는 학생이 서 있었다. 난 학생들 때문이라는 듯이 이델라에게 말했다.

    “다른 데서 잠깐 얘기하지 않을래? 그날 보고 너무 신경 쓰였어.”

    “아…….”

    이델라가 머뭇거렸다.

    “바빠?”

    “아니요, 전하. 언제든 영광이에요!”

    우리가 자리를 옮겨야 하는 이유는, 도서관에서 금방이라도 에드워드와 그레이가 나올까 봐 불안해져서였지만.

    난 그녀를 안 쓰는 구교사로 데려갔다. 호숫가는 터가 나쁘다.

    “그날은 잘 들어갔어? 젖어서 감기 걸리지는 않았고?”

    “네, 전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같은 아카데미 학우잖아. 돕고 살아야지.”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얼마든지, 라는 뜻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이델라의 호감도는 아직 필요한 만큼 차지 않은 듯했다.

    이델라의 호감도는 조프리에게 독이 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필요하기도 했다. 내가 여주인공의 공략에 개입하기 위해선.

    이 게임에서 사실 가장 공략 난이도가 높은 건 여주인공이었다.

    여주인공이 남자 공략 캐릭터들을 공략하는 게임인데도, 게임을 하다 보면 관계가 반대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곤 했다. 여주인공은 공략 캐릭터들보다 감정 동요가 적고 설렘의 역치가 높았다.

    마음에 벽이 있다는 느낌이었다. 여주인공이 공략 캐릭터였다면, 에드워드만큼이나 난이도가 높았을 것이다.

    난 게임을 하고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여주인공이 왜 볼을 붉히는 공략 캐릭터를 앞에 두고 ‘쟤 나한테 넋이 나갔구나’ 확신하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뭐 게임 주인공이니까 그랬겠지만. 현실이었으면 누구나 눈치챘을 것이다.

    “이델라. 사실 나 책 제목을 봤어.”

    이델라의 어깨가 잉어처럼 튀어 올랐다.

    “네, 네, 네?”

    “일부러 보려던 건 아닌데, 주워 주다 보니까.”

    이델라는 당황이 도를 넘어서 침착하게 보이는 경지에 이른 듯했다. 그녀가 정색하고 말했다.

    “제가 사랑에 빠져서요.”

    “아, 그래…….”

    “첫사랑에 성공하고 싶은 나머지, 참고 문헌을 찾고 있었어요.”

    네가 그레이야?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하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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