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4화 (134/293)
  • 134.

    어리석은 군주는 신하의 말을 듣지 않아 나라를 망친다.

    그레이 크래커는 자신이 그 예를 보고 있다고 믿었다.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 왕은 암군이었고 그레이는 자신보다 멍청한 왕은 모시기 싫다고 생각했다.

    그레이는 얼마 전에야 다른 예를 떠올렸다.

    스스로 현명하다고 믿는 군주는 독선에 빠져 신하의 말을 듣지 않는다.

    역사서에는 두 경우가 모두 실려 있었는데 왜 전자만 보였을까?

    에드워드는 계획을 공유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추측해야 했다.

    조프리 왕자는 인질로서 가치가 있다. 그를 수중에 넣으면 왕비는 도망칠 수 없을 것이다. 왕비가 왕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짜라고 그레이는 믿었다.

    조프리 왕자가 필요하다. 그는 필요한 순간 수중에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경계심이 많다. 그런 데다 강한 호위가 붙어 있다.

    “병사들은 왜 필요하신 겁니까?”

    아카데미 도시의 새 경비대장이 물었다. 그는 수도 귀족 출신이었다. 왕과 사냥을 다니는 귀족의 아들로, 기사로서의 능력은 몰라도 왕이 믿는 인물이긴 했다.

    “수도 고아원들을 조사하세요. 5년…… 6년 전의 일입니다. 그때 인신매매로 처벌받은 자들이 있죠. 그들에게 잡혀갔다 살아남은 고아와 범죄 잔당들을 추적해서 잡아 오세요.”

    “그거야 어렵지 않은 일이지만…….”

    경비대장은 말을 끝맺지 않았다. 그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다. 그레이나 왕자의 명령을 듣기 위해 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레이는 돈주머니를 넘겼다.

    “경비로 사용하고 남은 돈은 가져요.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빠른 시일 내에 결과를 받아 보면 좋겠군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일은 알렉스 바움쿠헨을 떼어 내기 위해 필요할 것이다.

    그레이는 추측할 수 있었다.

    ‘왕족이 하는 일을 이해하려 들지 마라.’

    아버지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이성이 주관하는 일은 이해가 필요 없다. 합리적이고 인과가 분명하다.

    그레이가 알 수 없는 건 하나였다.

    조프리 왕자를 인질로 잡는 데 그의 감정이 필요한가?

    알렉스 바움쿠헨만 떼어 놓으면 조프리를 행동 불능으로 만드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조프리 개인의 무력은 변변치 않았다.

    그런데도 에드워드는 조프리에게 감정적으로 접근했다. 그의 경계를 누그러뜨리고 동정을 샀다.

    그레이는 거기까지도 이해했다.

    그 다음은 무엇인가?

    ‘이젠 됐어.’

    조프리를 이용하는 계획에 대해 묻자, 에드워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목소리가 싸늘했다. 다시 묻지 말라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지만, 그레이는 의아했다. 뭐가 됐다는 거지?

    에드워드는 배신당한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조프리가 왕이 되고자 하는 건 명백하지 않았는가.

    그는 왕비의 아들이다. 그가 왕비를 거스르는 모습을 그레이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모자였다. 조프리는 왕비를 에스코트해 왕성을 산책하거나 사교 모임에 나서곤 했다.

    조프리 왕자는 순조롭게 넘어오고 있었다. 에드워드가 다가가기만 해도 창백하게 굳던 얼굴이 느슨하게 풀려서, 저번 검술 수업에서 봤을 때는 에드워드를 어깨에 재워 놓고 양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오래가지 않을 경계심이라곤 생각했다.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걸 자극하면 허물어지리라 예상했고 그대로 됐다.

    두 왕자가 한때 얼마나 다정했는지 아는 그레이로서는 그 모습이 놀랍지 않았다. 조금 마음이 무거워졌을 뿐.

    오히려 그레이가 놀란 건 에드워드의 모습이었다.

    에드워드는 멀쩡한 손으로 조프리의 소매를 잡고 있었다. 그 상태로 잠들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방이 훤히 트인 외부에서, 근처에 낯선 사람들을 두고.

    그레이 크래커는 자신이 공사 구분을 잘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망할 첫사랑을 자각한 이후, 그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불신을 키워 가고 있었다.

    일에 감정을 개입하지 않기 위해, 그는 조프리를 안 볼 각오로 방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레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사람의 이성이 아니다. 감정이 개입된, 합리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일그러진 원인과 결과다.

    그레이는 에드워드가 시험을 치르는 강의실로 향했다. 창 너머로 에드워드의 모습을 확인하고 복도에 서서 기다렸다.

    에드워드가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조프리가 찾으러 왔을 때,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계획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에드워드는 왜 그렇게 조프리를 무시했나.

    이상하기로는 조프리의 대응도 만만치 않았다.

    갑자기 ‘난 왕위에 관심 없어’라니. 터무니없는 소리를…….

    그런데 조프리가 그런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던가?

    그레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종이 울렸다. 그는 학생들이 복도를 채울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그의 앞으로 여학생 두 명이 대화를 나누며 지나갔다.

    “그거 썼어?”

    “너 썼어?”

    “당연하지. 아, 동성 결혼 동맹 재미있어! 사실 그 두 분, 사이가 무척 좋으셨다며? 사가도 적었잖아, 연인이자 형제 같았다고.”

    “하지만 후계자를 보셨잖아? 난 그런 건 인정할 수 없어. 로맨틱하지 않아!”

    “맞아. 사랑한다면 역시, 왕위를 포기하고 사랑의 도피를 하셨어야…….”

    웃음소리가 들리고, 그 뒤의 대화는 소음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레이는 굳어 버렸다.

    * * *

    파이 공작은 왕을 알현했다. 금발과 벽안, 왕가의 특징을 물려받은 왕은 오랜 시간 ‘젊은 왕’으로 불렸다.

    실제로 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젊은 왕이었던 이유는 비단 나이가 어려서가 아니었다.

    재상을 포함한 대신들은 ‘폐하께서는 아직 젊으셔서’라는 이유로 왕의 의사 결정을 조종했다. 왕은 중심을 잡지 못했고 어디까지나 젊은 폐하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파이 공작은 왕의 손위 형제였으나 적장자가 아니었다. 왕이 태어났을 때, 성안이 축제 분위기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왕의 탄생은 축복이었다. 파이 공작은 조프리 왕자가 태어났을 때 왕이 얼마나 충격받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연인의 아이에게 모든 것을 물려줄 거라고 파이 공작에게 귀띔하던 왕은 어리고 생기로 반짝였다.

    왕은 파이 공작이 가까이 다가간 뒤에야 눈치챈 듯했다. 더 이상 그는 젊은 왕이 아니었다. 지친 표정과 피부 때문에 왕은 제 나이로도 보이지 않았다.

    “술을 좀 줄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첫마디가 잔소리입니까?”

    “충의로 드리는 말씀입니다. 궁의도 걱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신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새삼 걱정이 되어 오셨을 리는 없고, 무슨 일입니까?”

    “폐하께 여쭐 일이 있어 귀한 시간을 청했습니다. 하나 폐하의 건강을 염려하는 것도 진심입니다.”

    “그러시겠지요.”

    왕은 팔을 휘적거렸다. 용건만 남기고 사라지라는 뜻이다.

    파이 공작은 취한 왕에게 제대로 된 답을 들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했다. 왕에게 묻는 행위는 절차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폐하, 조프리 전하의 출생은 진실로 부정한 것입니까?”

    조프리 왕자가 태어났을 때, 왕은 그럴 리 없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방을 서성거렸다.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러 온 파이 공작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정부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는 생각이 진심이었다니. 공작은 놀랐으나 그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왕은 감정적이고 언행이 경솔했다. 설마 조프리 왕자의 탄생이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해서 그렇게 말했다고는.

    “비 전하께 숨겨 둔 정부가 있었습니까? 시기가 맞지 않다거나, 판단의 근거가 있습니까? 증언을 확보하셨습니까?”

    “무슨 증언입니까! 그럴 리 없다고요. 내가 그럴 리 없다 하지 않습니까!”

    왕은 역정을 냈다. 역시 억지였나? 상관없다. 파이 공작은 왕에게 그의 계획을 전하려 했다.

    “약을 먹고 있었으니까…….”

    왕이 쥐어짜듯 말했다.

    “예?”

    왕비에게 약을 먹였다고? 파이 공작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불임약을 먹고 있었다고요, 내가.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이 같은 건 갖고 싶지 않았으니까! 왕비가 불임이면 대신들은 다른 여자를 들였겠지, 다른 후궁, 또 다른 후궁들을. 그대들이 잘 하는 짓 아닙니까? 짐은 왕이 아니라 종마 아니냔 말이야!”

    왕은 잔을 바닥에 내던지더니 발을 굴렀다. 파이 공작은 놀라서 굳어 버렸다.

    말도 안 되는 짓을……. 어느 왕이 그러한 일을 저지른단 말인가? 옥체는 왕의 것이 아니다.

    폐하께서는 미령하시어 대업을 감당할 상태가 되지 못한다. 에드워드 왕자의 말이 떠올랐다.

    왕이 재판정에서 저런 말을 하게 둘 수는 없었다. 나라의 망신이다.

    그러나 왕비와 조프리 왕자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파이 공작은 왕성을 나와 은밀히 사람을 불렀다.

    그의 명령을 들은 심부름꾼은 곧장 셔벗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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