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7화 (127/293)

127.

내가 이럴 줄 알았다. 그래서 주색을 섣불리 시도하지 못했던 것이다. 조프리의 신분은 왕자여서, 상대는 싫어도 거절 못 하니까!

역시 싫은 거였잖아?

“로웰, 내 뺨을 때릴래?”

“예?”

“아니, 그건 네가 큰일 날 것 같고. 어떻게 헤어질까?”

“전하, 혹시 저를 죽이고 싶으신가요?”

로웰이 물었다. 무슨 말인가 싶어 뒤를 돌아봤더니, 알렉스가 한 손에 검집을 쥐고 있었다.

아무튼 중요한 게 아니다.

‘싫으면 거절하지 그랬어?’

이건 아니지.

‘나 하나가 더해진다고 네 평판이 더러워질까?’

이것도 아니다.

로웰의 평판은 로웰의 것이었다. 남색가 타이틀까지 추가하기 싫을 수 있었다.

솔직히 더해진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까 싶지만.

“미안해. 알렉스한테 그러면 진짜 사귄다는 소문이 날 것 같아서 그랬어. 한 사람의 혼사를 막을 순 없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전하. 전하께서 필요로 하신다면 아버지도 자랑스러워하실 겁니다.”

알렉스가 듬직하게 말했다.

“제 혼사는요, 전하?”

로웰이 당황했다.

아니, 혼사가 신경 쓰이면 네 평판이나 어떻게 해 봐…….

“모함에 넘어가시다니. 서운해요, 전하. 최근에 저에 대해 소문난 게 없잖아요. 전하께서 맡긴 일만 하며 성실하게 살고 있었어요.”

“아, 정말?”

“매일 새벽 술에 절어 들어왔습니다, 전하.”

알렉스가 귀띔했다.

안 미안해해도 될 것 같은데.

지금까지 소문이 잠잠했다면 앞으로 퍼질 것이다. 로웰 몽블랑은 아카데미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바람둥이였다.

다들 얘가 바람둥이인 걸 알면서 왜 만나는 거지? 플레이할 때 궁금해했던 기억이 났다.

“앞으로 30분만 버티고 연회장 나가자. 왕비님 지시인데 바로 나갈 순 없으니까. 로웰 넌 오늘 나랑 헤어진 걸로 해. 친구 많잖아. 왕자가 너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주고 변명해.”

“전하, 사실 제가 어떻게 되든 신경 안 쓰시는 거죠?”

로웰은 슬퍼하더니 술을 가져오겠다고 나갔다.

테라스엔 나와 알렉스만 남았다.

“전하. 저자보다 제가 못 미더우십니까?”

“그럴 리가.”

“저라면 전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든 따를 겁니다.”

거짓말하지 마. 난 알렉스가 어긴 명령을 몇 개나 댈 수 있었지만, 애 기를 죽이지 않기로 했다.

“알아. 믿어.”

* * *

‘여우 같은 바움쿠헨.’

로웰은 생각했다. 그는 음료를 가져오겠다고 테라스를 빠져나왔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그와 천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왕자가 엮이면 더 심해지는 특성이 있었다.

곰인 척하는 주제에 꼬리는 열 개쯤 달려 있었다. 왕자 주위엔 경계심 많은 보호자가 하나씩 붙어 있었는데, 로웰은 대놓고 싫어하던 도트보다 알렉스 바움쿠헨이 거슬렸다.

알렉스 바움쿠헨은 어느 날 갑자기 왕자 옆자리를 차지했다. 바움쿠헨 백작이 왕자의 스승이었으므로, 그 아들이 왕자의 호위 기사로 붙는 건 이해하기 쉬운 일이었다.

로웰이 몽블랑의 5남이기 때문에 왕자의 곁에 있을 수 있는 것과 비슷했다. ‘곁’이 지칭하는 거리가 로웰보다 훨씬 가깝다는 문제가 있었지만.

보기와 달리 경계심 많은 왕자는 바움쿠헨에겐 그 경계심을 빠르게 허물어뜨렸다.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 인연이 있었나? 아니면 평판과 성품 때문에? 그놈의 평판……. 좀 얌전히 살아올걸.

외모는 아니겠지. 외모 때문이라면 억울하잖아.

그쪽이야말로 보기와 달리 흑심으로 가득하던데.

행동반경이 아무리 달라도 같은 방을 쓰는 이상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로웰은 ‘너처럼 불결한 자가 왕자 전하께 접근하게 둘 수 없다’는 알렉스 바움쿠헨의 눈빛이 가끔 아주 아니꼬웠다.

누가 누구한테?

파티장으로 오는 마차에서 왕자는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사치스럽다는 소문을 내기는 무리일 것 같아. 다른 소문에 집중하자.’

로웰은 왕자가 드디어 계획에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남색가라는 소문을 퍼뜨려야겠어.’

‘뭐라고요?’

왕자는 로웰의 불경한 감탄사를 탓하지 않았다.

‘로웰, 알렉, 날 도와줬으면 하는데. 힘들다면 괜찮아. 다른 사람을 찾아볼게.’

‘명령하십시오, 전하. 전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알렉.’

왕자와 호위 기사가 주군지간의 정을 확인하고 있어서 로웰은 왕자의 계획을 캐물을 수 없었다.

속지 마세요. 걔 지금 설레서 어쩔 줄 모를걸요.

로웰은 맞은편 자리에 앉아 웃으며 두 사람의 포옹을 구경했다. 참 사이좋은 주종이었다. 감정의 색은 다른 듯했지만.

알렉스 바움쿠헨은 왕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단 말인가?

안 궁금하겠지. 가슴이 뛰어서 생각은 할 수 있겠어?

로웰은 핑거푸드가 놓인 테이블을 찾았다. 파벨에게 듣기로 왕자 전하는 안주가 꼭 필요한 분인 듯했다. 술만 가져갈 순 없었다. 속을 채울 만한 게…….

대리석으로 만든 홀은 조명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났다. 그 위를 구두가 달려왔다.

빠른 속도로 걷는 수준이었지만, 상대가 드레스를 입은 귀족 여성이라면 그건 달리기라고 말할 수 있었다. 숨죽인 구두 굽 소리가 음악을 뚫고 귀에 들어왔다. 로웰은 고개를 들었다.

“체린?”

“로웰, 이리 와.”

체레니아 플랑베가 로웰의 팔을 잡았다.

이 저택의 주인이자 주최자인 플랑베 백작 부부의 차녀는 백작 부인이 그들 사이의 친분을 모른다는 사실은 잊은 듯했다.

그녀는 약간 흥분하고 있었다. 그럴 만했다. 카페에서 왕자와 그 호위 기사의 로맨틱한 관계에 대한 소문을 로웰에게 들려준 사람이 그녀였던 것이다.

그녀는 왕자가 운영한다는 카페까지 찾아올 정도로 조프리 왕자에게 진심이었다. 사랑이 아니라 동경이라는데 로웰에겐 생소한 감정이었다.

체레니아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로웰을 벽으로 끌고 갔다. 홀의 가장자리이다 못해 구석이라 벽의 꽃을 자청하는 사람들도 서 있지 않는 곳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네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줄은 알았지만, 설마 왕자 전하께 손을 뻗었니? 미쳤구나?”

“그분이 내가 손을 뻗는다고 잡아 주실 분이야? 아니 그보다, 대체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세상에, 로웰. 네가 누구랑 연애하든 관심 없지만, 왕자 전하라니. 그분은 네가 그렇게 유혹해도 좋을 분이 아니라고.”

“내가 유혹하지 않았어!”

이렇게 되리라 짐작했지만, 체레니아는 정신 못 차리고 흥분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난을 퍼붓다가 소리를 낮췄다. 로웰이 결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 로웰. 물론 넌 사랑에 빠졌다고 주장하겠지만, 세간에선 그런 말을 개소리라고 해…….”

이렇게 억울한 적은 오랜만이었다. 항상 가족 모임에서 느끼던 답답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그분이 먼저 유혹했다고!”

“뭐라고?”

체레니아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로웰은 말실수를 했나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왕자는 기뻐할 것이다. ‘로웰, 잘하고 있잖아.’ 하는 순진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왕자의 계획은 ‘로웰이’ 남색가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게 아니라, ‘왕자가’ 남색가이며 문란하다는 소문을 퍼뜨리는 거니까.

대체 왜?

알렉스 바움쿠헨은 궁금해하지도 않았지만, 로웰은 왕자의 ‘혼사에 관해 생각해 둔 바’가 뭔지도 알 것 같았다.

왕자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분을 무기로 여염집 남자들에게 추근거렸다고.

그런 걸 누가 믿냐?

하지만 로웰도 왕자가 ‘남색을 하자’고 말했을 때 충격받았다. 그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머리가 덜 경직된 편인데도 그랬다.

로웰이 아닌 누구라도 멍해졌을 것이다. 왕자가 직접 나서서 유혹하는 모습을 보이고 소문을 뿌리고 다닌다면, 사람들은 머리가 굳은 나머지 믿어 버릴지도 모른다.

가능성 있는 계획이어서 무서웠다. 왕자의 속내도 모르는 채 그의 계획에 끌려가도 될까?

왕자의 평판을 높이는 계획이라면 얼마든 참여해도 좋았다. 아버지도 만족하고 로웰 자신에게도 해 될 것 없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이 건은 잘못되면 로웰뿐만 아니라 집안도 곤란해진다.

로웰은 이 계획의 피해자로 참여하는 게 가장 좋았다. 왕자도 그 자리를 로웰에게 비워 줬다.

로웰은 오늘 왕자랑 헤어지면 됐다.

아니, 사귀어 보지도 못했는데 어쩌다 이렇게…….

“왕자 전하께서 정말로……? 나, 내가 이런 중대한 사실을 알아 버리면……. 왜 말해 준 거야, 로웰!”

체레니아가 양 뺨에 손을 올렸다.

로웰은 사람들이 머리가 복잡할 때 하는 선택을 했다. 문제를 미뤄 두는 것이었다.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물론 그렇지. 그 전에 네가 나한테 말하지 않으면 됐잖아?”

“나도 마음이 복잡해, 체린. 친구 좋다는 게 뭐야. 같이 걱정해 줄 수 있잖아. 왕자 전하께서 나를 저렇게 대하시니, 내 처지가 어떻겠어?”

로웰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동자가 촉촉해지자, 체레니아의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그렇겠지, 로웰. 네가 임자를 만났구나. 그렇게 망둥이처럼 뛰어다니다 언젠가 망할 줄 알았어. 전하께서는 알렉스 바움쿠헨 경과 사랑하는 사이이니 말이야…….”

“뭐?”

“그 말 하고 있는 거 아니었어?”

“무슨 소리야?”

“목소리 낮춰, 로웰. 우리 비밀 얘기를 하고 있잖아.”

로웰은 분위기를 읽으라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지적에 당황했으나, 그보다 급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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