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뭐야, 왜 괜찮은 것 같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노력하지 않고도 어떤 일이 이뤄지는 건 행운과 우연의 영역이었다.
현실에서 다른 사람들에겐 종종 일어나지만 나는 찾아도 없는 일들.
그마저도 게임 속에선 바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게임 세계야말로 정해진 설정으로 이루어진 곳이어서, 행운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으니까.
노력해서 바꿨다고 생각한 설정마저 강한 힘으로 다시 되돌아오는 곳이었다.
이미 로제 부인의 일로 깨닫지 않았는가?
나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최소한 이델라와 에드워드를 엮어 주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는데, 에드워드가 조프리에게 어떻게 관대해질 수 있지.
내가 원래 이렇게 부정적인 사람이 아닌데, 이 게임 세계는 사람을 좀 부정적으로 만드는 면이 있었다.
에드워드가 줄곧 기대고 있던 어깨는 알렉스에게 마사지를 받아도 여전히 딱딱했다.
301호에서 나가려는 우리를 붙잡은 건 로웰이었다. 그는 괴로운 얼굴로 방으로 들어오더니, 나를 발견하고 놀랐다.
“전하? 왜 여기에……. 두 분 어디 가세요?”
“응. 외부 사교 행사에.”
“외부라면……”
“플랑베 백작 부인이 주최하는 사교 행사. 혹시 알아?”
로웰은 우리 차림새를 알아챈 순간부터 두 손을 모으더니, 행선지를 듣자 우울감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물론이죠. 저도 초대장을 받았어요. 거길 가시는군요. 그곳은 귀족들이 많이 오겠죠?”
그가 당연한 소리를 했다.
“그렇겠지?”
“소문의 온상지겠죠?”
“로웰, 무슨 일이야?”
로웰은 울 듯한 얼굴로 실토했다.
“전하. 제가 사고 쳤나 봐요.”
그가 털어놓은 얘기는 이랬다.
로웰은 습격 소식을 듣고 내가 걱정됐지만 잡힌 약속을 취소할 수 없어, 아카데미 내 엘리트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조프리에 대한 불경한 대화를 나누다가 급기야 조프리의 능력을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지 않았겠는가?
로웰은 당장 그곳을 나와 내게 고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했으나, 내가 부탁한 ‘안 좋은 소문’을 내는 데 그들이 도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조프리가 인수한 카페에 그 불경한 학생들을 데려갔고, 그들은 카페의 매출을 요새 크게 늘려 주고 있다는 듯했다.
“왜?”
결론이 황당했다.
“그, 세상에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없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에…….”
“뭘 이해 못 해서 그러는 건데?”
“전하께서 그 카페를 인수하신 이유요?”
로웰이 눈을 굴렸다.
“설명 안 해 줬어?”
“아, 설명이요. 전하께서 돈 쓰시는 걸 좋아한다는.”
로웰이 억울해했다.
“물론 했어요! 그들이 카페에 방문하겠다고 주장하기 전부터 했어요! 하지만 그 얼간이들이 ‘왕자의 행동을 겉면만 보고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우를 범하다니’ 하고 되레 핀잔을 주잖아요?”
“그래서?”
“카페만 해도 외부며 내부 모두 심각하잖아요? 솔직히 첫눈에 보고 여긴 망했구나 알 수 있는 곳이잖아요. 제가 ‘봐라, 전하께서 하시는 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가게를 이 꼴로 만든 경영인도 바꾸지 않았다. 아무래도 사업하는 분의 마음가짐이 아니다’라고 얘기하니까, ‘이래서 상인 출신은 생각이 얕다’는 말이나 하지 않겠어요?”
나 이 패턴 아는 것 같은데.
“깊은 생각은 뭔데?”
“제 말이요! 그래서 제가 알려 달라고 했죠. 그러니까 지들도 알아내겠다며 카페를 들락거리더니, 카페 개조마저 하려 드는 게 아니겠어요? 의자가 딱딱하네, 액자에 먼지가 쌓였네, 커피가 쓰네 시네, 이런 곳엔 앉아 있을 수가 없네. 그럼 나가면 되지? 하도 쪼아 대니까 카페 사장은 원두 고르기부터 다시 배우고 있던데요?”
로웰이 흥분할수록 나는 차분해져서, 그를 안쓰럽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까지 됐다.
로웰은 실패가 처음인가?
그럴 만도 했다. 로웰도 공략 캐릭터답게 능력과 외모를 겸비하고 있어서, 인생을 평탄하게 살아온 편이었다. 그가 인생에서 겪은 몇 안 되는 실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겐 이게 정상이었다. 그래. 행운 같은 소리 하고 있다. 노력하지 않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노력을 해도 안 되는 게 내겐 익숙했다.
솔직히 이번엔 꽤 가능성 있지 않았나 싶었지만.
하루 이틀 망해 본 것도 아니고…….
“뭐, 괜찮아.”
“예? 전하?”
“그 얘기를 해 주러 왔어? 며칠 동향을 살펴보다가 걱정돼서?”
책임감 있는 상인이다. 동화에 등장해도 괜찮을 것 같다.
공략 캐릭터의 괜찮은 면을 볼 때마다 난 내 안목에 다시 감탄하게 됐다. 다른 애들을 다 놔두고 하필이면 조프리를 여주인공과…….
로웰이 당황했다.
“곤란해지는 거 아니세요? 전하께서 계획이 있으셨을 텐데, 제가 괜한 짓을 해 버렸다고 생각했어요. 호되게 혼내셔도 할 말이 없는데요.”
“아니. 도움이 됐어.”
“네? 정말요?”
“그럼.”
이제 알았다. 조프리는 사치는 아니다.
로웰은 당황하는가 싶더니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죄송합니다, 전하.”
“괜찮다니까. 왜 자꾸 사과를 하고 그래. 사람을 움직이는 일이 어떻게 마음대로 되겠어.”
“전하…….”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잖아? 며칠 매출 나는 정도로 그 카페가 살아나면 그것도 또 신기한 일이고.”
“전하…….”
로웰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불러서 난 일이 마무리된 줄 알았다. 이 패턴은 감사받는 패턴이니까.
로웰이 정색했다.
“실은 그 카페에서 더 심각한 일을 알게 됐는데요.”
더 있어?
“뭔데?”
알고 싶지 않았지만, 나쁜 소식은 한 번에 듣는 편이 나을 것이다. 난 결국 알렉스와 로웰을 앉혔다.
“전하께서 바움쿠헨의 옷을 사 주신 옷 가게가 괜찮은 곳이긴 한데요, 그 가게 주인이 워낙 발이 넓고 또 전하의 팬이라서요.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입이 무거운 편도 아니잖아요?”
그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듯 이야기를 빙 돌렸다.
“그냥 말해 주면 안 돼?”
“예. 문제가 생겼는데요.”
“응. 무슨 문제?”
“그 전에, 바움쿠헨이 관련된 일이라 듣게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할까요, 전하?”
“가문에 관한 일이라도, 목숨을 걸고 비밀을 지키겠습니다. 명령하신다면 지금 나가겠지만, 전하께서 검을 들고 계셨으면 합니다. 때가 좋지 않으니까요.”
알렉스가 말했다.
“으으음, 예. 제가 부엌칼을 들고도 개미 한 마리 못 죽이긴 하지만, 경계하셔서 나쁠 거 없다고 생각해요.”
로웰도 동의했다.
“됐어. 알렉은 여기 있을 거니까.”
알렉스는 반쯤 선 몸을 다시 매트리스 위에 앉혔다. 침대가 잠깐 들썩였다. 로웰이 공손히 모은 손을 얼굴로 가져가더니,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한숨이라도 쉬는 듯한 얼굴로 로웰이 빙긋 웃었다.
“다행히 가문에 관한 일은 아니에요.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재미있는 소문 정도여서요.”
“소문?”
나와 로웰이 퍼뜨리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던 소문은 얼렁뚱땅 묻혔으니, 그 얘긴 아닐 것이다.
“예, 전하의 연애 취향에 관한 소문이에요.”
설마?
옷 가게 주인에게 이델라의 인상착의를 알려 줬던 일이 기억났다.
얼굴의 피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게 참 입에 올리기 민망한 일인데요, 요즘 살롱의 여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유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두 사람을 엮어서 커플처럼 생각하는 놀이가 벌어지곤 하는데요…….”
로웰의 목소리가 웅웅거렸다.
“……전하의 팬인 그 옷 가게 주인이, 전하께서 호위 기사의 옷을 엄청나게 맞춰 주셨다는 얘기를 아는 귀부인들에게 하는 바람에, 그…….”
“바람에?”
알렉스가 되물었다.
로웰이 나를 힐끗 봤다.
“두 분에 관한 소문이 모 부인의 살롱을 근거지로 해서 쭉 퍼진 모양이에요. 또 귀족 아가씨들의 놀이터는 카페다 보니까요, 역시 전하의 팬인 모 영애가 전하의 카페에 방문했다가 그 소문을 전해 준 거죠. 그때 카페에 있던 사람들은 다 즐거워했고요. 해서 말인데요, 전하. 두 분이서만 같이 파티에 참석하면 좋아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거든요? 재미로 퍼진 소문이라도 이게 아주 곤란해질 수 있잖아요……. 전하?”
“전하.”
알렉스가 내 손을 잡았다. 커다란 손이 내 손등을 부드럽게 눌렀다. 빠져나간 피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두 볼이 화끈거렸다.
“어, 어?”
“아. 역시 충격받으셨군요. 죄송합니다. 귀족 여성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암암리에 유행하던 취미라, 제겐 익숙한 나머지 전하께서 받을 충격을 예상치 못했어요. 관대하신 전하라 해도 이런 일에 관용을 베푸시면 안 되겠죠. 왕족에 대한 불경한 소문을 퍼뜨리는…….”
로웰이 당황해서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