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6화 (136/293)
  • 136.

    다리에 힘이 돌아오자 난 제 발로 바닥을 디뎠다. 심장은 귀에서 뛰는 것 같았고 도무지 침착해지질 않았다.

    아카데미는 어딜 가나 학생들이 있었다. 시선을 피해 계속 걸었다. 주변이 조용해지고 시선이 사라졌다.

    산책로는 호숫가로 통했다. 수풀로 들어가자 물 냄새가 났다. 에드워드가 노려보던 모습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원작 사건이 왜 벌써 일어났지?

    원작의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얼마나 미워했었지?

    원작이다…….

    원작 설정대로 사건이 일어났고,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미워하고 있다.

    뭔가 바뀌었다. 내가 있는 곳이, 내가 속한 곳의 설정이.

    아니, 바뀐 건가? 애초에 에드워드가 조프리를 미워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을까?

    게임 속 에드워드와 조프리가 계속 생각나면서 속이 울렁거렸다.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이용하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못 할 만큼 화난 건가. 왜?

    망할. 알 게 뭐야. 왕비님이 다시 자객이라도 보냈나 보지!

    심장이 계속 뛰어서 목이 말랐다.

    눈을 세게 문질렀다. 시야가 검게 물들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나는 뭘 해야 하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시야 끄트머리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저게 뭐야?

    나무 뒤에서 수상쩍은 그림자가 숨었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 그림자는 아까부터 우리를 따라온 듯했다.

    알렉스도 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렉. 저거 사람이야?”

    “끌고 오겠습니다.”

    알렉스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그가 나무로 다가가자, 알렉스의 존재를 모르던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하인?

    알렉스가 하인 복장을 한 남자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앗! 안 돼!”

    하인이 고꾸라졌다. 그러면서 비명을 질렀는데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하인을 뒤집어 본 뒤에야 알렉스도 정체를 눈치챘다.

    “도트 님?”

    “앗! 사람 잘못 보셨어요! 왕자님!”

    도트가 얼굴을 가리며 외쳤다.

    온몸으로 정체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넌 또 왜 여기 있어?

    도트는 무릎 꿇고 앉아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정체를 들키자마자 “죄송해요, 왕자님. 왕자님을 속이려던 건 아니었어요!” 하고 불쌍하게 말했다.

    “하인 복장은 장난으로 입었어?”

    서프라이즈야?

    어이가 없어서 묻자 도트는 냉큼 이마를 바닥에 댔다.

    “죄송해요, 조금은 속였어요! 사실 왕성에 돌아갔더니 왕비님께서 왕자님을 너무 걱정하고 계신 거예요. 저도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왕비님이 왕자님을 조금만 챙겨 줄 수 없겠냐고 부탁하셔서…….”

    묻지도 않았는데 그는 구구절절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왕비님이 준비한 자리에 하인으로 들어와서 생활하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왜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이중 스파이 계속하기로 했어?”

    “아니에요, 왕자님! 제가 그런 짓을 했다면, 당장 목을 치셔도 좋아요! 결코 그런 짓은 하지 않았어요!”

    도트는 변명하더니 이내 코가 빨개졌다.

    “왕자님께서 먼 타지에서 고생하고 계시는데 어떻게 도울 방도도 없고……. 저는 그저 미력하게나마, 왕자님의 생활이 잘 돌아가도록 손을 보태고 싶어서…….”

    그의 눈이 글썽글썽했다. 아카데미가 ‘먼 타지’라는 건 엄청난 과장이었지만.

    “그래. 알았어. 울지 마. 그럴 수도 있지.”

    “왕자님…….”

    도트가 감동해서 고개를 들자, 그의 이마에서 흙이 후드득 떨어졌다.

    손수건이라도 줘야 할 것 같지만 내게는 없었다. 도트는 알아서 챙겨 온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코를 풀었다.

    내내 가지고 있던 의문 하나가 풀렸다. 어쩐지 아카데미에서 파는 걸 막 보내더라. 도트는 코를 훌쩍이며 계속 눈치를 봤다.

    방금 전까지 원작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피가 다시 도는 것 같다.

    “문 앞에 약 두고 간 거 너야?”

    “네.”

    “지금도 갖고 있어?”

    “네…….”

    도트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탓하려는 게 아니라.

    “발라 줄래? 너도 좀 바르고.”

    도트의 눈이 커졌다.

    “네, 왕자님!”

    상처를 치료하려면 상처 부위를 씻어야 한다고 도트가 주장해서, 우리는 호수로 향했다.

    이 게임은 몹시 게임 같은 설정이 몇 개 있었는데 안개에 휩싸인 아카데미 건물 같은 게 그랬다.

    밖에서 보면 안개에 휩싸였는데, 안에서 지내는 사람은 그 영향을 안 받는다는 것도 그랬다.

    안개가 피어오르는 효과는 이 호수에서 발생하는 거였다.

    온천도 아닌데 알 수 없는 연기가 사시사철 피어오른다.

    음침하고 신비로운 광경이었다. 호수에 시체가 잠겨 있다는 소문 때문에 학생들이 접근하지 않는 지역이기도 했다.

    조프리와 이델라가 상담하는 이벤트는 이 호수에서 벌어졌다.

    호수의 안개는 사람 모습을 숨기기에도 좋아서, 이델라는 조프리가 먼저 와 있는 것도 모르고 그곳에서 우울감에 빠진다.

    혼자서 “죽어 버려.”, “난 바보야.” 같은 소리를 하면서.

    물가에서 그런 일을 하는 건 정신 건강에 좋지 않다. 옥상에서 하는 것만큼이나 안 좋았다.

    유연호는 그런 행동을 정말 싫어했다.

    “세상에.”

    도트는 조프리가 칼에라도 찔린 듯이 반응했다. 누가 보면 피라도 철철 흘리는 줄 알 것이다.

    셔츠를 벌리고 조프리의 가슴팍을 봤다. 붉게 자국이 남은 부위가 둘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아팠다.

    지금은 붉기만 하지만 곧 검푸르게 변할 것이다.

    안이 상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가슴 아래가 찌르르 아팠다.

    물이 닿으면 더 아프겠지.

    도트가 너무 속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고 있어서 그냥 내가 씻으려고 했다. 그때 알렉스가 알려 왔다.

    “누가 옵니다.”

    수풀에서 누군가 툭 튀어나오더니 호수로 걸어왔다.

    우리에게서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주의를 기울이면 호수에 선객이 있다는 걸 발견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람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듯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머리 위에서 커다란 리본이 흔들렸다.

    이델라였다.

    그걸 깨달은 순간 불안해졌다. 에드워드와 원작 사태를 찍고 호수에서 이델라를 마주치다니.

    여긴 무슨 일이지?

    이델라는 호수까지 망설임 없이 걸어가서 물이 닿지 않는 곳에 쪼그려 앉았다. 품에 무언가를 안고 있었다.

    그녀는 끌어안고 온 뭔가를 찢기 시작했다. 색을 입힌 종이였다. 잘 보니 편지지 같았다.

    마지막으로 찢은 건…… 편지 봉투?

    그녀는 편지를 다 찢더니 호수 위를 손으로 쿡 눌렀다.

    원하는 만큼 빨리 안 가라앉는 모양이다.

    편지가 가라앉는 동안 그녀는 의식이라도 치르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윽고 호수는 평온해졌다.

    그녀는 읏차, 하고 쪼그려 앉은 무릎을 펴더니 리본을 풀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어깨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신발을 벗었다. 리본 옆에 얌전히 놓았다.

    그러더니 호수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달려 나갔다.

    입수 소리가 굉장했다. 첨벙거리며 팔다리를 휘적여 다가가자, 이델라가 뒤를 돌아봤다.

    “왕자 전하?”

    눈을 가늘게 뜬 그녀가 나를 발견했다.

    봄이 지나가는데도 물은 놀랄 만큼 찼다. 물은 종아리까지 차오르고 곧이어 무릎까지 적셨다.

    “들어오지 마세요, 젖어요!”

    그러는 그녀는 머리까지 흠뻑 젖은 채였다.

    “넌 왜 온몸을 적시고 있는데?”

    “저는 그냥……. 와아, 물놀이가 하고 싶어서요!”

    그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얼어 죽으려고?”

    “물이 보기보다 차네요.”

    이델라가 배시시 웃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덜덜 떨고 있었다.

    “나와서 얘기해.”

    일단 나가는 게 좋겠다. 고집부리고 안 나오면 어쩌나 싶었지만, 이델라는 순순히 따라 나왔다.

    “전하!”

    “저희를 시키세요! 그렇게 막 들어가시면 어떡해요?”

    알렉스와 도트까지 호수로 뛰어들어서, 우리는 홀딱 젖어서 물 밖으로 나갔다.

    도트가 ‘전하께서 감기에 걸리실 거다, 내일 몸살을 앓으시면 어쩌냐’ 난리를 피워서 알렉스는 나뭇가지를 주워 왔다.

    도트가 품속에서 뭔가 꺼내더니 마른 나뭇가지에 불을 붙였다. 이내 작은 모닥불이 완성됐다.

    아카데미 부지 내에서 이런 짓을 해도 되나?

    작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저녁때가 다 돼서 바람이 서늘했다. 이델라는 교복 겉옷까지 젖어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의 몸이 떨렸다. 얼굴은 핏기가 가시다 못해 흙빛이었다.

    내 겉옷은 멀쩡했지만 이델라에게 줄 수 없었다. 이델라 호감도가 오르면 곤란하니까.

    “저 때문에 젖으셔서 어떡해요. 죄송해요.”

    말하고 나서 이델라는 엄청난 기침을 했다.

    “물속엔 왜 들어갔어? 감기 걸리려고?”

    “죄송해요, 전하. 사실 물놀이를 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알아.”

    난 그녀를 불 앞에 앉혔다.

    “죄송해요.”

    이델라가 고개를 숙이고 다시 사과했다.

    “또 뭐가 죄송한데?”

    난 아까부터 후회하고 있었다. 설마 게임 플레이어 캐릭터가 이상한 생각을 할 리도 없는데, 왜 붙잡았지?

    물론 이델라는 입학식에서부터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집에 가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어쨌든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있었다.

    그냥 뒀어도 알아서 잘 합격해서 학교 다니고 있었을 텐데. 그때도 괜히 개입했다는 생각은 했다.

    아무튼 여기서 호감도를 더 올릴 필요는 없었다. 이델라가 뭘 하든 조프리가 알 바 아니다.

    장소가 좋지 않았다. 여긴 이델라와 조프리가 게임상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대화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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