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9화 (139/293)

139.

보고를 듣고 있던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301호에 방 주인 두 명과 나와 도트가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침대에 앉아 있던 로웰이 발표하듯 손을 들었다.

“응. 로웰.”

“에클레어 양의 안타까운 사정은 알겠는데요, 전하. 전하께서 왜 그 보고를 듣고 계신 건가요?”

그가 선량한 얼굴로 물었다.

도트가 말했다.

“전하. 저자의 마음씨가 몹시 흉흉하네요. 이런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도 도울 줄 모르다니요.”

“물론 저는 듣자마자 에클레어 집안의 부채를 탕감해 줘야겠다고 결심했지만요. 이자 0퍼센트로, 20년 만기 상환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로웰이 변명했다.

“좋은 생각이네.”

난 대충 말했다.

로웰이 빚을 탕감해 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여주인공이 연애를 안 하나? 하지만 게임은 시작됐다.

공략 캐릭터들이 학생회에 모이지도 않았는데.

보는 눈이 없다면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예감을 하고 있는 것과 그 상황에 맞닥뜨리는 건 완전히 달랐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내가 준비되어 있고, 여주인공과 에드워드 루트를 처음부터 밟아서, 둘을 이어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서 있다면.

하지만 첫 단계부터 삐끗했다.

여주인공과 에드워드의 마차 등교 이벤트는 어디로 간 걸까? 마차가 고장 나서 여주인공이 곤란해할 때, 에드워드가 왕자처럼 등장하는 그건.

이벤트는 에드워드의 피비린내 나는 등굣길로 대체됐다. 습격받은 에드워드는 내가 탄 마차로 옮겨 타기까지 했다.

뭐 이런 게 다 있어?

“전하, 책임감을 느끼시는 건 아니죠? 전하의 투자가 성공해 비스코티의 상업이 발전한 건 이 나라 백성들의 복이었어요. 에클레어 양 부친의 일은 안타깝지만, 전하의 탓이 아니에요.”

로웰이 갑자기 말했다. 도트가 놀랐다.

“설마! 절대 아니에요, 왕자님.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맞습니다. 아닙니다, 전하.”

“나도 알아. 그게 왜 내 탓이야?”

알렉스까지 야단이었다. 내가 왜 이델라 아버지 걱정을 해? 난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중간고사 전까지 어떤 이벤트가 더 있었더라?

여주인공이 하나라도 진행했는지 의문이었다. 물론 안 했겠지.

에드워드 초반 공략은 이랬다.

에드워드의 마차를 얻어 타고 아카데미 도시까지 온 여주인공은, 학생회에서 다시 에드워드와 마주친다.

여주인공은 감사한 마음도 들고 반가워서 인사하려 하지만, 에드워드는 그녀를 모른 척한다.

난 성격 더러운 캐릭터인가 보다 생각하고 여주인공에게 너도 인사하지 말라고 선택지를 골랐다.

[알은척하기 싫으신가 보다. 모르는 척하자…….]

그랬더니 에드워드 호감도가 올랐다. 성격을 종잡을 수 없었다.

다음 이벤트는 학생회 회의다. 동아리 회장들이 참석하는 자리로, 이곳에서 총동아리연합회 회장이 곤란한 주장을 한다.

이걸 여주인공이 냉정하게 받아넘기면 또 호감도 상승.

에드워드는 냉정하고 사감 없는 사람을 좋아하는 걸까? 곁에 두는 그레이 크래커도 그런 성격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해서 학생회실에서 마주친 에드워드에게 먼저 인사하지 않게 했더니, 호감도가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도 에드워드는 난이도 높은 캐릭터였다. 초보자가 도전할 상대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후 에드워드를 만날 때마다 살갑게 대하는 걸로 방침을 바꿔서, 순조롭게 호감도를 올렸다.

둘이 처음 참여한 무도회는 분위기도 괜찮았다. 고난에 처한 여주인공을 에드워드가 구해 주기도 해서, 둘이 무도회에서 춤도 췄다.

에드워드…… 지금은 왈츠 출 수 있나?

왕성에서 선생님이 붙었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레이에게라도 배웠겠지.

그 다음은 함께 중간고사 성적표를 확인하는 이벤트.

여기서 에드워드에게 ‘와, 대단해요. 역시 왕자님이시네요.’ 하고 감탄하게 할지 ‘굉장해요. 노력하셨네요. 항상 열심이신 것 같아요.’를 고를지 고민했는데, 왕자에게 열심이라고 칭찬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서 전자를 골랐다.

에드워드 호감도는 떨어졌다.

[고마워.]

그가 인사하고 가 버리자, 그레이가 여주인공을 비웃었던 게 기억났다. 끔찍하게 얄미웠다.

이후 에드워드와 데이트가 있었다. 정확히는 학생회실에서 필요한 비품을 사러 가는 일정이었지만, 에드워드가 여주인공에게 먼저 같이 나가겠냐고 묻는다.

‘예, 아니오’로 결정하면 되는 쉬운 선택지였고 당연히 나는 예를 골랐다.

그렇게 나가서 둘은 습격당한다.

에드워드는 습격을 단번에 격퇴하고 여주인공에게 ‘나를 노리는 세력이 있다.’고 알려 준다. 늘 완벽하며 불안한 점은 전혀 없을 것 같던 왕자의 약점에 여주인공은 동질감을 느끼게 되고…….

여주인공 약혼자가 아카데미에 찾아오는 건 그 다음 일이다.

약혼자를 만나는 자리에도 여주인공은 어떤 캐릭터를 데려갈지 선택할 수 있다. 그때 에드워드 호감도가 하트 몇 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주인공을 거절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약혼자를 만나기 전까지 많은 이벤트가 있었다. 지금까지 빠뜨린 이벤트는 네 개 정도인가?

이벤트 하나하나가 호감도라고 생각하자 소름이 돋았다.

우연히 마주치는 수준의 가벼운 돌발 이벤트들은 진행됐는지 아닌지 모르겠다. 역시 하나도 안 됐나? 에드워드는 공략이 되고 있어도 살갑지 않은 캐릭터라 티가 안 났다.

“예. 전하께서 책임감을 느끼실 구석은 전혀 없고 물론 저도 그렇지만, 인간 된 도리로 저는 부채 탕감을 도우러 가 볼게요.”

로웰이 다정하게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잠깐 두고 보는 게 낫겠어.”

“……전하께서 도우시려고요?”

“아니.”

“바쁘시죠? 이런 작은 일은 제가 처리할게요.”

로웰이 미소 지었다. 그의 손에서 조프리가 참석해야 할 파티 초대장들이 팔랑거렸다.

왜 저렇게 적극적일까? 곤경에 빠진 미인이라니, 바람둥이가 수작 걸기 좋은 상황이긴 했다.

“아버지께 편지를 보낼까요? 도움받을 방도가 있을지 모릅니다.”

알렉스가 로웰을 무시하며 말했다. 물론 그가 돕는 것도 안 되긴 마찬가지였다.

“둘 다 됐어. 그럴 때가 아니잖아. 우리 일에 집중해야지.”

“우리…….”

로웰이 중얼거렸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도트 빼고 전부 공략 캐릭터다. 잠재적 공략 대상은 여주인공 주변에서 치워야 했다.

여주인공의 일을 도와야 할 사람은 정해져 있었다.

에드워드.

* * *

새벽에 잠에서 깼다. 문이 달칵 열리고 그레이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늘 저렇게 도둑처럼 들어와서 새벽같이 씻고 나갔다. 그마저도 안 하는 날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최근 들어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그레이의 작은 움직임에도 눈이 떠졌다. 그레이가 인기척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괜히 우울해졌다.

그레이는 옷장을 열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 매트리스가 눌리는 소리, 이불이 끌리는 소리, 램프를 열고 후 입김을 부는 소리가 들렸다.

촛불이 꺼져서, 눈꺼풀 너머가 어두워졌다.

“그레이.”

“……아직 안 주무셨어요?”

그레이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디 다녀와?”

“도서관에요.”

“에드워드랑 같이 있었어?”

“아니요……. 늦었는데 하실 말씀 있으시면 낮에 하시면 안 될까요?”

“넌 낮에 안 들어오잖아.”

“…….”

눈이 어둠에 충분히 적응하지 못했다. 맞은편 침대는 뿌옇게 보였다.

그레이와 천년 만에 대화하는 기분이었다. 왕성에서 살던 때 더 많은 얘기를 했을 것이다. 그레이에게 속셈이 있어서였지만.

“에드워드가 화난 이유가 정확히 뭐야? 너도 몰라?”

그레이에게 답을 듣고 싶으면, 그걸 아냐고 물어보는 것보다 모르냐고 물어보는 게 더 효과적이다.

“모르겠는데요. 제가 전하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요.”

그레이는 넘어오지 않았다. 되레 물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무슨 말?”

“아니에요. 주무세요.”

저러고 말을 끊으면 잘도 잠이 오겠다.

그레이는 에드워드와 함께 있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내가 그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조프리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쉬울 것이다.

삼십 분쯤 이불 속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밤에 눈 감고 시간을 보내는 거야 이골이 나 있었다.

그레이는 잠든 듯했다. 숨소리가 고르고 조용했다.

난 몰래 복도로 나갔다.

기숙사 규율을 지키기 위해 기숙사장은 정해진 시간에 인원을 확인했다. 학생들이 아예 기숙사 밖에 있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건 괜찮았다. 문제되는 건 자기 방이 아닌 다른 방에 머무는 거였다. 놀려면 다른 학생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밖에서 놀라는 게 기숙사 방침이었다.

난 놀려고 다른 방에 방문하는 게 아니지만, 들키면 곤란해질 것이다.

알렉스는 자고 있겠지.

복도는 약간 서늘했다. 잠옷으로 입는 얇은 셔츠 위에 뭐라도 걸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벽에 걸린 촛불이 흔들려서, 내 그림자가 나를 따라오는 듯했다.

발소리를 죽여 위층으로 올라갔다.

에드워드의 방 앞에서 잠깐 고민했다. 주변이 고요했다. 문을 두드리면 그 소리가 다른 방 사람들을 모두 깨울 것 같았다.

“에드워드.”

나무 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불렀다. 안까지 들릴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게 좋을 것이다.

안에선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두드릴까? 의미 없이 “에드워드” 하고 이름을 다시 불렀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흰 손이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난 멱살이 잡힌 채 어두운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이 벽으로 밀쳐졌다. 뒤통수를 박아서 목이 찡하게 아팠다.

“……조프리?”

어둠 속에서 에드워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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