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6화 (126/293)
  • 126.

    “불경하기는 네가 처음 말한 학생들 무리가 더 심했잖아?”

    “예? 그런가요?”

    “왕자의 능력을 의심하는 게 더 심한 거 아니야?”

    “……그렇죠?”

    로웰이 동의하지 않는 태도로 말했다.

    그가 옳을지도 몰랐다. 후계 경쟁을 하는 왕자에게 남색가라는 소문은 치명적이었다. 에드워드 측에서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한도 끝도 없이 잡을 수 있는 소문이기도 했다.

    거기다 사치 소문내기를 실시간으로 망치고 있긴 하지만, 조프리를 안 좋게 생각하는 무리까지.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당황해서 심장이 쿵쿵거렸다. 조프리는 뭘 해도 안 되는 애였는데, 노력하지도 않은 일이 멋대로 이뤄진다고?

    아니, 이건 행운이 아니었다. 찰떡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이건 전화위복이었다.

    습격을 당해서 에드워드는 조프리의 접근을 용인해 줬다. 내가 그를 걱정하거나 챙겨도 싫어하지 않게 됐다.

    조프리가 죄책감을 갖고 에드워드에게 잘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카페가 잘돼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조프리 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내가 가장 자신 없어서 시도도 않던 소문을.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로웰 네 말은, 내가 남색가라는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거지?”

    희망에 들뜬 가슴이 귀로 들어온 정보를 왜곡했을까 봐, 난 다시 확인했다.

    “아니요.”

    로웰이 정정했다.

    역시 조프리 귀에 문제가 있나?

    “그건 그냥 불온한 농담이에요, 전하.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어한다는 점에서 위험하지만요.”

    알렉스가 내 손을 놓았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하, 그 옷 가게 주인에게 가서 해명하라고 명령하겠습니다.”

    “나랑 소문나서 싫어?”

    알렉스의 눈이 커졌다.

    “물론 기쁩니다, 전하. 영광입니다.”

    “어디까지 퍼진 소문이야? 많이들 얘기하는 것 같아?”

    로웰이 미간을 좁혔다. 기도하듯 모은 손끝으로 턱을 찌르며 그가 말했다.

    “남들 앞에서 큰 소리로 할 얘긴 아니니까요. 재미있는 소문이 있다는 정도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같아요. 아직 파티장까진 퍼지지 않은 것 같지만, 모 부인의 살롱에 참여한 젊은 귀부인들과 그 친구, 가족들까지는 퍼졌겠죠. 그리고 그 친구와 가족의 친구들과 가족…….”

    로웰이 무슨 수열 같은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며칠 사이에 꽤 퍼졌다는 말이야?”

    “바로 그거예요. 전하. 저야 그냥 상인의 아들이고 전하께 조언드릴 위치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지만, 지금 전하께서 알렉스 바움쿠헨을 파트너 삼아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어요. 최소한 사람이라도 더 있었다면…….”

    난 로웰을 빤히 쳐다봤다.

    “으음, 그렇게 바라보셔도……. 저도 초대장을 받긴 했지만요. ……제가 같이 참석할까요?”

    “그래 줄래?”

    착하고 눈치 빠른 사람이라니 이용하기 좋았다.

    난 소문을 막기 위해 그를 끌어들인 게 아니었지만.

    * * *

    로웰을 포함한 세 사람을 태운 마차는 거대한 저택 앞에서 멈춰 섰다. 저택까지의 거리가 짧아 작전을 짤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임기응변이 중요했다. 어차피 연회장에서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모습만 보여 주고 나오면 된다.

    하인들이 조프리 왕자의 입장을 알렸다.

    “전하, 와 주셨군요!”

    “부인.”

    주최자인 플랑베 백작 부인이 다가와 인사했다.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태도가 눈에 익었다.

    초대장의 이름을 봤을 땐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는 왕비님의 시녀였다. 왕비님 곁에서 차를 마시며 나에 대한 낯간지러운 칭찬을 하곤 했다.

    “좋은 자리에 초대해 줘서 고마워. 왕비님께 내가 건강하고 좋아 보였다는 말 꼭 부탁해.”

    왕비님이 어떻게 내 소식을 들으실지 알 수 있었다. 용건부터 꺼내자, 백작 부인은 성질도 급하다는 듯 웃었다.

    “어머, 건강하신 건 지금 보아 알겠지만, 전하께 좋은 일이 있으셨는 줄은 몰랐는걸요.”

    “내게 무슨 좋은 일이 있었겠어? 아카데미에서 공부만 하는 사람에게. 일이 있다면, 이번 습격 때 내 기사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게 되었다는 점이겠지.”

    “어머나.”

    백작 부인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바움쿠헨 경은 이름난 기사인걸요. 위명이 자자하지 않나요.”

    “하지만 난 전장에 서 본 적이 없으니까. 내 기사가 영웅이라 해도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몰랐던 것 같아. 두려운 상황에 처하니 이만큼 든든할 수가 없더군. 귀여운 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말이야.”

    “네?”

    백작 부인은 되묻더니,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전하께서 훌륭한 주군이시니, 그에 걸맞은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는 것 아니겠어요.”

    약했나?

    알렉스는 남 일처럼 듣고 있다가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했다.

    원래도 기사다운 외모가 오늘따라 반짝반짝해서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고 있었다.

    “사실을 말씀드린걸요.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 나라의 복이 아닐 수 없답니다.”

    백작 부인은 왕비님 앞에서 하듯 다정하게 말했다. 말 자체는 나쁠 것이 없어서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도 동조했다.

    난 백작 부인이 ‘이 자리의 주인공은 조프리 전하. 그리고 전하께서는 다음 대 나라의 주인이시지.’ 분위기를 형성할 수 없게 화제를 바꿨다.

    “아. 그러고 보니 소개가 아직이네. 이쪽은 로웰 몽블랑. 몽블랑 상단의 5남이야. 내가 멋대로 데려온 손님인데 폐가 되진 않겠지?”

    “어머. 물론이에요, 전하. 와 줬군요. 초대장을 보냈는데 답이 오지 않아서 불참이라고 생각했어요. 전하를 모시고 올 줄 몰랐네요.”

    “초대장을 보냈어?”

    “예, 그럼요. 몽블랑의 5남이 사업 수단이 뛰어나고 언변과 학식이 빛난다는 소문이 수도에서부터 자자했는걸요.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었어요.”

    백작 부인이 손을 내밀었다. 로웰은 손등에 입을 맞추고 “영광입니다, 부인.” 하고 답했다.

    그가 빙그레 웃자 백작 부인의 뺨에 생기가 돌았다. 어머나, 귀여워라, 그녀가 탄성하더니 부채를 접고 어딘가를 돌아봤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끼리 어울리도록 해야겠죠. 이쪽으로 와요. 내 딸이 사람들을 소개해 줄 거예요. 얘, 체린, 어디 있니? 몽블랑의 자제에게 네 친구들을 소개해 주렴.”

    이 다음 수순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일행과도 떨어진 조프리 왕자는 몇 시간 동안 서서 연회에 참가한 모든 귀족들의 인사를 받게 될 것이다.

    안 될 일이었다.

    “안 돼. 로웰은 내 곁에 있을 거야.”

    내가 웃으며 가로막자, 다가오던 플랑베 영애가 멈칫했다. 백작 부인은 부채를 올려 입가를 가렸다.

    “몽블랑 자제와 나눌 얘기가 있으셨군요.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 얘기는 없지만. 로웰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모처럼 얼굴을 보는 거거든. 다른 사람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아.”

    “아……. 그러시다면……. 네.”

    백작 부인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물러났다.

    플랑베 영애는 입을 딱 벌리고 있다가 백작 부인의 표정을 보고 청초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괜찮았나?

    로웰을 돌아봤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누가 뭐래도 로웰이었다.

    그는 백작 부인에게 인사할 때보다 더 애매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빙그레’의 빙 정도만 웃고 있는 느낌이었다.

    분위기를 좀 맞춰 줬으면 했다. 알렉스보다 더 못 맞추는 것 같았다.

    난 그에게 눈짓하려다가 그만뒀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웰의 표정도 저런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는 누가 봐도 웃을 기분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조프리가 재활용도 못 할 놈이 되는 데는, 자길 싫어하는 남자를 권력으로 곁에 두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더 좋을 것이다.

    주인으로서 손님들을 인사시켜야 하는 백작 부인이 뒤로 물러나 있자, 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개별적으로 왕자에게 다가왔다.

    난 그들이 보이지 않는 척했다. 다정한 눈빛으로 로웰을 바라보자, 그는 시선을 구두코에 두고 수줍게 웃었다.

    “들어갈까?”

    “예, 전하.”

    난 에스코트하듯 로웰에게 손을 내밀었다. 왕자가 귀여워하는 알렉스 경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누가 더 인사하러 오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로웰의 손을 잡고 테라스로 나가자 다가오던 귀족들이 멈춰 서는 게 보였다.

    테라스로 간다는 건 방해받기 싫다는 표시였다. 남이 먼저 들어가 있는 테라스를 침범하는 건 큰 무례였다.

    뒤따라온 알렉스가 커튼을 쳤다. 테라스와 홀 사이가 가로막혔다. 때마침 홀에서는 가벼운 춤곡이 시작됐다. 여기서 무슨 말을 하든 들리지 않을 것이다.

    “로웰, 봤어? 그 모 부인의 살롱 참가자들이 여기에도 보여?”

    “예.”

    “잘될 것 같아?”

    “예. 이렇게 잘하실 줄 몰랐어요.”

    로웰은 웃으며 대답했다. 보고 있으면 싱숭생숭해지는 얼굴이 그늘 한 점 없이 화사하게 웃고 있어서, 로웰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를 수 없었다.

    비위를 맞추고 있잖아?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