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3화 (123/293)

123.

이상을 느낀 건 첫 문제의 답을 작성한 뒤였다. 시선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가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펜을 들고 있지도 않았다. 그는 원한다면 다른 사람이 쓰는 답안을 한 번 읽고도 베껴 쓸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내 답안지 따위를 탐낼 리 없었다.

에드워드는 그냥 날 구경하며 놀고 있었다.

시험 안 보고 뭐 하는 거야?

눈이 마주쳤다. 에드워드가 멀쩡한 손가락을 들더니 자기 시험지를 콕콕 찔렀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흔들자 그는 눈을 깜빡였다.

난 어깨를 크게 으쓱했다. 말로 해라.

에드워드는 약간 웃더니 그제야 입 모양으로 말했다.

‘집중해.’

고개를 숙였다.

에드워드는 모르는 걸까? 또 웃었다.

그가 자신의 표정을 모르는 것 같아서, 정말 짐작조차 못 하는 것 같아서 이상했다.

다시 힐끗 보니 에드워드는 왼손으로 책상을 톡톡 치고 있었다. 정면을 보는 얼굴이 생각에 잠겨 있었다.

시험 볼 생각은 없는 것 같다.

다른 학생들은 모두 책상에 고개를 수그리고 답안을 작성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쪽지 시험 점수가 중간, 기말 시험에 합산이 되던가?

기억나지 않았지만, 학생들의 열의를 보면 합리적 추론이 가능했다.

보너스 점수 들어가나 보다.

에드워드는 오른손을 다쳤다. 왼손으로 글씨를, 당연히 못 쓸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도움 요청도 하지 않는 건 이상했다. 교수진이 편의를 봐줄 수 있는 일인데.

내 답안지를 내려다봤다. 반 바닥을 채웠다.

열심히 노력해서 최대한 못 보는 중이었다. 그레이가 봤으면 잡스러운 사설이라고 평가했을 법한, 주제와 관계없는 내용이 반이었다.

하지만 형편없는 답안지가 백지보단 좋은 점수를 받기 마련이다.

조프리가 쪽지 시험을 에드워드보다 잘 봐 버리면…… 위험하지 않나?

에드워드가 백지 답안지를 냈다는 건 왕비님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난 손을 들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철학 교수가 물었다. 난 그에게 새 답안지를 요청했다.

내가 작성한 답안은 펜을 죽 그어서 못 쓰게 만들었다. 교수가 그 답안지를 회수해 갔다.

난 백지를 올려놓고 맨 위에 조프리의 이름을 적었다. 그러곤 펜을 움직이지 않았다.

나머지 시험 시간은 아무 생각 없이 흘려보냈다.

이걸로 됐겠지.

답안 작성 시간이 끝나고 학생들은 뒤에서부터 시험지를 회수해 앞자리로 넘겼다.

백지 답안지가 철학 교수에게 도달했다. 그는 답안지를 죽 훑어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두 분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자이시고, 그렇기 때문에 타의 모범을 보이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런 질문을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시험을 치르지 않은 이유가 있으십니까?”

이걸 질문하신다고? 난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그가 붕대 감은 손을 들었다.

“이런 손으로 어떻게 시험을 치겠어.”

“시험 전에 말씀해 주셨다면…….”

“그런 특별 대우를 나만 받을 순 없지.”

에드워드는 갑자기 공평함의 가치에 눈뜬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면서 나를 쳐다봤는데 뭐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특별 대우가 그런 데 쓰이는 말이던가? 오히려 다친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 쪽이 차별 대우 아닌가?

철학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게 몸을 돌렸다. 뭐야, 납득한 거야?

“전하께서는요?”

“에드워드가 시험을 치르지 못하는데 내가 치를 순 없잖아.”

‘그게 무슨 관계죠?’라는 질문이 들어오면, ‘우리는 형제니까.’라고 대답해 보기로 했다. 할리우드 감성으로.

거기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교수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그러시군요.” 하고 헛기침을 했다.

그는 감동받은 듯했다.

어? 다음 대사를 안 듣고도 이해해 주신다고?

그때 앞줄에 앉은 학생 하나가 일어났다. 그가 너무 결연하게 책상을 짚고 일어나서 난 항의라도 하려나 했다.

“교수님. 제 시험지를 찢어 주시길 바랍니다. 두 분 전하께서 저렇게 아름다운 우애를 보여 주시는데 저는…….”

남학생이 입술을 떨었다. 그는 수치스러운 듯 얼굴을 감쌌다.

“교수님. 저도 부탁드립니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교수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전하께선 시험도 못 보실 정도로 다치셨는데, 부끄럽습니다.”

“교수님!”

“이런, 이런…….”

철학 교수는 놀라고 감동한 듯 학생들을 돌아봤다. 하나둘 벌떡벌떡 일어난 학생들이 교수의 시선을 받아 냈다.

“진심입니까, 여러분? 시험에 점수가 반영될 텐데도 이렇게…….”

“물론입니다, 교수님. 저희의 진심을 의심하지 말아 주세요.”

“이런.”

교수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같은 생각입니까?”

“예, 물론입니다. 너희도 그렇지?”

학생 하나가 교실을 둘러봤다. 여기저기서 그렇다는 대답이 나왔다. 교실은 갑자기 훈훈해졌다.

지난번에 함께 식당에 갔을 땐 학생들이 서로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난 이 세계 감성을 아직도 모르겠다.

나만큼이나 분위기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이 교실에 있었다.

이델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당황이 차서,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입에 댔다 가슴께로 내렸다 하더니 결국 완전히 늘어뜨렸다. 발언하려다 포기한 모양새였다.

그녀가 뭘 망설이고 있는지는 뻔했다.

시험 포기 처리되면 장학금 못 받잖아!

이 나라는 서양풍 배경이면서 왜 통일된 의견을 좋아하는 걸까? 개인주의는 어디 간 거야?

차별 대우가 어쩌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는 척하던 에드워드는, 모두가 평등하게 시험을 안 치른 걸로 하겠다는 데는 불만이 없는 듯했다.

그때 파벨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 중에선 가장 눈치가 빠른 파벨이…….

“비스코티의 의기에 감탄했습니다, 전하. 제 시험지도 찢어 버리겠습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팔이 다 나으시면, 정정당당하게 성적으로 승부를 보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예?”

파벨은 쓸모없었다.

이 사태를 막고 싶으면 내가 방안을 내는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을 설득할 만한 얘기가 뭐가 있지?

“아니, 애초에 추가 점수 없이도 질 리 없잖아…….”

에드워드가 1등을 빼앗긴다고?

그럴 리 없다.

“예?”

파벨의 표정이 변했다. 다른 학생들도 얼굴을 굳혀서, 내 말을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추가 점수가 필요 없다는 건 조프리 얘기가 아니다. 에드워드 얘기였다.

게임을 해 본 사람이라면 에드워드가 1등이란 건 설정값임을 알 수밖에 없었다.

여주인공이 과로 상태로 공부해도 에드워드 성적은 못 뛰어넘으니까. 걘 전 과목 최고점에 추가 점수까지 받는 애였다.

에드워드가 턱을 괴고 나를 봤다.

“굉장한 자신감이네, 조프리.”

“뭐?”

뭐라는 거야. 장작 넣지 마.

학생들의 눈이 타올랐다.

“전하께서 그렇게 자신하시다니…….”

“저희가 전하의 뜻을 몰라뵈었군요!”

아무리 왕족을 띄워 준다 해도 학생들은 귀족이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찔렀다. 문학 공부 같은 거 안 들어도 파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프리가 되고 이런 시선을 처음 받아 봤다. 역시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답이었다.

잘된 거 아닌가? 조프리가 공적이 됐는데.

당황한 이델라가 보였다.

기호지세다. 난 거만하게 말했다.

“그대들이 추가 점수를 받는다고 날 이길 수 있겠어? 그대들은 차석의 공기가 얼마나 맑고 청량한지 모르겠지.”

“교수님!”

학생들이 단체로 시험 취소를 물리기까지는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델라의 장학금은 무사했다.

본래라면 난 수업이 끝나자마자 알렉스와 도망쳐야 했다. 이번엔 에드워드의 속도에 맞췄다.

그는 한 손으로 책상을 옮길 수 있었지만 책은 가방에 넣지 못했다. 한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범위가 좁았다.

난 알렉스가 나서려는 걸 막고 가방을 챙겨 줬다. 에드워드 품에 들리자 그는 양팔로 끌어안았다.

점심을 먹으러 간 곳은 학생 식당이었다. 학생들은 조프리를 성적으로 응징하기로 마음먹었으나, 왕자들과 점심을 같이 먹고 싶은 마음도 버리지 않았다.

수많은 학생이 뒤를 쫓아왔다. 아카데미 내에서 행차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대체로 부끄러웠고 에드워드의 눈치가 보였다. 귀족들의 촉은 대단해서 만만한 사람을 찾는 데는 따를 자가 없었다.

조프리는 확실히 만만한 쪽이었다. 에드워드와 내 주위의 인구 밀도를 보면 확연히 드러났다.

달리 보면 조프리가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왕자처럼도 보여서, 에드워드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정면을 보고 있었다. 뒤에 따라오는 학생들이 말을 걸어도 안 들리는 듯했다. 여러 명이 동시에 말하고 있어서 실제로 내용이 식별되진 않았다.

내 오른팔에 무언가 툭 닿았다. 에드워드의 팔이었다.

거리가 가까운가? 난 왼쪽으로 가면서 거리를 벌렸다.

에드워드가 왼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빠져나갈 수 없게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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