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시험이 끝나고 에드워드는 바로 나가지 않았다. 붙잡을까? 학생들의 시선을 신경 쓴다면 잠깐 붙잡힐지도 모른다.
신경 안 쓰고 조프리를 무시하면서, 또 나를 이길 단 한 번의 기회를 잡았냐느니 어쩌니 하며 도발할지도 모르지만.
학생들 앞에서 그런 모욕을 당하면, 내 기분과 관계없이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이기고 싶어 하는 왕자가 될지도 모른다. 게임의 ‘조프리’처럼.
그 생각 때문에 멈춰 서게 됐다.
그러나 로웰이 말이 또 걸렸다.
‘오해를 꼭 풀어야 하나요? 칼 들고 찾아올 정도가 아니라면 그냥 두시는 게…….’
에드워드는 칼 들고 오는 애잖아?
그래. 무슨 소리야. 오해는 풀어야지. 결심하고 일어서는데 앞에서 “죄송해요, 전하.”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델라였다.
뒷문으로 나가던 에드워드가 나를 힐끗 돌아봤다.
아니, 그가 보려던 건 이델라였을지도 모른다.
“으응.”
눈치를 보느라 난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새 에드워드는 나가 버렸다.
복도로 난 창으로 그가 그레이와 합류하는 게 보였다. 둘은 심각한 대화를 나누며 사라졌다.
“저 때문에 실망하셨죠? 정말로, 더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게요. 이번 시험 밤을 새워서라도 열심히 공부할 테니까요.”
이델라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아니, 밤은 새우면 안 되지.”
뭘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거지?
그사이 에드워드와 그레이는 발에 날개라도 달렸는지 복도를 떠나고 없었다.
진짜 쟬 어떡하지.
그때까지만 해도 난 사태를 아주 심각하게 여기진 않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에드워드는 아카데미 와서부터 이상했고, 너무 다정했고, 또 약게 굴었으니까.
나를 노려보다가 아닌 척하던 것처럼,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수상쩍게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정말로 문제를 느낀 건 검술 시험 때였다.
아카데미에서 시험을 치면 강의별로 다른 일러스트를 볼 수 있었다.
필기시험은 펜을 물고 시험지를 내려다보는 여주인공으로 통일됐고, 실기 시험은 강의별로 조금씩 달랐다.
이 일러스트는 기초 강의든 고급 강의든 달라지지 않았다. 게임 제작자가 그리기 귀찮았던 걸까?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때문에 기초 검술 시험까지 대련이 되고 말았다.
왜 자꾸 이상한 데서 게임 티를 내는 걸까?
강의 내내 달리기밖에 한 기억이 없는데, 시험에선 목검을 들고 보호구를 차야 했다.
대련 상대는 무작위로 정해졌다.
형평성에 문제가 있는 시험이다.
그러나 검술 강사 크렘 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우리는 제비에 각자 이름을 써서 뽑기 통에 넣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아서, 내 이름은 에드워드와 나란히 나왔다.
에드워드와 마주하고 싶긴 했지만 이런 방식은 아니었는데.
“제가 흑기사를 하겠습니다.”
알렉스가 손을 들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 주군을 생각하는 마음은 장하지만, 시험이니까요.”
크렘 경이 말했다.
“겁나?”
에드워드가 무표정하게 나를 봤다.
어조가 산뜻했지만 듣는 순간 사람을 열 받게 하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몇 날 며칠을 피해 다니더니.
“아니?”
알렉스가 보호구의 끈을 다시 묶었다. 허술하게 걸쳐 있던 보호구가 몸에 걸렸다. 좁은 방에 갇힌 것처럼 갑갑했다.
목검을 쥐고 에드워드를 마주 본 순간 후회했다.
에드워드가 새파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이마가 드러났다.
겁나는데.
“손은 괜찮아?”
아무렇지 않은 척 묻자, 에드워드는 고개를 까딱였다.
“아니.”
“시험은 칠 수 있어?”
“뭐…….”
칠 수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너는 이기겠지.”
화내라는 건가?
에드워드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 했다. 순서를 기다리던 학생들이 우리 주위에 빙 둘러앉아 침묵하고 있었다.
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 둘이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면 흥미진진하긴 하겠다.
“먼저 5점을 낸 쪽의 승리입니다. 승부에서 이기면 가산점이 붙습니다. 아시겠지만 서로를 적당히 봐주며 점수를 챙겨 가는 행위가 의심되면 0점 처리되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크렘 경은 우리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세요.”
에드워드는 목검을 휙 휘둘러 털더니 바른 자세를 취했다.
그럴싸한 동작이었다. 실은 꽤 멋있어서, 학생들이 웅성거렸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방금 전까지 도발하더니.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대답하자, 에드워드는 아무렇지 않게 내 명치를 찔렀다.
폐가 쪼그라드는 듯했다.
검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헉, 하고 숨을 삼키자, 에드워드는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봤다. 안 쓰러지네, 라는 듯이.
그가 내 배를 다시 찔렀다.
내장이 찔린 것 같다.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리가 풀렸다. 정신을 차려 보니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에드워드 전하, 1점.”
크렘 경은 나만큼이나 기가 질린 듯했다.
진심으로 찔렀어.
에드워드가 다가와서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역광을 받은 에드워드는 평소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는 장신이지만, 조프리와 비교될 정도로 거대하진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근육이 붙은 체형이다.
하지만 검을 든 모습은 공포스러웠다.
내가 무릎을 꿇고 있고 그가 서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내가 움츠러들자, 에드워드는 멈칫하더니 다시 다가왔다. 그의 무표정은 가면 같았다.
뭘 하려는 거지?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에드워드는 손을 내밀었다. 예의 바른 기사처럼.
난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준비.”
크렘 경이 말했다.
기억났다. 에드워드와 조프리의 대련 장면.
게임 속 이벤트 중 하나였다.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때려눕히고, 조프리가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때려눕히고, 또 때려눕혔다.
그 행동에 사감은 없는 듯했다. 그가 너무 쉽게, 과제를 수행하듯 조프리를 이겨서 구경하던 학생들도 조용해졌다.
조프리가 모욕감에 떠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 주며 그 이벤트는 끝났다.
에드워드와 조프리의 캐릭터 설정을 선명하게 보여 주기 위한 장면이었던 것 같다.
난 그 장면 안에 있었다.
아까부터 가쁘게 뛰던 심장이 거세게 펌프질했다.
원작이잖아.
“준비하세요, 전하.”
크렘 경이 다시 말했다. 그는 교육자의 의무를 다하려 했다.
모든 사람이 이미 결과를 알겠지만, 그렇다고 승부를 포기시킬 순 없을 것이다.
포기할 수 있는 건 당사자뿐이다.
그리고 원작의 조프리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비참해졌다.
난 손을 들었다.
“기권할래. 네가 이겼어, 에드워드.”
에드워드의 표정이 멍해졌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전하, 점수가…….”
크렘 경이 말했다.
“알아. 괜찮아.”
점수가 형편없게 나온다는 거지. 상관없었다.
어차피 버텨도 얻어맞는 부위만 늘잖아.
“그럼, 에드워드 전하의 승리로 대련을 마치겠습니다. 다음 학생들 이리로……. 거기 뭘 구경하는 겁니까? 다들 나가요! 시험과 관계없는 사람은 나가세요!”
크렘 경이 외쳤다.
운동장 밖에서 몰래 구경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수가 꽤 많았다.
시험 기간이기도 해서, 강의 안 듣는 학생들이 시간을 주체 못 하고 볼거리를 찾아온 듯했다.
‘뭐야, 끝났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크렘 경이 목검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알렉스가 달려왔다. 그는 나를 일으켜 세우려다가 그냥 내 앞에 무릎 꿇었다.
깨끗한 무복이 더럽혀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가 물었다.
“전하, 일어설 수 있으십니까? 양호실로 가겠습니다.”
“넌 시험 봐야지.”
“괜찮습니다.”
“안 다쳤어.”
크게 다치지 않았다. 원래 데굴데굴 굴러야 할 걸 막았으니까.
에드워드가 5점 낼 때까지 맞았으면 말도 제대로 못 했겠지.
그런데 알렉스는 내 허리끈을 풀더니 윗옷을 휙 들어서 배를 살펴봤다. 뭐 하는 거야? 말려 올라간 옷 때문에 난 내 몸이 보이지 않았다.
“양호실에 가겠습니다.”
알렉스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불평하며 물러가려던 학생들이 이쪽을 보고 입을 떡 벌리고 있었다.
몸이 번쩍 들려서 알렉스가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를 들어 올렸다!
환자처럼 안고 옮기는 걸 보니 내 말은 귓등으로 들은 모양이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다.
“멀쩡하다니까?”
“예, 전하. 모시겠습니다.”
알렉스는 감정을 억누르는 듯했다.
어린아이처럼 매달려서 알렉스의 어깨 너머를 봤다.
에드워드가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친절한 척 굴 때 느꼈던 위화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사실 에드워드는 항상 나를 저렇게 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알렉스에게 내려 달라고 말해야 했다고 생각했을 땐, 이미 운동장을 한참 벗어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