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4화 (124/293)
  • 124.

    “어?”

    내 근처에 있던 파벨 무리 중 하나가 엎어진 건 그 다음이었다. 그가 내 왼편으로 고꾸라져서 알렉스가 붙잡았다.

    뒤늦게 알았다. 에드워드가 날 도왔다.

    “고마워.”

    에드워드는 ‘뭐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더니,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응. 고마워해, 조프리.”

    위화감이 느껴졌다. 아침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

    ‘조프리. 거기 더러워.’

    뭔가, 에드워드의 행동이…….

    “조심해. 전하께서 다치실 뻔했잖아.”

    “칠칠치 않은 놈.”

    파벨 무리 때문에 머리가 산란했다.

    “학생들과 정말 잘 지내는구나, 조프리.”

    에드워드가 칭찬했다.

    ‘굉장한 자신감이네, 조프리.’

    상황이 이상한데, 어디가 이상하다고 명확히 짚을 수 없었다.

    내 얼굴도 이상했을 것이다. 나를 본 에드워드가 미간을 좁혔다.

    “아니야?”

    에드워드의 손은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친구랑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가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파벨 무리가 떠들고 있어서 다른 사람에겐 안 들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벨 무리가 내 친구로 보여?”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아닌가 보네.”

    “응. 아냐.”

    “쫓아내는 게 좋아?”

    “당연하지.”

    “네가 좋아서 어울리는 줄 알았는데.”

    “그럴 리 있어? 날 뭘로 보는 거야?”

    에드워드가 보는 조프리는 파벨과 친구를 할 것 같은 애인 듯했다.

    에드워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더 말하지 않고 뒤돌아 파벨에게 다가갔다. 그가 뭐라고 속삭이자, 파벨의 눈이 커졌다.

    또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야. 공부하러 가자.”

    파벨이 갑자기 친구들에게 제안했다. 친구들은 따스하게 맞아 주지 않았다.

    “너나 해.”

    “약 먹었어?”

    “아, 빨리!”

    “왜 이래?”

    “말해 줄 테니까 따라와 봐.”

    파벨이 억지를 부렸다. 무리는 투덜대며 끌려갔다. 전하, 죄송합니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커다란 목소리가 멀어지고,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통이 조금 가셨다.

    “조용해졌지.”

    에드워드가 말했다. 칭찬해 달라는 듯이.

    난 칭찬했다.

    “고마워.”

    “응.”

    에드워드는 별거 아냐, 라거나 천만에, 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고마워해, 라고 말했다.

    그게 에드워드답고, 전체적으로 너무 이상했다.

    위화감은 학생 식당에서도 이어졌다.

    큰 강당처럼 넓은 공간에, 동그란 4인용 테이블 여러 개가 놓인 학생 식당은 덕분에 거의 비어 있었다. 장사 안 되는 레스토랑 같은 분위기였다.

    아카데미 학생들에게 학생 식당은 인기 있는 장소가 아닌 듯했다.

    게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곳에서 이벤트가 일어난 적 있었나?

    그렇다곤 해도 식당에 아무도 없진 않았다. 우리가 들어올 때부터 학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따라붙더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우리는 여전히 손을 잡고 있었다. 빼낼 타이밍을 놓쳤다.

    이상해. 조금만 생각하면 알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자꾸 뭔가를 해서 생각이 끊어졌다.

    에드워드는 알렉스가 손을 뻗기 전에 유리문을 열었다. 내가 식당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문을 열고 있다가 빈자리를 잡았다.

    역할을 빼앗긴 알렉스가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에드워드가 의자를 빼기에 난 반대편으로 가서 앉으려고 했다.

    자연스럽게 손을 놓을 타이밍이었다. 눈 있는 학생들은 전부 수군거리고 있었다. 두 왕자는 왜 손을 잡고 있나. 둘만이 아는 우애의 증표라도 되는가?

    “앉아, 조프리. 네 자리야.”

    에드워드가 친절하게 말했다.

    “괜찮아. 너 앉아.”

    “나 팔 아파. 어서 앉아.”

    에드워드가 고통을 호소했다.

    그 변명은 방금 전 유리문을 열 때 했어야지. 지적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난 그냥 앉았다.

    학생들은 이제 왜 다친 에드워드 왕자가 조프리 왕자의 시중을 들고 있는지 궁금해했다.

    그거였다!

    식당에서 일하는 사용인이 우리 앞에 샌드위치 한 접시씩을 놓았다. 각진 식빵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먹기 쉽게 장식한 메뉴였다.

    포크와 나이프가 필요하지 않았다. 이거라면 에드워드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는다면, 에드워드는 이제…….

    에드워드가 말했다.

    “조프리, 손 아파. 못 먹겠어.”

    아닌가?

    난 그가 나한테 물이라도 따라 줄 줄 알았다.

    포크라도 가져다주든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에드워드의 호감도를 올리겠다는 생각은 내가 해 놓고.

    에드워드는 계속 내게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호감도 작업을 하는 것 같다니, 이상한 생각이었다.

    공략 캐릭터는 호감도 작업을 당하는 상대지, 하는 주체가 아니다.

    “입 벌려.”

    에드워드는 순순히 따랐다. 눈을 감고 입을 살짝 벌려서, 난 그 틈으로 샌드위치를 넣어 줬다.

    우물우물 삼키는 얼굴이 멍했다.

    에드워드는 원래 이상한 애였다. 깊이 생각하는 쪽이 손해다.

    에드워드가 오후 검술 수업을 들을 수 없어서, 난 보호자 역할로 그의 옆에서 같이 양산 쓰고 있는 처지가 됐다.

    운동장 주위를 빙 두르듯 만들어진 큰 계단은 의자로도 쓸 만했다.

    검술 선생은 습격 당일에도 에드워드를 무서워하더니, 오늘은 수업 시작부터 공손하게 대하며 그의 기분을 맞추려고 했다.

    한국의 교권에 대해 말이 많았지만 역시 신분제 사회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혼자 앉아 있기 무섭고 쓸쓸해.’

    ‘이런, 전하, 제가 어떻게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내 형제가 지켜 주면 괜찮을 텐데.’

    검술 선생과 에드워드의 협의는 빠르게 이뤄졌다.

    난 보호자 자격으로 에드워드를 지키는 역할을 허락받았다.

    알렉스는 내가 안 달리는 게 결정되자마자 내 뒤쪽 계단에 앉았는데, 검술 선생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다친 몸이 땡볕에 노출되면 더 상할까 걱정된다며 양산을 가져다주기까지 했다.

    양산은 잘 봐줘도 2인용이었고, 큰 그늘을 만들지 못했다. 난 알렉스에게 내 아래 계단에 앉으라고 손짓했다.

    세 사람 머리꼭지 위에서 균형을 맞춰 양산을 들고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팔이 저렸다.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 두 학생은 운동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모습을 구경하면서 우리 셋은 왜 수업을 들으러 나온 건가 생각했다.

    에드워드 때문이었지.

    그가 수업을 듣겠다고 해서, 나는 어딜 가나 그의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

    에드워드가 내 어깨에 자신의 몸을 툭 기대 왔다. 한참 조용하더니 졸고 있던 듯했다.

    양산을 쥔 손이 흔들려서 그림자가 왔다 갔다 했다. 팔은 저릿저릿해서 거의 감각이 없었다.

    한숨과 함께 에드워드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의 몸이 따듯해서 정말 열이 있나 싶어졌다.

    에드워드가 멀쩡하게 돌아다녀서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그는 한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다쳤다.

    습격당한 날 나는 혼자 자지도 못할 정도였다. 에드워드와 알렉스보다 훨씬 어른이었는데도.

    에드워드는 정말로 아프고 불편하고 쓸쓸할지 모른다.

    여러 의심이 끓인 죽처럼 형체를 잃어 갔다. 내게 마음을 연 시절의 에드워드가 자꾸 떠올랐다. 마르고 순진한, 내가 이용한 어린아이가.

    에드워드는 눈을 감고 있었다. 깊게 잠든 걸까? 미동도 없는 속눈썹을 보다가 양산을 기울였다.

    희게 햇볕을 타던 볼이 그늘 아래 들어갔다.

    사실 에드워드는 이렇게 어린데.

    “전하.”

    알렉스가 내 손에서 양산을 가져갔다. 팔을 뻐근하게 하던 무게가 덜어졌지만, 어깨에서 힘을 풀 순 없었다.

    난 검지를 입에 댔다. 알렉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의 잠든 얼굴은 평온했다.

    예전처럼 돌아가자고?

    불가능한 일이다. 에드워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난 아무것도 몰랐고, 에드워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바라는 건 하나였다. 깨어난 에드워드가 날 노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좋을 텐데.

    25. 러브 트랩

    시종 없는 무도회 준비는 간단하게 끝났다. 머리를 손질해 줄 사람도 옷과 장식을 고민해 줄 사람도 없어서, 나와 알렉스는 옷장을 열고 가장 먼저 보이는 옷을 입기로 했다.

    알렉스가 새 연회복을 입고 거울 앞에 섰다.

    옷 가게 주인의 도움을 받아 구매한 연회복은 보기에 그럴듯했다. 왕자의 파트너로 손색없을 것이다.

    “준비됐어?”

    “예, 전하.”

    알렉스가 대답했다.

    마차는 미리 불러 뒀다. 무도회장까지는 수도에서 파견된 경비병들이 호위할 것이다.

    왕족의 행차처럼 사람을 주렁주렁 매달고 갈 예정이었다. 왕비님의 바람대로, 안전하게.

    그리고 무도회엔 얼굴만 비치고 나올 것이다.

    잠에서 깬 에드워드는 화내지 않았다. 얼굴을 굳히지도, 날 노려보지도 않았다.

    그는 잠이 덜 깬 얼굴로 멍하니 있더니 물었다.

    ‘조프리, 나한테 할 말 없어?’

    ‘……침대에서 자?’

    ‘…….’

    에드워드는 알았어, 하고 대답했다.

    그가 양순하고 멍한 태도로 내 말을 들어서, 내 기대는 나 자신도 다잡을 수 없이 커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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