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9화 (129/293)
  • 129.

    “그거 술이야?”

    왕자가 물었다.

    “예……. 술이 약하다고 하셔서 단 와인을 가져왔는데요.”

    “화이트 와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왕자는 그러더니 향수를 뿌리듯 손목과 귀밑에 와인을 발랐다. 혼자 코를 킁킁거리며 손목 냄새를 맡더니 얼굴을 찡그렸다.

    “전하?”

    “네가 나가 있는 동안 알렉스랑 얘기를 해 봤는데.”

    왕자가 와인을 마시며 말했다.

    로웰은 저도 모르게 알렉스 바움쿠헨을 쳐다봤다. 그는 얄밉게도 로웰을 마주 보지 않았다.

    놀란 얼굴이 왕자에게 고정되어 있어서, 로웰은 바움쿠헨도 자신과 같은 부분에서 놀랐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다른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저 발언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면 오늘 밤 잠을 못 잘 것 같다.

    “너한테까지 폐를 끼치는 건 곤란할 것 같고, 이번 연회에선 이만하고 소문을 퍼뜨릴 만한 다른 자리를 알아보려고 하는데.”

    그런데 왕자는 로웰을 배제하려고 했다.

    로웰은 당황스러웠다.

    “아니, 전 괜찮은데요.”

    “아까도 그렇게 말했지만, 회장에서 굳어 있었잖아?”

    “정말로 괜찮아요. 생각을 정리하고 와서요.”

    “고민까지 할 정도면 어려운 일이라는 거잖아. 네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줄 몰랐는데, 그러면 평판 관리를 해야지.”

    왕자가 너그럽게 말했다.

    로웰은 ‘내가 명령하는데 안 따르다니’라고 말하지 않는 왕자의 성품을 좋아했으나, 지금만은 곤란했다. 좀 권력자답게 굴어 주셨으면 했다!

    “아니요, 전하. 전하를 돕는 건 제 기쁨이에요.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제 부탁을 들어주시겠다고. 사업하시기 전에 반드시 저와 가장 먼저 상의해 주시겠다고.”

    로웰은 저도 모르게 정색하고 말했다.

    왕자가 행동을 멈추고 로웰을 쳐다봤다. 그는 물론 로웰을 건방지다고 혼내지 않았다.

    “그랬었지.”

    “이것도 일종의, 전하의 사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맥락은 비슷하네.”

    로웰은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그리고 다른 자리를 알아보신다고 해도, 바움쿠헨으로 되시겠어요? 훌륭한 기사지만 밤놀이와 소문에는 약할 텐데요.”

    그가 결정타를 날렸다.

    이 사업에서 누군가 빠져야 한다면 그건 로웰이 아니라 바움쿠헨이다.

    “전하. 도트 님이 저자는 믿을 만한 자가 아니니 각별히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본인 입으로 밤놀이에 통달했다는군요.”

    바움쿠헨은 낮고 단단해서 신뢰 가는 목소리로 로웰을 헐뜯었다.

    이 자식이.

    “음, 제가 전문가라는 뜻은 아니에요. 워낙 사교적이다 보니 발이 넓어 아는 이들이 많을 뿐이죠. 통달했다고 칭찬해 주니 부끄럽네요.”

    로웰은 웃으며 방어했다.

    “말귀도 못 알아듣는 자가 소문이라고 잘 내겠습니까?”

    “바움쿠헨도 참 청산유수네요. 친해지자고 그렇게 말을 걸었는데. 저랑 방에 있을 때도 이 반만 얘기해 주면 소원이 없겠어요.”

    “알렉이 좀 과묵하지.”

    대강 대답한 왕자가 로웰을 쳐다봤다.

    “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요, 정말 하고 싶어요.”

    “파벨에게 부탁해도 돼.”

    왕자는 그새 대안까지 생각한 모양이었다. 곤란하게도 적절한 인선이었다.

    “저에게 맡겨 주세요. 놀이 상대 역할이라면, 아카데미에서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있겠어요?”

    로웰은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그가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이자, 갑자기 왕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로웰은 깜짝 놀라 행동을 멈췄다.

    가볍게 소리 내서 웃은 왕자가 입을 가리고 말했다.

    “그러네. 유혹은 네 역할이지.”

    역할?

    “네…….”

    로웰은 멍하니 대답하고, 새 와인 잔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귀까지 열이 올랐다.

    “에드워드는 굳이 따지자면 도도한 왕자님 역할이니까.”

    왕자는 혼자 납득하고 있었다.

    로웰은 의미를 알고 싶었으나, 왕자가 웃음기 남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있어서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새 잔을 다시 비우고, 무엇이 왕자를 즐겁게 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왕자가 저렇게 웃는 모습을 그는 처음 봤다.

    ‘너를 보면 심장이 뛰어. 몸의 주인이 내가 아닌 것 같아. 도저히 눈을 뗄 수 없어. 무도회장에 들어설 때부터 그랬어.’

    ‘아하하, 거짓말.’

    ‘정말인데.’

    물론 정말일 리 없지, 라고 생각하며 아무렇게나 지껄였던 말들이 떠올랐다.

    소설에나 나올 법한 소리.

    어떤 사람을 만나도 그런 감정은 느껴 본 적 없다. 그러니 그가 하고 있는 건 사랑이 틀림없다고 믿어 왔다.

    왜 이런 게 생각나는 거지?

    로웰은 헛기침을 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잊어서, 기침 후 침묵이 이어졌다.

    왕자에게 ‘제가 곤란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전하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희생을 감수하고 돕겠습니다.’라는 인상을 줄 계획이었는데. 왜 그가 매달리는 꼴이 되는 거지?

    이제 와서 아쉬운 소리는 할 수 없었다. 왕자는 ‘그래? 그럼 파벨에게 부탁할게.’ 해 버릴 테니까.

    왕자는 아쉬운 게 없다. 그래서 로웰은 늘 왕자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웠다. 일단 왕자가 로웰을 신뢰의 눈길로 바라보면, 로웰은 조종이라도 당하듯 수줍고 좋은 상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자가 그에게 특별해서가 아니라, 왕자는 원래 특별한 신분이고, 그의 신뢰는 받을수록 좋으니까…….

    * * *

    『모든 캐릭터의 감정 상태가 해금됩니다.』

    『상태: 공략 가능』

    『알렉스 바움쿠헨의 애정도: ♥♥♥♥♥』

    『로웰 몽블랑의 애정도: ♥♥♥♡♡』

    『그레이 크래커의 애정도…….』

    『에드워드 비스코티의…….』

    『플레이어님은 사랑받고 있습니다.』

    『플레이어님, 행복하신가요?』

    * * *

    무도회에서 빠져나오는 건 계획처럼 쉽지 않았다.

    왕비님의 시녀들은 하나같이 살가운 사람들이었다. 전부터 그들이 카나리아나 무언가 새의 한 종류 같다는 생각은 해 왔다.

    하지만 실은 매에 가까웠는지 모른다.

    플랑베 백작 부인은 내가 무도회장에 나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붙잡았다.

    내가 핑계를 대기도 전에 “그러고 보니 전하, 왕비님이 감기에 걸리셨다는 소식은 들으셨나요…….” 하고 말을 걸어서 끊을 수도 없었다.

    백작 부인의 말에 따르면 왕비님은 몹시 약한 분이어서 조프리 걱정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침이 나온다는 듯했다.

    그런데 왕비님은 에드워드를 습격하고 아카데미를 방문할 계획을 세울 정도로 건강했다. 그 사실을 아는 나로서는 대답할 말이 궁했다.

    “아, 그래?”

    백작 부인은 내게 불충한 눈빛을 보내며 “하지만 왕비님께선 전하를 더 걱정하고 계신답니다.” 하고 말을 이었다.

    왕비님의 시녀답게 죄책감을 자극하는 솜씨가 훌륭했다.

    백작 부인이 심각하게 말해서 주위에 걱정하는 귀족들이 늘어갔다. 이 나라의 귀족들은 왕족을 사랑했다.

    백작 부인은 그들의 걱정하는 말에 동조하다가 “참, 전하, 아직 소개를 못 드렸네요.” 하고 귀족들의 소개로 화제를 바꿨다.

    귀족들은 재빠르게 허리를 펴고 조프리에게 자신의 가문을 알렸다.

    이럴 줄 알았다. 전 같았으면 자리를 무작정 피하려고 했겠지만, 지금의 나는 달랐다.

    “음. 그렇군. 로웰, 와인을 가져다주겠어?”

    “와인보단 네가 더 달콤하겠지만.”

    뭐 이런 소리를 하면서 소개를 듣는 둥 마는 둥 하자 백작 부인의 표정은 안 좋아졌다.

    귀족들은 숨죽여 웅성거리며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느라 바빴다. 그들이 약삭빠르게 시선을 교환하는 게 보였다.

    충분했다. 난 로웰과 알렉스에게 이만 나가자는 신호를 보냈다.

    “가시나요?”

    백작 부인이 물었다.

    “응. 좋은 자리에 불러 줘서 고마워.”

    “전하. 혹시 무슨 고민이 있으신 거라면, 저라도 도움이 되겠습니다. 논의가 필요하시다면…….”

    “무슨 고민이 있겠어? 내 곁에 좋은 사람이 많은데.”

    “…….”

    따듯하게 말하며 로웰의 손을 쥐자 백작 부인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녀는 결국 말했다.

    “왕비님의 귀에 이 일이 들어간다면…….”

    “걱정하시겠지. 몸도 안 좋은 분께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될 거야. 그대가 그러지 않으리라 믿어.”

    “전하.”

    “일탈이야. 그만한 일로 왕비님이 신경 쓰셔서야, 내가 마음 아프지 않겠어?”

    채찍을 보인 뒤엔 당근을 내미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금방 끝날 거야. 약속해.”

    백작 부인은 정말이냐는 눈빛을 보냈다.

    백작 부인은 왕비님과 분위기가 닮았다. 하지만 그녀는 왕비님이 아니어서, 왕자를 훈계할 권리는 갖지 못했다.

    “건방진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 전하께 생각이 다 있으실 텐데. 살펴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백작 부인은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미소 지었다.

    “응. 고마워.”

    이걸로 당분간은 괜찮겠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조프리의 일탈은 몇 번으로 끝날 것이다.

    소문은 그 정도로 끝나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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