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30화 (130/293)
  • 130.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길엔 비가 내렸다. 난 마차 창문을 열고 밖으로 손을 뻗었다. 차가운 빗줄기가 기분 좋았다.

    술기운이 적당히 몸을 데워서, 콧노래라도 나올 것 같았다. 이 세계 노래가 아니라 할 수 없었지만.

    어깨가 답답해졌다. 알렉스가 자기 겉옷을 내 어깨에 걸쳤다.

    “감기 걸리실까 걱정됩니다.”

    “이 정도로?”

    그는 내가 얼마나 기쁜지 모를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게 우울했다.

    로웰은 말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왜?”

    “전하, 저희에게도 이 소문의 목적을 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전하께 정확히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싶어서요. 제가 실수할까 봐 두려워요.”

    로웰의 말에 잘 동의하지 않는 알렉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우면 안 되지. 이렇게 좋은 날에.

    그런데 왜 오늘이 좋은 날인지 이 두 사람이 몰라야 하지?

    둘은 명실상부 조프리의 조력자다. 무도회장에서 내게 협력하겠다고 맹세까지 했다.

    난 두 사람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둘이 고개를 바짝 모았다. 난 밖으로 들리지 않게 속삭였다.

    “내 평판을 떨어뜨려서 에드워드를 왕으로 만들 거야.”

    “예?”

    로웰이 당황해서 고개를 뺐다. 난 그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다시 얼굴을 가까이 댔다.

    “왜요?”

    그가 소곤소곤 물었다.

    “왕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왜요?”

    너 내가 마차가 되기 싫다고 말해도 이유를 물을 거야?

    “되기 싫어.”

    “하지만 전하께서 왕이 되면 다들 좋아할 텐데요.”

    “다들 누구?”

    “저나 바움쿠헨이나, 다들요.”

    “하지만 난 되기 싫어……. 그래도 돼?”

    알렉스의 손이 이쯤 있지 않을까 손을 휘저었는데, 정말 잡혀서 놀랐다. 알렉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입니다, 전하.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난 네 기대를 충족하지 못할 텐데.”

    “아니요, 전하. 아닙니다.”

    “왕비님의 기대도 충족하지 못할 거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조프리는 왕이 될 수 없으니까.”

    눈꺼풀이 무거웠다. 여러 번 깜빡이자 어둠 속의 얼굴이 보였다.

    로웰의 얼굴은 가까이서 봐도 모난 데가 없어서, 역시 게임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왕이 될 수 없으신데요?”

    로웰이 물었다.

    그야 게임 스토리가 그러니까. 왜 자꾸 묻는 거야.

    하지만 넌 게임 캐릭터지.

    그 말은 해선 안 된다.

    “그 전에 에드워드한테 죽을 테니까.”

    “예?”

    알렉스의 목소리였다. 큰 손이 나를 흔들었다. 멀미가 날 것 같다.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자가 전하를 위협했습니까?”

    “괜찮아. 이제 안전해. 에드워드도 나도. 내가 포기할 거니까. 내가 다 줄 거야. 에드워드가 원하는 걸…….”

    알렉스의 품이 따듯해서 눈이 감겼다. 마차의 움직임을 따라 머리가 흔들렸다.

    알렉스와 로웰의 목소리가 깜빡깜빡 들렸다.

    생각보다 사이가 좋잖아. 대화가 끊이질 않고 있다.

    그러다 잠들었던 것 같다.

    다시 눈을 떴을 땐 기숙사실 앞이었다. 알렉스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응. 들어가.”

    그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 문을 열었다. 붕 떠 있는 것 같다. 여기까지 내 발로 걸어왔을까? 아무렴 어때…….

    그레이의 침대엔 아무도 없었다. 이래서야 독방이랑 다를 게 뭐지.

    문을 닫고 옷을 벗었다. 조심할 사람이 없으니 아무렇게나 방을 쓰게 됐다.

    셔츠를 벗고 옷장을 여는데, 문이 잘 열리지 않았다. 오래된 학교 비품이 다 그렇듯 이 방에도 깨끗하지만 망가지기 직전인 물건이 몇 개 있었다.

    그래도 못 쓸 정도는 아니다. 힘을 주어 당기는데 누군가 뒤에서 내 손 위에 손을 겹쳤다.

    옷장 문이 삐거덕 열렸다.

    등에서 체온이 느껴졌다. 이 방은 조금 서늘했다. 등 뒤의 사람 때문에 그 사실을 깨달았다.

    “무도회는 즐거웠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술이 확 깼다.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내가 먼저 물었어. 대답해야지. 무도회는 즐거웠어? 낯익은 사람이 많았을 텐데.”

    에드워드의 목소리는 느리고 낯설었다.

    “무도회 간 건 어떻게 알아?”

    “안 즐거웠어? 대답이 없네.”

    “무슨 대답……?”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약속을 전부 어기고 갔는데, 안 즐거우면 억울하지.”

    누가? 누가 억울한데?

    에드워드는 무거웠다.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붙잡고 있어서 넘어질 수도 없었다.

    “네 추종자들을 만나서, 얘기는 잘 하고 왔어? 에드워드는 글러 먹었다고. 넌 무사하니 걱정 말라고. 아카데미에 이미 네 지지 세력이 대단하다는 말도 했어? 젊은 귀족들이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에드워드!”

    “조용히…….”

    에드워드의 손이 거미처럼 목을 타고 올라왔다. 입이 막혔다.

    “왜 난 자꾸 널 믿지? 넌 알아? 목소리 때문인가? 듣기 좋은데…….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지. 네 입을 막으면 될까?”

    오해가 있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열 수 없었다.

    “조프리, 핥지 마, 간지러워. 내 손 더러우니까 그거 삼키지 말고…….”

    손이 끈적끈적했다. 에드워드의 손에 붕대가 없다. 그게 무슨 의미지? 숨이 막혀서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아니지, 변명을 들으러 왔지.”

    코와 입을 틀어막던 손아귀가 사라졌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날 지켜 주겠다고 했잖아. 왕비의 습격으로부터 지켜 주겠다고. 그런데 왕비의 파티에 바로 참석해 버리면 누굴 속일 수 있겠어.”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들어 봐. 무슨 오해를 하는 거야……. 왕비님이 아카데미로 찾아오겠다고 하셔서, 내가 파티에 참석한 건, 왕비님께 무사한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 왕비님이 오시면 너도 곤란하니까…….”

    “그래. 왕비님을 걱정시키면 안 되지.”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

    “왕비는 얼마나 떨어져 있든 네게 영향을 미치지. 알아. 왕비를 위해서 더 노력해야지, 조프리. 이래서야 만족시킬 수 없잖아.”

    “에드워드!”

    그의 손을 잡자, 그는 무서운 거라도 닿은 듯 손을 쳐 냈다. 자긴 내 숨통을 막아 놓고!

    “내가 파티에서 뭘 했는데!”

    질문이 아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대답했다.

    “글쎄. 조프리, 왕이 되고 싶어?”

    비명이 나올 것 같다.

    “아니야! 그건 네 자리잖아! 네가 왕이 되어야 하니까, 난 왕위에 관심 없으니까! 난 그래서…….”

    “그래서?”

    목소리가 서늘했다.

    격양된 건 나뿐이고 에드워드는 조용했다.

    “내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그래, 평판을 떨어뜨리려고 왕비의 파티에 참석했구나.”

    “내 말 좀 들어!”

    “어디까지 더? 어디까지 네 말을 믿어야 해?”

    에드워드의 숨이 뒤통수에 닿았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이를 악물고 있었다.

    “난 이제 그러기 싫은데.”

    몸이 휘청거리며 앞으로 쓰러졌다. 에드워드가 나를 놓았다. 그가 방문을 열고 사라지는 걸, 난 바닥에 무릎을 꿇고 보고 있었다.

    입안이 텁텁했다.

    더러우니까, 삼키지 말라고…….

    욕실 불을 켜고 거울을 보니 얼굴에 얼룩이 묻었다.

    노란 조명에도 검붉고 끈적이게 보이는 그건, 사람의 피 같았다.

    26. 그가 모르는 이야기

    행군은 날 저물 즈음 멈췄다.

    정오부터 하늘에 먹구름이 꼈다. 에드워드는 저녁에 내릴 비를 염려했다.

    병력을 이끄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지휘관의 용맹도 기지도 아니었다. 진지 구축과 보급이 제일이고 나머지는 한참 뒤떨어지는 순번으로 중요도를 매길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월간 에드워드는 그런 것을 배웠다.

    초봄의 공기는 아직 찼다. 비를 맞으면 뼛속까지 시릴 것이다. 그럴 바에 속도를 높여 지붕 아래서 잠드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국경 분쟁을 승리로 이끈 전사들은 어느 영지에서나 환영받았다. 영주의 호의로 저녁을 대접받고, 강행군에 시달린 병사들은 녹초가 되어 잠들었다.

    내일이면 조프리를 볼 수 있다.

    에드워드는 배정받은 독방에서 생각했다. 간만에 뜨거운 물로 씻고 좋은 잠자리에 누워서,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다음 날 해야 할 일을 생각했다.

    왕이 바라는 대로 에드워드는 개선하게 될 것이다. 화려한 행렬의 앞에 서서, 뿔피리와 종소리를 들으며 꽃잎을 맞을 것이다.

    왕이 초조해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가 지속되면 개선식을 미뤄야 할지 모른다. 그것만은 막고 싶겠지.

    왕에겐 다행히도 오래갈 비는 아니었다.

    편한 침상에서도 에드워드는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해 구역질이 났다.

    며칠째 열이 심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필요한 판단을 내리는 데는 그의 망가진 머리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가 정말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있는가?

    왜 당장 출발하지 않는 건가. 왕성이 코앞인데. 그곳엔 에드워드가 바라는 모든 것이 있었다.

    따듯한 방과 잠과 조프리 비스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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