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3화 (133/293)

133.

도서관 건물은 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분위기였다. 나무 그늘 아래 시원한 정자와 벤치가 있어서 바깥바람을 즐기고 싶은 학생들은 밖으로 나와 앉아 있었다.

그레이와 에드워드도 야외파인 듯했다.

둘은 책자를 두고 무언가를 논의하는 모양새였다. 그레이가 공부로 바쁘단 말은 들었지만 혼자 다닌다는 말을 못 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사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숨을 내쉬고, 아카데미에서 내내 살갑게 굴던 에드워드를 떠올렸다.

마주친 이상 피할 거리도 없다.

좋아. 가자.

“에드워드.”

이름을 부르자, 그늘 아래서도 선명한 금발이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드는 유리알 같은 푸른 눈으로 날 힐끗 보더니 시선을 책자로 돌렸다.

뭐…….

난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레이는 켕기는 얼굴이었다. 그는 서류 같은 종이를 파일에 끼더니 역시나 내 시선을 피했다.

무시당했다.

“에드워드. 수업은 왜 빠졌어?”

난 부드럽게 물었다. 에드워드가 나를 꾈 때처럼.

“네가 내 수업 시간에 관심 있었어? 몰랐네.”

관심 없었지.

할 말 없었지만, 그렇다고 입 다물어 줄 순 없었다.

“같은 수업이잖아. 우린 형제고. 당연하지.”

“형제?”

에드워드가 비웃었다. 난 못 들은 척했다.

“다음 주 시험이래.”

“열심히 해야겠네.”

“알고 있었어?”

“아니.”

“오늘 교수님이 말씀하셔서, 네가 모를까 봐.”

“그래?”

이게 대화인가?

눈이라도 보고 말해라.

“같이 공부할래?”

에드워드가 노려봤다. 그렇게 봐 달라는 건 아니었다.

“날 챙길 시간에 공부하는 게 낫지 않겠어? 내가 다친 지금이 기회잖아.”

에드워드는 부드럽게 말했다.

“기회라니.”

“왜? 날 한 번이라도 이겨 볼 기회 아냐? 왕비님의 기대를 충족해야지, 조프리. 착한 아들이잖아.”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순진하게 말했다.

야…….

학생들이 시선이 느껴졌다. 우리 분위기가 이상하긴 했다.

난 재빨리 에드워드에게 달라붙었다.

“왕위 관심 없다고 말했잖아.”

“조프리, 속삭이지 말라니까?”

에드워드는 더 싫어했다.

그럼 큰 소리로 외칠까?

“사람들 앞입니다, 전하. 언행을…….”

그레이가 충고했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일어났다. 자긴 할 말 다 했으니 시원하게 가 버릴 수 있겠지.

난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도 안 날 지경이다.

에드워드는 자기만 화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조프리도 화나게 하고 싶은 모양이다.

저걸 어떻게 하지?

* * *

애드워드는 부상을 핑계로 실기 수업은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철학 수업에 들어와 평소처럼 수업을 들었다.

교수가 강의를 끝내고 나가자 학생들이 삼삼오오 뒷문으로 향하며 내게 인사했다.

“전하, 시험을 기대하십시오.”

“저희를 얕보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깜짝 놀라실 겁니다.”

그러든지. 마음대로 해라.

난 에드워드를 잡으려고 했다. 그가 일어나기 전에 붙잡아야 했다. 다른 데선 얘기도 듣지 않으려 할 테니까.

그런데 에드워드가 빠져나가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열심이네. 조프리를 이기는 법 알려 줄까?”

“예? 전하께서?”

에드워드는 학생들과 거리를 두던 왕자였다.

학생들이 서로를 쳐다봤다. 왕자의 관심을 거절할 귀족은 없었다.

“어떻게 말입니까?”

“혹시 전하께서 공부를 가르쳐 주신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전하께 감히 뭘 부탁드리는 거야?”

“내가 가르치면 도움이 돼?”

에드워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금색 머리칼이 사르륵 흘러내려서, 도움이 되지 않아도 그렇다고 말해 주고 싶은 얼굴이 됐다.

귀족들은 볼을 붉히며 바라지도 않던 행운을 덥석 잡았다.

“물론입니다, 전하!”

“가문의 영광입니다!”

에드워드가 학생들을 끌고 나갔다. 그러면서 그는 나를 돌아봤다. 따라오지 말라는 건지 과시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입이 절로 벌어졌다.

로웰은 명단을 작성해서 내게 내밀었다. 그의 인맥으로 참석할 수 있는 파티 목록이었다.

301호는 일종의 아지트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나는 알렉스의 침대에 누워 목록을 검토하다가 아무 데나 내려놨다.

“로웰. 저번 무도회, 그렇게 정치적으로 보였어?”

“무슨 말씀이세요?”

“에드워드가 오해한 것 같아.”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했다. 알렉스는 너무 내 편이다.

“뭘요? 그건 그냥 무도회였잖아요.”

“그런데 에드워드가 내 말을 들으려고 안 해. 찾아가도 무시하고, 대화를 해도 빈정거리고, 오늘은…….”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귀족들한테 날 이기는 법을 알려 주겠다는 거야.”

“뭘로 이기는데요?”

“중간고사 성적.”

“……에드워드 전하께서요?”

“응.”

로웰은 이상한 표정이었다.

“귀족들이 전하를 이기면 뭐가 좋은데요?”

“내가 질투심과 자괴감을 느끼겠지?”

“아, 전하께서요?”

“보통 그렇잖아?”

로웰은 눈을 굴리더니 “그렇군요!” 하고 맞장구쳤다.

아무튼 조프리는 그럴 것이다.

“저는 상인의 아들이라 정치는 아는 바가 없지만, 원래 오해라는 게 사소한 일에서 생기니까요. 골치 아프죠.”

“에드워드에게 배신자로 낙인찍힌 것 같은데.”

“마음 아프시겠네요.”

로웰은 내 표정을 보고 태도를 바꿔 위로했다. 안됐다는 표정으로 내 손을 잡고 도닥이자 알렉스가 로웰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어차피 왕위를 양보하고 내려가실 거잖아요. 알아서 풀릴 오해 아닌가요?”

“그 전에 잘못되면?”

“네? 에드워드 전하께서요?”

아니. 내가.

“넌 어떻게 해명했어?”

“무슨 해명이요?”

“두세 다리 걸치다 걸렸을 때.”

“전하께선 제가 어떤 쓰레기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로웰은 절대 그렇지 않다, 다 오해다, 믿지 마시라 해명하더니 내 질문에 대한 답을 꺼냈다.

“가끔 그런 오해가 생겼을 때, 정말로 오해지만요. 전 진심 어린 사과를 했어요. 그렇게 오해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요.”

“오해인데?”

“화나고 상처받은 거잖아요. 상대한테 맞춰 주는 거죠. 누가 잘했는지를 겨루는 경주도 아니잖아요.”

로웰이 연애를 잘하는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찾아와서 칼이라도 휘두를 정도가 아니면 그냥 놔두는 게 낫지 않나요?”

“칼을 휘둘렀어?”

“사소한 오해가 있어서요!”

로웰은 아차 하더니 변명했다.

어떤 오해가 있으면 칼을 맞는데?

하기야 조프리도 그렇게 죽었다. 이 세계는 원래 연애를 살벌하게 하는 모양이다. 연애가 지상 목적인 게임이니까.

왕의 연애도 피 튀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연애 사건에 나만 휘말리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 * *

시험까지의 한 주는 엉망으로 흘렀다.

그동안 에드워드는 못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의 차이를 조프리에게 보여 주듯 순조롭게 학생들의 동경을 얻었다.

그가 보란 듯이 추종자를 끌고 다녀서 말을 붙일 새도 없었다.

내게 말 걸 때의 에드워드가 이런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시험 기간은 일주일이었다. 아카데미 시험은 강의별로 시행됐다.

게임 속에선 한 학기에 도달해야 하는 능력치 수치가 정해져 있어서, 어떤 강의를 듣든 그 수치 이상이기만 하면 시험 점수는 높게 나왔다.

농사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해서 체력을 올려놓으면 검술과 승마 등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는 식이었다.

능력치와 관계없이 난 시험을 망칠 거지만.

시험을 엉망으로 치르고, 무도회 등에서 조프리의 악명을 퍼뜨린 다음, 에드워드에게 말하자.

이건 미루는 게 아니다.

로웰의 말대로 사과가 필요하다면 할 생각이었다.

시험일 강의실에 들어가자마자 에드워드를 발견했다.

에드워드는 창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금발이 반짝이고 피부는 매끄러웠다. 남은 걱정에 빠뜨려 놓고 잘 먹고 잘 사는 모양이다. 그러나 모든 장점을 잡아먹을 정도로 표정이 안 좋았다.

나와 알렉스는 문 가까이 앉았다.

앉고 나서도 에드워드를 훔쳐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휙 돌렸다.

와…….

“전하,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저희의 성과를 보여 드릴 수 있겠군요!”

학생들이 한 마디씩 하면서 지나갔다.

그러든지…….

내가 책상에 머리를 박으려고 하자 알렉스가 이마를 잡았다.

“전하. 몸이 상하십니다.”

목이 상하는 것보단 낫겠지…….

에드워드가 얼마나 성가신 성격이었는지 떠올랐다. 상황을 이상하게 오해하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교수가 들어와서 교탁을 탁탁 쳤다.

“빠진 학생은 없겠지요? 시험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펜 내려놓고, 공부하던 거 집어넣으십시오. 출석 부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뒷문이 벌컥 열리고 이델라가 들어왔다. 그녀는 곧장 빈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내 앞자리였다.

이델라가 하루 이틀 지각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은 특별히 넋을 빼놓고 있는 느낌이었다.

보통 앉으면 바로 수업 준비에 들어갔는데, 오늘은 멍하니 앉아 있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듯했다. ‘어?’ 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알렉스 같은 표정이었다. 시험인 걸 모른다.

이델라가 뒤를 돌아봤다.

“저기, 와아, 전하? 죄송합니다. 혹시 오늘……?”

“시험이야.”

“와아.”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알렉스와 달리 그녀는 ‘학생이 시험 일정도 모르다니’ 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세를 바로 돌렸다. 그래도 두 뺨을 손으로 누르고 있는 건 알 수 있었다.

손 밑으로 옷깃에 묻은 소스가 보였다. 이델라가 종종 지각하는 건 아르바이트 때문이다.

일과 공부를 동시에 한다는 게 말로 하면 쉬웠다. 사람의 몸과 정신은 그렇게 편리한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덜 괴롭혀도 됐다.

하지만 조프리는 이런 말을 해 줄 수 없다. 이델라랑은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에드워드가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난 책을 보던 척했다.

에드워드가 보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설마 게임 속 에드워드가 기억하는 이델라의 모습이란 게 ’항상 지각한다’ 같은 건 아니겠지.

넌 뭘 보고 사랑에 빠지는 거야?

아무거나 보고 잘도 오해에 빠지는 걸 보면, 사랑에 빠지는 이유도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거겠지만.

알렉스가 막을 것 같아서 책상에 이마는 박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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