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2화 (132/293)
  • 132.

    사용인을 대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평생 일해 본 적 없는 귀족이 하루아침에 청소며 잡일을 해낼 리가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카데미 사용인에게 푼돈을 쥐여 주고 심부름을 시킨다. 그 탓에 기숙사를 드나드는 하인이 많았다.

    의외성은 없어도 의심 사지 않을 방법이다.

    에드워드도 덕을 보고 있었다.

    닫아 둔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워드는 문을 열었다.

    편지를 가져온 그레이가 시체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또요? 지겹지도 않나. 하인을 불러올게요.”

    그레이가 나가 있는 사이 에드워드는 편지를 확인했다.

    두 통의 보고서는 각기 다른 사실을 담고 있었다.

    하나는 누군가 이 도시를 찾았다는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감시 대상이 아카데미 밖으로 나갔다는 내용이었다.

    조프리를 태운 마차는 도시 외곽으로 향해서 플랑베 백작 저택으로 들어갔다.

    에드워드는 그 저택에서 무엇이 열리는지 알고 있었다.

    플랑베 백작 부인, 왕비의 시녀가 주최한 무도회였다. 참석자 명단을 보지 않아도 그곳에 어떤 면면이 참석했을지 짐작할 만했다.

    눈을 뜨고 텅 빈 방을 봤을 때부터 느낀 공허한 기분이 에드워드를 지배했다.

    조프리 비스코티는 마음이 약하고 동정심이 많다. 에드워드는 그에게 접근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했다.

    ‘걱정했잖아.’

    ‘……정말?’

    ‘밥 먹을래?’

    ‘싫어.’

    예상외로 경계가 강했지만, 결국 에드워드에게 마음을 열었다고.

    죄책감으로 흐려지는 표정이 에드워드는 익숙했다.

    ‘널 지킬게.’

    조프리 비스코티는 거짓말에 능하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수 있다는 건 타고난 거짓말쟁이라는 뜻이다.

    에드워드는 자신이 조프리를 쥐고 흔들고 있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가 약한 말을 하면 조프리는 어쩔 줄 모르고 끌려왔다.

    어릴 적 에드워드를 바라보던 조프리의 기분이 이랬을지 모른다.

    상대를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우월감. 상대에게 내가 특별하다는 절대적인 감각.

    ‘가지 마. 계속 여기 있어.’

    ‘알았어. 너무 세게 쥐지 마. ……에드워드, 붕대 갈아 줄까?’

    ‘아니.’

    ‘다시 감으면 이것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네가 해 줄 거야?’

    ‘너 자고 일어나면.’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 그런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게 전부 거짓이었다고.

    붕대가 거추장스럽다. 에드워드는 조프리가 묶은 붕대를 힘으로 뜯어 바닥에 버렸다. 흰 붕대는 뱀의 허물처럼 스르르 떨어졌다.

    “전하?”

    그레이의 부름을 뒤로하고 그는 조프리의 방으로 향했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조프리는 변명했고…… 에드워드는 그 방을 나왔다.

    파이 공작은 외진 여관에 묵고 있었다. 술집을 겸한 여관은 창을 작게 내고 두꺼운 문으로 앞을 막았다.

    그레이가 나무로 된 문을 열자, 어두침침한 술집의 내관이 드러났다. 파이 공작은 벽을 등지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

    실내는 충분히 어두웠다. 머리를 가린 것만으로도 에드워드는 주목받지 않았다. 시끄러운 술꾼들을 지나쳐 공작의 맞은편에 앉자, 공작은 마시던 잔을 내려놓고 그를 맞았다.

    “오셨군요.”

    공작의 곁에 수행원은 없었다. 건너편 자리에 앉은 남자가 공작의 호위일 것이다. 테이블의 대화를 엿들을 수 없는 거리에 앉아 있었다.

    “스승님.”

    “전하, 격조했습니다.”

    “바쁜 분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랜만에 모교를 방문하니 감회가 새롭군요. 전하께서 잘 지내고 계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학장에게 듣기로, 이 나라의 두 왕자는 우열을 가릴 수 없으리만치 총명하여, 다음 세대는 축복받았다고요.”

    파이 공작이 안경 너머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는 겸양하는 대신 반론했다.

    “나란히 선 나무를 봐도 비교하는 게 사람인데, 아무렴 형제간에 비교가 없을 수 있을까요. 스승님께서는 저희를 오래 보아 오셨죠. 제 형제에게 조언하신 분이 스승님이십니까?”

    “어떤 조언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제가 조프리 전하의 학업을 도운 건 오래전의 일인데요.”

    “스승님께서는 보다 못한 학생을 측은히 여기시는 분이니까요. 혹시나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조프리 전하께 도움이 되고자 했을 리는 더욱더 없겠군요.”

    불리한 왕자는 에드워드라는 뜻이다. 에드워드는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예. 도움이 필요한 쪽은 저입니다. 스승님께서 불초한 제자를 도와주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위해. 스승님이 좋아하시는 공정한 방식으로, 이 나라에 정의가 설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말입니까?”

    “스승님께서는 왕족을 기소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까?”

    “…….”

    “재판을 원합니다. 피고는 이 나라의 왕비입니다.”

    왕족을 마지막으로 재판정에 세운 건 몇 대 전의 일이었다. 그레이는 법조문과 과거의 판례를 뒤져 배심원을 이룰 귀족의 명단을 작성했다.

    에드워드가 그들 모두를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몇 사람이면 충분했다.

    ‘전하의 목적이 생존이라면, 총명함은 불필요한 자질일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이 모든 가치에 우선하겠습니까?’

    파이 공작은 어린 에드워드에게 물은 적 있었다.

    그가 무엇을 기대하는지 알면서도 에드워드는 대답했다.

    ‘예. 저는 살고 싶어요.’

    그랬기 때문에 공작은 에드워드가 생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에드워드를 무시함으로써 왕비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어린 시절 왕성에 에드워드의 편이 있었다면 그건 공작이었다. 에드워드는 그의 도움이 다시 필요했다.

    에드워드는 왕비가 왕관을 쓴 채 죽게 만들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밑바닥으로 끌려 내려와, 어머니와 같은 자리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조프리의 존재는 그녀를 그때까지 이 나라에 묶어 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선택지를 없애자.’

    에드워드는 더는 기다리는 입장에 서고 싶지 않았다.

    27. 게임 시작

    입술을 여러 차례 씻고 잠들었다. 찬물이 술기운만 아니라 잠도 가져가서, 밤새 두근거리는 몸을 붙잡고 뒤척여야 했다.

    다음 날 오전 수업엔 지각했다.

    종이 울리기 전 가까스로 강의실로 들이닥쳐서, 뒷자리에서 땀을 식히며 수업을 들었다.

    봄 공기가 확연해서 조는 학생이 많았다. 아예 엎드려서 자는 건 소수였고 대개 책을 펼쳐 놓고 고개만 끄덕거리고 있었다.

    그런 학생들 사이에서 에드워드의 금발은 발견되지 않았다. 전날 밤의 일을 생각하니 다시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에드워드는 아예 수업을 듣지 않을 셈인 듯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아서, 수업 내내 시선이 복도로 난 창으로 향했다.

    중간 쉬는 시간에도 에드워드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걸 다행이라고 여겨선 안 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오해다. 에드워드 머릿속에서 조프리는 어떤 개자식인지 모르겠다.

    에드워드에겐 ‘왕비님이 습격하면 방패가 되어 줄게’ 같은 믿음직한 소릴 늘어놓고서, 왕비님께 달려가 ‘에드워드를 도륙 내 주세요’ 하는 애처럼 보이는 건가?

    넌 조프리가 어떤 파티에 참석하는지는 알면서, 거기서 무슨 짓을 하고 왔는지는 몰라?

    왜 해야 할 말은 항상 뒤늦게 떠오를까?

    조사원을 붙여 놨으면 좀 제대로 염탐했으면 좋겠다.

    난 마음을 정해야 했다.

    에드워드가 알아서 오해를 풀어 줄 가능성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냥 내 희망일 뿐이다.

    내가 풀어야 한다. 오해가 걷잡을 수 없어지기 전에 수습해야…….

    교수가 학생들을 깨웠다.

    “중간고사가 다음 주인데 여유로운 모습 아주 보기 좋군요. 왕자 전하께 그만한 각오를 보이고도 여러분의 성적이 낮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교수의 질책을 듣고 학생들이 눈을 뜨면 좋았겠지만, 잠에 빠진 사람이 바깥 소리를 듣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덕분에 놀란 사람은 나뿐인 듯했다.

    다음 주가 시험이었어?

    “알렉, 알고 있었어?”

    “아닙니다, 전하.”

    “혹시 공부는 좀 했어?”

    “아니요.”

    알렉스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당연하면 안 되지.

    “알렉. 혹시 아카데미에 학사 경고와 제적이라는 제도가 있다는 거 알아?”

    “예?”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게임을 할 때 알렉스를 공략했다면 공부 이벤트가 떴을지도 모른다. 알렉스는 내 뒤에 앉아서 똑같이 수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수업에 나왔던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교수가 기초적인 철학사를 다뤘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모델로 한 듯한 철학자들이 시험 범위에 있었다.

    자라면서 한 번씩 들어 봤음 직한 이름들이었다. 그러나 알렉스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바움쿠헨 백작은 정말로 검만 가르친 모양이다.

    게임에서는 보통 수업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능력치가 오르지만, 스트레스와 집중력이 떨어져 있으면 한 달 내내 앉혀 놔도 효과가 없었다.

    모르긴 몰라도 알렉스는 수업에 전혀 집중하지 않는 듯했다.

    강의 시간에 뭘 하는 거지?

    알렉스가 제적당하게 둘 순 없어서,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에드워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니까. 지금 찾아가 봤자 괜히 화만 돋울지도 모르고…….

    그냥 변명이었다.

    왜 사람은 숨 쉬듯이 변명거리를 찾을까?

    그러다 건물 입구에서 그레이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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