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전하께서 누굴 사랑하신다고?”
“무슨 소리니, 로웰?”
체레니아는 어리둥절한 듯했다.
“뭔가 조짐이 보여? 너 전하 추종자였지? 전하께서 전에 연애하신 적이 있다거나…….”
로웰이 말을 이어 갈수록 체레니아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녀는 입술을 모으더니 옆으로 꾹 다물었다.
웃음을 참고 있다.
로웰은 입을 닫았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녀는 평소처럼 망상을 늘어놓고 있었던 것뿐이다. 이상하게 반응한 쪽은 로웰이었다.
“너 진짜 연애해?”
“아니라니까?”
“전하께서 널 받아 주셨다고? 정말, 어쩜, 왜 너 같은 애를? 뭐 믿을 데가 있다고.”
체레니아가 그의 말은 듣지도 않고 혀를 차서 로웰은 발끈했다.
“알렉스 바움쿠헨보다야 낫지!”
“아니거든? 바움쿠헨 경은 영웅이라고, 이 나라를 지키려 전선에 섰는데, 알고 보니 그게 사실 왕자 전하를 위해서야! 얼마나 멋진 사랑인데. 네가 끼면 그냥 후회물이잖아? 바람둥이 갱생물 재미없어…….”
“네 취향 안 궁금하거든?”
“그래서 진짜야? 너 카페에서는 아무 말 없었잖아? 모른 척한 거야? 나 놀리는 거야? 어떡해, 두근거려. 시치미를 뗐겠다?”
그녀가 증거를 잡았다는 듯 팔짱을 꼈다. 로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썹이 올라갔다가 로웰의 재미없는 반응에 다시 하강했다.
“너 진짜 왜 그래? 정말로 뭐야?”
“좀 조용히 해 봐.”
“농담 아니야? 전하께서 널 유혹하셨어? 사실 네가 넘어간 쪽이야?”
체레니아의 눈이 점점 커졌다.
로웰은 입을 막아 주려다가 주변 눈치를 보고 옆구리를 찔렀다. 체레니아는 헉 소리를 내며 조용해졌다.
“…….”
“…….”
“……저기 백작 부인 아니야?”
“앗, 어머니. 나 가 볼게.”
체레니아는 로웰을 곁눈질하더니 모르는 사람 대하듯 치맛자락을 올려 인사했다. 입으로는 다른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소문 안 퍼뜨릴게, 할 얘기 있으면 나랑 꼭 상의해. 나 연애 고민 잘 들어 줘. 입도 무거워.”
퍽이나.
“대화 즐거웠습니다, 플랑베 영애.”
로웰은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였다. 체레니아가 어머니, 하고 종종걸음으로 멀어지는 모습이 보였다.
뭐, 이건 연애 문제가 아니다.
조프리 왕자의 기행 문제다.
그렇다면 전문가는 로웰이었다. 이래 봬도 열다섯부터 왕자를 도와 온 몸이니까.
로웰 몽블랑이 훌륭한 상인이 된 건 열다섯 살부터였다. 훌륭한 상인의 기준이 뭐냐든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냐든가 하는 물음은 의미가 없다. 그때 로웰이 왕자를 만났기 때문이다.
로웰이 약간의 양심과 사심을 발휘해 왕자에게 참견했을 때, 왕자는 어째서인지 로웰을 훌륭한 상인감으로 판별한 듯했다.
왕자가 대뜸 ‘왕성으로 물건을 가져오면 팔아 주겠다’고 약속해서, 로웰은 아버지의 금덩이가 됐다.
‘네가 무슨 수로 왕자의 신뢰를 얻었을까? 신통하다. 신통해.’
아버지의 기대야 아무래도 좋았지만, 왕성에 들어가는 이상 상품에 대한 정보를 익히지 않을 수는 없었다.
로웰은 기초 교육을 받고 들어가서 왕자 앞에서 아무 말이나 했다.
물건을 판다기보다 왕자의 비위를 맞추는 시간이었다. 어차피 첫 거래는 간을 보는 용도였고, 아버지도 ‘왕자의 취향을 알아 와라’ 정도의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취향을 알아내야 할 쪽은 로웰이 아니라 그와 동행한 상단의 베테랑 상인이었다.
그러나 왕자는 로웰에게만 말을 걸었고, 로웰이 무슨 상품을 설명하든 고개를 끄덕였다.
구매하겠다는 뜻이어서, 왕자의 하인들은 내도록 분주하게 움직이며 도자기와 융단, 목걸이, 거울 등을 이곳저곳으로 옮겨야 했다.
종류의 통일성이나 취향은 일절 보이지 않는 구매 시간이 지났다.
어쨌든 처치 곤란이었던 값비싼 애물단지를 몇 개 처분한 셈이라 동행한 상인은 만족했다.
로웰은 아무 말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이 저절로 열리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아니, 그냥 이런 걸 막 사셔도 돼요?’
‘네가 다 귀물이라며. 내 안목을 자랑할 수 있는 좋은 물건이랬잖아?’
그렇게 말하긴 했다.
‘물건 파는 상인이 이건 원래 사겠다고 한 사람이 주문 제작 후 멋대로 취소해서 창고에 처박혀 있던 물건이라고 사실대로 말씀드릴 리 없잖아요?’
‘그런 물건 있었어?’
‘그 보검이요.’
‘그래? 뭐 어때, 예쁜데.’
‘그 검 안 쓰실 거죠?’
기사라면 저렇게 표현할 리 없다. 상단 직원은 ‘저 망나니가 우릴 다 죽이는구나.’ 하고 사색이었는데 로웰은 겁나지 않았다.
저 왕자라면 이 정도 무례로 벌주지 않을 것이다.
과연 왕자는 ‘정말 안목 있는 상인이네.’ 하고 로웰을 칭찬했다.
다음 방문은 그것으로 보장됐다.
로웰이 왕자의 눈에 들었다는 걸 깨닫자, 아버지는 그를 상행에 동행시켰다. 그 전이라고 동행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니지만, 그때부터는 협상 자리에도 대동했다.
좋은 상인이라니, 그런 칭찬은 빈말로도 들어 본 적 없다.
로웰의 아버지는 대단한 상인이긴 했다. 자기 대에 재산을 수백 배로 불려서 귀족의 성을 샀으니까.
로웰의 위로는 남자 형제만 넷 있었는데 로웰과는 어머니가 달랐다. 로웰의 어머니만 귀족이었다.
귀족 부인의 성을 사서 상단의 이름도 몽블랑으로 바꾸고, 아버지는 나름의 열등감을 채운 듯했다.
정작 아버지의 아들들은 그렇지 않았고, 아버지 자신도 귀족 사회에 이상한 동경만 키워 가고 있었지만.
로웰이 왕자와 연줄을 만든 건 아버지의 자긍심을 어마어마하게 키워 줬다.
형제 중 로웰만 아카데미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였다.
로웰은 아버지의 기대를 터뜨리는 재미로 살았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엄청난 기대를 받는 몸이 되어 버렸다.
뭐. 그런 거야 아무래도 좋았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로웰은 여전히 잘 놀았다.
아버지는 저 망나니를 왜 못 잡아 놓느냐고 길길이 날뛰었기에 직원들만 곤란한 즐거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왕국으로 돌아간다고 하면, 로웰은 어째서인지 그럴 수 없었다.
기껏 왕자를 홀려 신뢰를 샀는데.
그래. 그가 왕자를 홀린 것이다.
지금이야 좋은 상인이라고 속고 계시지만, 왕자의 믿음을 얻으면 유혹할 수 있을지도.
‘다녀왔어?’
왕자는 로웰을 믿고 있다.
‘말씀대로보다는, 사람을 나눠 행적을 속이는 편이 추적하기도 어렵고…….’
‘좋아. 그렇게 하자.’
로웰의 조언이 힘을 얻는다.
이러셔도 되는 건가?
로웰은 자신을 알았다.
아버지는 귀족 혈통의 아들이 무슨 알비노 뱀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귀족적임’을 가지고 있길 바랐다. 하지만 로웰은 그냥 어린애였다.
커서는 아주 귀족적이지 않은 어린애가 되어 갔다. 아버지 입장에서는.
로웰이 보기엔 귀족만큼 시간 많고 한가해서 색을 밝히는 족속이 따로 없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선 부모의 소원을 이뤄 준 셈이 아닌가?
말하는 재주는 타고나서, 그는 아무 말이나 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외모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닮지 않은 미모의 소유자였다. 형들이야 아버지를 찍어 낸 듯 닮았으니 격세 유전 아닐까.
이 두 가지는 사람을 안 좋은 길로 끌어들이기 딱 좋았다. 그렇게 지금의 로웰이 만들어졌다.
로웰이 참석하는 모임들은 진지함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그는 가끔 아주 진심인 말을 하곤 했지만 누구도 그걸 진짜라고 여기지 않았다.
로웰은 자신의 말이 가볍게 받아들여지는 데 익숙했다.
왕자는 아니었다.
그는 로웰이 양심적이고 훌륭한 상인이라고 믿었고,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로웰에게 사업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사실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도 로웰은 썩 싫지 않았다.
로웰은 와인과 안주를 들고 테라스로 돌아갔다. 왕자는 알렉스 바움쿠헨과 벽에 옹기종기 기대 있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난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원을 구경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무슨 얘기 하세요?”
다정한 주종에게 묻자 왕자가 대답했다.
“여기서 떨어져도 죽을 리 없다는 얘기.”
“물론 그렇겠죠?”
무도회장은 2층이었다.
“그런데 몸이 무서워한다면 왜 그런다고 생각해?”
“떨어지기 싫다는 거 아닐까요?”
로웰은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왕자의 질문이었으니까.
조프리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지?”
“물론 전하께서 떨어지시면 제 마음도 아플 거예요.”
“이제 회복했어?”
왕자는 가볍게 받았다. 평소 하던 헛소리냐는 뜻이다.
그가 로웰이 하는 무슨 말이든 진지하게 받아 주는 건 아니다.
“안쪽 분위기는 어때?”
“음, 전하께서 이야깃거리를 던져 주셨으니까요.”
“다들 얘기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하게요.”
“좋네.”
왕자가 말했다.
좋은 게 확실하냐고 로웰은 묻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웃는 얼굴을 만들어 냈다.
연회장에서 테라스로 돌아오는 동안 로웰은 고민했다. 체레니아 덕분에 머리는 맑아졌다.
결론은 하나였다. 왕자에게서 떨어질 수 없다.
그는 아직 신뢰를 못 얻어 내지 않았는가?
왕자가 하는 일은 이상해 보여도 다 이유가 있다.
이번 일은 어마어마하게 이상해 보이긴 했지만. 저번 사업이라고 멀쩡했는가?
로웰은 처음에 왕자가 돈을 바다에 버리려는 줄 알았다.
보물섬의 환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왕자의 눈먼 돈이라면 보물섬은 몰라도 보물선은 만들지 않겠는가? 먼 바다에서 가라앉을 게 뻔하니까.
그런데 그 사업들은 거짓말처럼 성공했다. 살아 돌아온 선원들은 스스로 제 발목의 사슬을 끊고 부자가 되었다.
그들이 왕자를 칭송하는 모습을 봤다면 로웰이 아닌 누구라도 경도되었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는 왕이 될 것이다.
그는 이런 표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왕자는 충성할 만한 주인이었다.
로웰은 모르는 내막이 있겠지. 그는 생각 없는 어떤 호위 기사와 달리 그 내막이 무척 궁금했으나, 왕자가 말해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질문은 기대 없이 나왔다.
“그렇죠. 좋죠. 그런데요, 전하. 저희가 전하의 애인 행세를 하는 게 대체 뭐에 도움이 되나요?”
“내 생존에.”
“예?”
로웰은 심장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