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7화 (137/293)
  • 137.

    이델라가 고민에 빠져 우울해할 때, 조프리가 접근해 오는 장소.

    그때도 해가 지는 오후였고, 바람이 서늘했고, 이델라가 엄청 약해져 있어서 분위기도 딱 좋았다. 약해져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경계를 누그러뜨리기 좋다는 의미에서.

    뭔가 지금이랑 비슷한 게, 기분이 아주 찜찜했다.

    이델라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잔디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울어?”

    “저, 전하. 죄송해요. 그렇게 챙겨 주셨는데.”

    내가 뭘 챙겼는데?

    생각나는 거라곤 옷을 보낸 일밖에 없었는데 그게 사람을 울릴 짓 같진 않았다.

    이델라는 고개를 저으며 젖은 소매로 얼굴을 닦아 내더니 “전 구제 불능이에요.” 하고 말했다.

    “아닌데?”

    “와아,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아니, 위로도 아니고.”

    이런 장소에서 이델라를 위로하고 싶지 않았다.

    “네?”

    이델라는 전하께서도 참, 농담도, 하는 얼굴로 웃더니 “다른 분들도, 젖게 해서 죄송해요.” 하고 사과했다. 눈이 빨개서 같이 하하 호호 웃을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았다.

    “아닙니다.”

    알렉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이델라는 개의치 않고 사교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시험은 다 끝나셨어요?”

    “응. 오늘 보는 건.”

    “남은 시험도 잘 보실 거예요!”

    “고마워.”

    “저는 이만 돌아갈게요! 정말 괜찮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녀가 우겼다.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든 속지 않을 것이다.

    “알았어.”

    난 속은 척했다. 도트가 나를 돌아봤다.

    이델라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예, 전하. 고향에 도착하면 편지 드릴게요.”

    난 일어나던 자세 그대로 앉았다.

    “어딜 간다고?”

    게임을 플레이할 땐 몰랐다. 여주인공에겐 고향에 내려갈 수많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정말 내려가면 곤란했다.

    놀랍게도 이델라의 결심은 확고했다!

    어쩔 수 없이 난 이델라를 끌어 앉혀서 구슬려야 했다.

    도트가 모닥불에 마시멜로를 구웠다. 그걸 이델라 손에 쥐여 주고 이유를 물었다.

    이델라는 눈물이 말라붙은 얼굴로 사연을 얘기했다.

    일하던 가게가 망했다. 새 알바를 찾느라 바빠 중간고사도 망쳤다. 그녀는 최악인데 고향에서 아버지의 편지까지 왔다. 그녀의 약혼자가 정해졌다고 한다.

    “부친이 정했다는 약혼자, 혹시 상인이야? 부친뻘 되는 나이의?”

    “어떻게 아셨어요?”

    이델라의 눈이 커졌다.

    “왕자님은 모르는 게 없으세요.”

    도트가 옆에서 말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아예 정해졌어? 결혼해야 하는 거야?”

    “신전에서 약혼 증서도 만드셨대요.”

    “결혼 당사자가 타지에 있는데?”

    “저희 아버지는 마법사이신가 봐요. 없는 딸 팔아서 사업 자금도 챙기셨는걸요.”

    “혹시, 그 약혼자가 너 보러 오고 싶대?”

    “어떻게 아셨어요?”

    이델라는 다시 놀랐다.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초상화 말고 실물이 보고 싶다고, 시험 끝나면 아카데미를 방문하기로 했대요.”

    “왕자님!”

    도트가 비명을 질렀다. 나도 그러고 싶은 심정이었다. 바닥을 내리친 주먹이 얼얼했다. 피부에 붙은 자갈이 후드득 떨어졌다.

    원작이잖아! 여주인공이 편지를 받고, 약혼자가 찾아오겠다고 하고, 이런 사건은 모두 원작 시점에 일어나는 일이었다!

    대체 왜?

    “약혼자가…… 이번 중간고사 끝나고 찾아오는 거야?”

    “네……. 그럴 것 같아요.”

    “정말 곤란하겠네.”

    난 침착한 척 말했다.

    “네. 정말이요.”

    이델라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난 잘 구워진 마시멜로 꼬치를 또 하나 그녀에게 쥐여 줬다.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야?”

    “…….”

    이델라는 마시멜로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입이 말랐다. 이델라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눈도 시렸다.

    도트는 이제 물을 끓이기 시작했는데 생수와 냄비가 어디서 나타난 건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왕자님, 드세요.”

    그가 따듯한 잔을 내밀었다. 따듯한 찻물이 들어오자 머리가 좀 맑아지는 듯했다. 지금 내가 여주인공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정말로 고향에 갈 생각은 아니지? 전장에서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도 하잖아. 학생이 시험 한번 망치는 거야 그럴 수 있는 일이지. 학비가 문제라면 또 도움받을 데가 있을걸. 시간을 두고 고민해 보는 게 어때?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

    여기서 ‘내가 도와주겠다’고 말해선 안 된다. 이델라의 문제는 해결되겠지만 조프리의 문제가 심각해지니까.

    위로를 해서도 안 된다. 이델라와 조프리의 관계는 조프리의 위로를 이델라가 받아들이며 성립됐다.

    이 커플의 호감도 강화 이벤트 같은 걸 진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선을 타며 이델라를 설득하자, 그녀의 얼굴에 깨달음의 빛이 떠올랐다. 눈이 반짝했다.

    설득됐나?

    “아. 전하……. 저…….”

    “응, 그래.”

    “아르바이트 갈 시간이에요.”

    어?

    “죄송해요,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이델라가 꼬치를 내려놓고 달려갔다.

    일하는 가게 망했다며?

    * * *

    ‘다른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을까?’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델라 에클레어는 정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입안에 마시멜로가 가득하지 않았다면 소리를 냈을 것이다.

    입이 막혀 있었고 그녀의 눈앞엔 조프리 왕자가 있었다.

    첫 만남 때의 인상 때문인지 조프리 왕자는 그녀를 선량한 고학생쯤으로 생각하는 듯했는데, 그녀는 그 믿음을 깨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왕자가 알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아버지가 정한 약혼자가 아카데미에 왔을 때, 그녀가 그럴듯한 사람을 잡아 결혼 상대로 소개한다면.

    아카데미에서 결혼 상대를 만드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를 졸업과 동시에 결혼시킬 생각이었다. 그 전에 그녀가 결혼해 버린다면.

    정말 괜찮은 생각이었다. 왕자에게 말할 순 없었지만.

    그녀가 ‘방법이 떠올랐어요’라고 대답했다면, 왕자는 물었겠지.

    ‘그게 뭔데?’

    그리고 도움을 주려 했을 것이다.

    그녀는 ‘다른 남자를 유혹해서 결혼할 거예요. 다른 사람의 순정을 사악하게 이용하는 거죠! 정말 괜찮은 방법이죠, 전하.’ 같은 말은 할 수 없었다.

    이건 그녀의 문제다. 그녀는 자신의 문제에 왕자를 끌어들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전하께는 이미 큰 도움을 받았다.

    이성을 만나려면 무도회 같은 곳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델라에겐 초대해 줄 인맥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

    이델라는 젖은 치마를 손으로 쥐어짜며 호수를 둘러싼 숲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화들짝 놀랐다.

    “야.”

    웬 불량한 남학생이 튀어나왔다. 얼굴을 보니 낯이 익었다.

    같은 강의를 들었을 것이다. 매일 강의실 뒤에서 패거리와 쑥덕거리던 시끄러운 귀족이었다.

    “너 왕자 전하랑 무슨 사이냐?”

    이름이…….

    파벨레 상송.

    이델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 * *

    파벨레 상송은 속이 꼬였다. 오전 시험을 마치고 하인이 가지고 온 편지에 달갑지 않은 소식이 실려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요청하더구나. 너도 한번 볼 겸 가겠다.’

    아버지 모리스 상송은 유명한 문장가로 대륙에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겠다고 한 날짜는 중간고사 직후였다. 도착하자마자 시험 결과를 확인할 아버지를 떠올리니 속이 쓰리고 소화가 안 되고 짜증이 치솟았다.

    파벨은 로웰에게 상의하고 싶었으나 그의 기숙사 방 문 앞에서 몸을 돌렸다. 성질 같아선 문을 걷어차 열었을 것이다.

    그러나 301호의 다른 세입자는 알렉스 바움쿠헨이었다. 그 천한 혈통의 불학무식한 기사 놈.

    은혜도 모르는 놈이다. 귀족들의 은총이 아래로 내려가 평민 놈들이 먹고사는 걸 모른단 말인가?

    운 좋게 바움쿠헨의 양자가 됐으면 주제를 알고 감사할 것이지, 고개 빳빳이 들고 왕자 뒤를 쫓아다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천한 놈이 자신을 위협했을 땐, 두려워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 꼼짝할 수 없었던 것이다!

    천한 놈들은 잃을 게 없어서 개처럼 덤벼드니까.

    이 아카데미엔 천한 놈들이 너무 많다.

    아버지는 왜 또 여기에 온단 말인가?

    파벨 때문에 아카데미에 온다는 듯 적었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그에게 관심을 가진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파벨이 외아들인 이상 관심이 아주 없을 순 없었지만, 그 관심이란 것이 ‘저 한심한 놈’이라는 시선이어서야 곱게 받아들여질 리 없었다.

    파벨은 로웰의 방문을 두드리는 대신 자기 패거리를 긁어모았다. 여러 명 이끌고 왁자지껄 아카데미 부지를 누비니 불안이 가시고 기분도 좋아졌다.

    놀 시간에 시험공부를 하면 불안할 일이 없겠지만, 파벨은 그런 생각을 할 만큼 훌륭한 학생은 아니었다.

    그는 어디 가서 놀면 즐거울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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