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파벨의 패거리 중 한 명이 괜찮은 정보를 떠올렸다.
“검술 시험일이 오늘일걸. 두 분 전하께서 계시지 않아?”
“알렉스 바움쿠헨이 소문대로 정말 대단할까?”
“과장이겠지. 솔직히, 에드워드 전하께서도 그 활약상이 다 사실일까.”
“왕자시잖아? 하나를 해도 열 개로 부풀려질 분이라고. 내가 왕자였으면 지금쯤 나라를 세웠다.”
“불경한 놈!”
“아, 소문 속에서 말이야!”
패거리가 낄낄거렸다. 파벨은 비웃었지만 내심 동의했다. 왕자가 하는 일에 과장이 붙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물론 그 천한 놈에 대한 소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틀림없다.
그러나 파벨은 운동장 근처에서 방향을 돌렸다.
“난 할 일이 생각나서, 너네끼리 봐라.”
“네가 불러 놓고?”
“내가 너네처럼 한가한 줄 알아?”
패거리가 야유했다. 파벨은 귀를 막고 자리를 피했다. 바움쿠헨 놈은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못 했겠지?
자리를 적절히 피한 덕분에 파벨레 상송은 그가 아는 ‘천한 놈들’ 중 하나가 호숫가로 들어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여학생은,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귀족인데도 손에 물을 묻히는, 파벨이 딱 싫어하는 부류의 귀족이었다.
파벨은 귀족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일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귀족이 할 수 있는 일은 남을 가르치거나, 문장을 쓰거나, 검을 드는 등의 명예로운 일밖에 없었다.
그런데 저 여자는 평민이나 할 법한 짓을 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도시에 도착한 첫날 그 모습을 봤다. 당연히 천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그와 같은 수업을 듣고 있었다!
파벨은 정말이지 견딜 수 없었다. 왕자가 같이 듣는 수업이 아니었다면 이미 무슨 짓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여자는 나무 그늘에 앉아 편지를 읽더니 한참 시간을 흘려보냈다. 파벨은 몰래 따라가서 그녀를 훔쳐봤다.
무언가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런 음산한 호숫가에 찾아오는 사람이 제정신일 리 없지 않은가? 그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그 여자는 호수로 들어갔다.
뭐야, 미친 건가?
파벨은 자살 소동의 최초 목격자가 됐다는 생각에 피부가 오싹했다. 그가 누구보다 먼저 소문을 퍼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물로 들어가는 여자를 반대편 숲에서 뛰어온 왕자가 붙잡았다. 뭐야, 이게 무슨 일이야? 흥미진진했다.
파벨은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바움쿠헨의 모습을 발견하고 재빨리 몸을 낮췄다. 그리고 살금살금 기어서 숲을 빠져나갔다.
물론 바움쿠헨이 무서워서는 아니었고, 그런 천한 놈 따위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파벨은 살금살금 기어서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입구 부근에서 여자가 나오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여자는 눈이 부은 채로 숲에서 나왔다.
“너 왕자 전하랑 무슨 사이냐?”
파벨은 여자 앞을 가로막고 위엄 있게 물었다. 그러면서 여자의 얼굴을 뜯어봤다.
왕자가 흥미를 보일 만한 미인은 아니다. 하긴 제까짓 게 감히 어떻게 왕자 전하를 넘봐.
그러나 여자는 운 듯했고 왕자는 우는 여자에게 손수건을 줄 것 같은 성격이긴 했다. 물에 빠진 여자를 구할 것 같은 성격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여자가 갑자기 거기서 호수에 빠질 줄은 어떻게 안 거지?
생각해 보니 검술 시험 시간이었다. 파벨 패거리는 죄다 왕자를 보러 가지 않았는가? 그런데 정작 왕자는 이곳에 빠져나와 있다…….
“누구세요?”
여자가 물었다. 파벨은 발끈했다. 생각은 뚝 끊겨서 머릿속에서 휘발돼 버렸다.
“파벨레 상송이다. 같은 강의를 듣고 있잖아!”
“그렇군요. 몰랐어요. 너무 바빠서요.”
그녀의 목소리가 꾸민 듯이 순진해졌지만 파벨은 눈치채지 못했다.
“귀족 계보는 외우도록 해! 하긴, 너 같은 게 알아서 쓸모 있을 일도 없겠지만. 묻는 말에나 대답해. 대가는 치를 테니까. 왕자 전하와 무슨 사이냐니까?”
“대가요?”
“그래. 네가 일 년 내내…… 아니, 한 달 내내 일해도 꿈도 못 꿀 돈을 쥐여 주지.”
역시 돈에 반응하는군. 천한 놈들이란.
아까운 마음이 든 파벨이 말을 바꿨다. 그것도 이 여자는 감지덕지일 것이다.
“와, 정말요? 무도회 초대장도 구해 주실 수 있나요?”
“그야 내가 못 가는 무도회는 어디도 없으니까 당연하지. 그런데 네가 무도회에 가서 뭐 하게?”
“꼭 한번 구경해 보고 싶었어요. 그리고 왕자님도 참여하시니까요.”
그녀가 볼을 붉혔다.
파벨은 확신했다. 왕자 전하를 좋아하는구나! 그래서 수작을 부린 거야!
‘위험에 처한 공주’ 작전을 수행하다니, 이 여자도 내공이 있었다.
감히 이런 족속이 왕자에게 연심을 품는다는 게 같잖았다. 파벨은 꾀어내듯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물론. 구해 줄 수 있지. 그래서 왕자 전하랑 무슨 사인데? 이곳으로 오실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건가? 아니, 네가 불러낸 거야? 혹시…….”
생각이 가지를 뻗어 나가 두 사람이 밀회했다는 데서 멈췄다.
신분 낮은 상대와의 밀회는 어디서나 흔한 일이다.
“제 입으로 어떻게 말씀드리겠어요. 그런 고귀한 분을…….”
여자는 창백한 얼굴을 손으로 눌렀다 뗐다. 뺨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정말 밀회인가?
계략에 빠져 미래를 약속하는 왕자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 왕자를 지혜롭게 구해 내는 자신의 모습도.
왕자는 파벨을 신뢰하고 ‘네 덕분에 신세를 망치지 않을 수 있었어. 고맙네, 친구.’라고 하겠지.
그리고 파벨은 왕자의 친구로, 훗날엔 왕의 친구로 비스코티 왕성에서 평생 대접받고 사는 것이다…….
“나 말고 또 누가 알고 있나?”
파벨은 들뜬 마음을 누르고 여자에게 확인했다.
“예?”
“너랑 왕자 전하의 관계 말이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진 않았겠지?”
“아무한테도 이런 말 한 적 없어요. 그런데, 대가는 언제 주실 거예요?”
여자가 뻔뻔하게 말했다.
“다음 강의 시간에 나를 찾아와. 까먹을 수 있으니까, 강의 중간 쉬는 시간이 좋겠다. 그때 초대장을 주지.”
그때 왕자 앞에서 가면을 벗겨 주지.
파벨은 히죽거리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 * *
이델라가 가자마자 머리를 짚었다.
원작이 시작됐을지도 모른다.
아카데미에 모든 공략 캐릭터가 모여 있고, 이델라의 약혼자가 그녀를 보러 오기로 했다.
이델라는 모종의 결심을 한 듯 사라졌다.
내게 말하진 않았지만, 그 결심이 게임 시작 시점 그녀의 결심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미워하게 된 건, 조프리에게 멍을 만들고 그에게 모욕을 준 건, 어떤 변덕이나 사건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조건이 충족돼서, 게임이 시작된 걸지도.
“도트. 사람을 좀 조사해 봐. 잘해 오면 날 속인 것도 용서해 줄게.”
도트는 시무룩하게 이마에 붙인 밴드를 만졌다.
“네, 왕자님. 누구를 조사할까요?”
“에클레어 남작과 에클레어 양의 약혼자.”
“에클레어요?”
도트는 귀족 명부를 달달 외우지 않았나?
“방금 본 그 아가씨가 에클레어 양이야.”
“그렇군요.”
도트는 무슨 말을 하려던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을 닫고 생글생글 웃었다.
“빨리 조사해 올게요.”
원작이 시작됐는지 확신을 얻어야겠다.
도트는 주말이 오기 전에 정보를 가져왔다.
“에클레어 남작은 사업을 하려다가 큰 빚을 졌다는 모양이에요. 그 빚을 갚기 위해 채권자에게 약속했다네요. 자신의 딸을 채권자와 결혼시키겠다고. 요즘 유행하는 신분 팔기의 일종이네요.”
흔한 일이다. 귀족 성을 사는 것도 파는 것도.
이 경우는 조금 달랐지만.
그 상인은 이델라의 초상화를 보고 첫눈에 반해 약혼을 수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델라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충격받고 질척대는 것이다.
약혼자가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중간고사 이후다.
약혼자는 이델라의 실물이 보고 싶다며 아카데미로 찾아온다.
이델라가 공략 캐릭터와 잘되고 있으면, 약혼자는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하고 1차 퇴치된다.
내가 플레이할 때 약혼자를 퇴치한 캐릭터는 에드워드였다.
에드워드가 다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약혼자는 공략 캐릭터와 이델라가 함께 있는 모습만 보고서도 충격받는다.
‘사랑했는데, 배신하다니!’
뭐 그런 소릴 하며 달려갔던 것 같다.
“약혼 상대인 상인은 엄청 들떠 있다는 듯해요. 어린 귀족 여성을 아내로 맞는다고 주변에 입을 놀려 놔서 정보를 구하기도 수월했어요. 조만간 약혼자를 보러 아카데미로 간다고요.”
“망했네…….”
“네?”
확실해졌다. 원작이 시작됐다.
그런데 왜?
원래도 여주인공 아버지는 빚 때문에 여주인공을 결혼시키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그 빚이 생기는 건 올해 말이다.
이렇게 이른 시기가 아니었다.
“그 집은 대체 어쩌다 빚을 졌대?”
“그런 귀족은 많으니까요. 평범하게 사업병에 걸린 것 같던데요?”
도트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도 사업병이 있나?
“왕자님이 사업으로 큰 부를 쌓으시고, 귀족들이 자신의 신용과 가문을 담보로 사업에 명운을 거는 일이 늘었으니까요. 다들 왕자님처럼 될 수 있다고 믿나 봐요. 기가 차서.”
도트가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원작 배경이 빨라진 것도 나 때문이라고?
뭐 이런…… 어이없는 나비 효과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