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1화 (131/293)
  • 131.

    그런 다음에야 이유가 떠올랐다.

    그랬지. 부왕은 개선 행렬을 기대하고 있었다.

    에드워드를 위한 의전이 준비되어 있다.

    개선군을 위한, 이라고 말해야겠지만 에드워드는 왕이 순전히 자신을 위해 의전과 행사를 준비했음을 알고 있었다.

    ‘내 아들은 너밖에 없다. 그 여자의 아들이 내 씨일 리 없지 않느냐.’

    온몸을 떨며 분노하던 나약한 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에드워드를 높이고 왕비의 기분을 망칠 기회를 얼마나 고대하고 있는지도.

    에드워드를 위한 연회가 열릴 것이다.

    그곳에 조프리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에드워드는 빗속에 있었다. 오래전 선물 받은 말은 성질이 더러워서 얌전히 묶여 있는 법이 없었다.

    선물한 사람도 그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조프리는 말을 무서워했다.

    그러나 성품과 관계없이 건강하고 날랜 말이었다.

    말은 순식간에 목적지로 에드워드를 데려갔다. 보슬비라고 생각했던 비가 로브를 푹 적셨다.

    온몸이 젖어 오한이 들었다. 몸이 떨렸지만 에드워드는 눈치채지 못했다.

    그대로 나무를 타고 올라가 난간에 발을 걸쳤다. 테라스로 툭 떨어져 창 안의 인기척을 살폈다.

    있을까?

    그의 가치 없는 목숨을 도박에 걸었을 때부터 에드워드에겐 단 두 개의 선택지가 남았다. 그가 죽거나 왕비가 죽을 것이다.

    그리고 조프리 비스코티도.

    어머니의 장례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추모객은 없었고 왕과 에드워드와 신관만이 입관식에 자리했다.

    그 자리에서 에드워드는 왕과 처음으로 긴 대화를 나눴다. 그걸 대화라고 해야 할까?

    왕은 자신이 에드워드와 로제 부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여러 차례 말했다. 에드워드는 감흥 없이 들었다.

    어머니가 들었다면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어머니가 들었다면.

    ‘이제 우리밖에 남지 않았어. 아들아, 내 모든 힘을 다해 너를 보호하마. 이 성과 대지와 병사들 모두가 너의 것이다. 그 여자의 자식에게 빼앗기려고 참아 온 게 아니야…….’

    에드워드는 왕이 자신을 끌어안고 눈물로 강을 만들어도 기쁘지 않았다.

    조프리가 왕의 자식이 아니라면, 에드워드 자신과는 정말 아무런 관계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끔찍하다.

    그는 태어나서 가지고 있던 걸 자라며 빼앗기기만 했다. 그걸 빼앗아 간 사람이 조프리라는 게 견딜 만해지기 시작했는데.

    그의 가족, 그의 형제, 그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생각했던 건 사실 그의 무엇도 아니었다.

    ‘예. 아바마마. 약속할게요. 살아남을게요.’

    ‘오오……. 내 아들아.’

    ‘살아남아 아바마마의 모든 걸 물려받을게요.’

    에드워드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맹세했다.

    왕의 잠꼬대 같은 소원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 많은 변명 속에 영양가 있는 내용은 없었다.

    마음은 힘이 없다.

    아무리 강하게 원해도, 힘없는 자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왕의 소원 가운데 하나는 마음에 들었다. 에드워드는 그걸 소원으로 끝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왕비를 개처럼 끌어내 모욕 속에서 죽일 것이다.

    그럼 조프리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겠지. 지금의 에드워드처럼.

    어린아이의 생각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걸 깨달을 만큼 자랐다.

    조프리는 가진 게 너무 많다.

    그래서일까?

    에드워드는 의문이었다. 막사 안에서, 수많은 불면의 밤을 흘려보내며 날이 새도록 생각했다.

    조프리는 뭘 원하는 걸까.

    에드워드는 살아남았다.

    조프리 비스코티, 왕비의 아들, 물러 터진 가짜 왕자는 알렉스 바움쿠헨을 보내 에드워드를 보호하고 있었다.

    제 양부만큼이나 강하고 불손한 그 기사는 에드워드를 목숨 바쳐 지켰다.

    왜?

    알렉스 바움쿠헨이 출전을 결정한 건 조프리와 독대하고서였다.

    왜 그랬어?

    난 아파, 조프리.

    괴로워. 잠을 잘 수 없어.

    네게 원한 대로 살아 돌아왔어.

    대답을 듣기 전엔 잠들 수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창문을 두드렸다. 유리 너머로 어둠에 싸인 침대가 보였다. 조프리의 방은 어릴 적과 다르지 않았다. 몇 명이 엎드려 누워서 뒹굴 수 있을 법한 크기의 침대는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다시 창문을 두드렸다. 찬 물기가 얼굴을 타고 흘렀다. 입 밖으로 나오는 숨이 뜨거웠다.

    창문에 김을 서리게 할 것 같다.

    조프리가 이곳에 없다면?

    초조해서 손이 떨렸다.

    “조프리, 들어갈게.”

    창은 잠겨 있지 않았다. 허술한 성격이다. 전부터 그랬지.

    조프리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흰 셔츠와 얼굴이 빛을 받았다. 그는 멍하니 깨어 있었다.

    방은 따듯해서 한결 숨 쉬기 편했다.

    에드워드는 후드를 젖혔다. 조프리가 알아보지 못할까 봐. 그가 비명을 지르고 도망가기를 바라진 않았다.

    물기가 후드득 떨어졌다.

    전장의 에드워드를 보호하면서, 왕성의 조프리는 스스로의 평판을 높이고 도움이 될 결혼 상대를 물색하고 있었다.

    넌 뭘 하고 싶은 거야?

    내내 생각했다. 한밤중에 막사에서 모포를 덮은 채, 그가 살아남았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구역질 나는 기분 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날 걱정했다고 말해.

    사실 네 의도가 아니었다고, 너는 언제고 왕비를 버릴 수 있다고, 어쩔 수 없이 나를 버린 거라고 말해.

    어린 시절엔 조프리에게 그렇게 묻는 상상을 했다. 그가 에드워드를 피하지 않았다면, 에드워드는 예전에 매달려 물었을 것이다.

    그 비참한 욕망은 이미 버렸을 텐데.

    에드워드는 한 걸음 다가갔다. 조프리는 희고 깨끗했다. 햇볕에 말린 이불 같았다.

    그런 얼굴로 에드워드가 다가갈 때마다 물러서고 있었다. 새까만 눈이 에드워드에게 고정돼서, 그를 두려워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와 결이 다른 의문이 떠올랐다.

    “왜 뒤로 가? 내가 무서워?”

    “아니.”

    조프리가 대답했다. 반년 만에 처음으로 사람 목소리를 들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가 떨렸다.

    열린 창으로 비바람이 들어왔다. 이렇게 따듯한 공간에 있던 사람에겐 매서울 것이다.

    “추운 거야?”

    조프리는 뒤로 물러나다 침대 위로 쓰러졌다. 이불 속에 파묻혀서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그의 눈은 에드워드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프리의 옅은 숨이 에드워드에게 끼쳐 왔다.

    식은 피부에 열이 올랐다.

    어?

    에드워드는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게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밤중이었고 이 방엔 둘뿐이었다. 조프리를 얼마나 욕망했는지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욕망은 힘이 없었다.

    조프리는 왕비의 소유물이었다. 에드워드는 그 사실을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었다.

    조프리를 떠올리면 그의 팔에 손을 올린 왕비가 함께 떠올랐다.

    에드워드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간 왕성의 모자.

    어쩌면 에드워드가 가질 수도 있었을, 조프리를 빼앗아 간 왕비가.

    넌 뭘 하고 싶은 거야?

    내게 왜 그랬어?

    에드워드에게서 떨어진 물방울이 조프리의 입술에 닿았다. 조프리는 파르르 떨었다. 추울 것이다. 에드워드는 닦아 주고 싶었다.

    그가 확인하러 온 건.

    이곳에 온 이유는…….

    조프리가 품 안에 있었다. 에드워드의 두 팔 안에 갇혀 어디로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달아날 수 없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살아 돌아왔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조프리를 얻는다면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이번에는.

    “그 생각 아직도 변하지 않았어? 내가 뭘 원해도 용서할 수 있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변하지 않았어.”

    조프리는 눈을 크게 뜬 채 대답했다.

    흰자가 더없이 깨끗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을 할 때 조프리는 떨지 않았다. 진심인 것처럼.

    그 얼굴로 다시 물기가 떨어졌다. 에드워드는 닦아 냈다. 조프리의 피부가 너무 부드러워서 자칫하면 상처를 낼 것 같았다.

    조프리는 소스라쳐서 에드워드를 밀어냈다.

    따듯한 손이 단호하게 가슴을 밀쳐서, 그곳에 화인이 찍힌 양 욱신거렸다.

    소름이 끼쳤다.

    그가 조금 전까지 뭘 하고 있었지?

    그는 빌고 있었다.

    더 시간이 주어졌다면 조프리에게 매달렸을 것이다.

    조프리는 입술을 벌린 채, 침대에 반쯤 누워서 에드워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입술이 따듯하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손에 감촉이 남아 있다.

    에드워드는 그 방을 도망쳐 나왔다.

    안전하고 따듯한 조프리의 방에서 나와, 비를 맞으며 막사로 향했다. 언짢아하는 말을 달래 내달리면서도 그는 계속 생각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왕비는 늘 비참하게 죽었다.

    조프리는?

    그의 보호자이며 소유주인 왕비를 잃은 조프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뱃속이 뜨거웠다.

    ‘내가 뭘 원해도 용서할 수 있어?’

    어리석은 소리.

    그러나 조프리는 약속했다.

    * * *

    에드워드는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가 버려졌다는 것이었다.

    아니, 그를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곁엔 누구도 없었으니까.

    수업이 끝나고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방으로 데려왔다. 에드워드를 눕히고 이불을 끌어 올려 주고 그가 잠들 때까지 옆에 있었다.

    에드워드는 자신의 손을 들여다봤다. 이 손으로 조프리를 잡고 있었다. 작은 움직임에도 잠에서 깨곤 하는 그가, 손안의 온기가 빠져나가는 걸 느끼지 못했다.

    예민한 건 어린 시절 몸에 밴 성질이었다. 왕성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는 동물처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그 시절 에드워드를 무디게 만든 것도 조프리였으니 이제 와서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에드워드는 문과 가까운 벽에 붙었다. 어떤 감각이 그를 깨웠다.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하인복을 입은 남자가 청소 도구를 들고 들어왔다. 에드워드는 남자를 붙잡아 목을 꺾었다.

    “……!”

    이 시간에 청소하러 들어오는 하인은 없다.

    왕비가 보낸 습격자는 의외성이 없어서 파악하기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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