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열한 살의 에드워드였다면 열을 재 봤을 것이다. 열일곱의 에드워드가 뒤로 몸을 젖히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진심이 아닐 거라 생각했지만, 그가 손도 까딱하지 않아서 의심스러웠다.
간호 이벤트의 핵심은 몸이 약해져서 마음도 약해져 있는 공략 캐릭터를 돌봐 주는 데 있었다.
에드워드가 마음이 약해져서 바지도 못 갈아입을 지경이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조프리, 너 불쌍한 사람에겐 속절없이 약하네. 얼마나 해 주려고? 누가 애걸하면 입이라도 맞춰 줄 거야?”
에드워드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그냥 조프리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었나 보다.
“진심인 줄 알았잖아.”
“진심이면, 해 줄 생각이었어?”
그럴 리가 있냐?
착하게 대하려고 해도 도무지 받아 주지 않는다. 에드워드는 삐뚠 어른으로 자랐다.
내가 찡그리며 쳐다보자, 에드워드는 빙긋 웃었다.
“바지는 괜찮아. 셔츠 입는 거 마저 도와줘.”
난 아마 깜짝 놀랐을 것이다. 에드워드는 웃음을 거두고 입가를 만졌다.
“아, 웃지 않기로 했지.”
물 빠진 커튼처럼 에드워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무표정하다 못해 멍해져서 팔을 벌렸다.
팔을 꿰어 입히고 몸을 돌리고 단추를 채우는 대로 순순히 따랐다. 인형의 옷을 입히는 듯했다.
리본이나 귀걸이를 그 인형 자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에드워드의 미소는 장식품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당황하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진심으로 웃은 거였을까?
그런 생각 때문에 나까지 멍해져서, 강의실로 가는 동안은 대화가 없었다.
학생들을 어떻게 헤치고 들어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문을 열고, 자리를 잡고, 의자를 끌어 줬다.
자리에 앉아서 에드워드를 힐끗 보는데, 우리를 가운데 두고 학생들이 강의실로 들어찼다.
학생들을 지나쳐 왔다는 건 착각이었다. 그들은 왕자들을 따라온 듯했다. 강의실 뒷문은 병목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책상 사이의 공간이 사라지고 사람으로 채워졌다.
“두 분 전하. 무사하신 모습을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어 기쁨이 한량없습니다!”
전에 소개받은 남학생이 말했다. 파벨 무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무슨 남작의 아들이랬나?
강의 시간이 공식적인 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몹시 기뻐하는 건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칩거에 들어간 왕자들에게 다시 눈도장을 찍을 수 있어 기뻐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고마워. 그대들의 충정에 마음이 따듯해지는군. 우리를 맞으러 강의실까지 와 준 거야?”
“물론입니다, 전하. 두 분 전하께서 수업에 복귀하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휴식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얼마나 노력했는지 모릅니다, 전하. 저희 남자 기숙사 학생들은 호위대를 조직해 밤낮으로 기숙사의 순찰을 돌아, 두 분 전하의 안전을 수호했습니다.”
“두 분 전하의 상찬은 바라지 않습니다. 저희의 마음을 표현했을 뿐입니다, 전하.”
파벨 무리에 속한 남학생들이 말했다. 다른 학생들이 그들을 흰 눈으로 쳐다봤다.
“호위대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저녁 동안 기숙사 주변을 검문한답시고 난리던 게 그럼?”
학생들 사이의 평은 나쁜 듯했다.
나도 새벽에 소음 때문에 깬 기억이 있었다. 기숙사 앞이 갑자기 시끄러워지고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렸다.
밖에서 혈기 왕성한 귀족들이 싸우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이들의 소행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상찬을 바라지 않는다고 해서 난 “아, 그래.” 하고 대답했다. 턱을 괴고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파벨 무리는 기대감을 버리고 다른 화제를 꺼내 들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떻게 도시 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희가 곁에 있었다면 그런 위험한 일은 없었을 텐데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희 영지에서 저를 당해 낼 기사는 없었습니다, 전하. 저희 모두 한가락 하는 기사들이죠. 그렇지, 파벨?”
“어? 어, 그래.”
무리의 뒤쪽에 서 있던 파벨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는 내 뒤쪽을 곁눈질했는데, 그곳엔 알렉스가 있었다.
저 무리에서 유일하게 눈치 있는 사람이 파벨이었다고?
그가 우두머리처럼 행동할 만했다. 알렉스 같은 기사가 호위로 있는데 누가 자기 실력을 뽐내는지 모르겠다.
알렉스는 이 나라까진 모르겠고, 적어도 아카데미 내에선 따를 사람이 없는 기사였다.
에드워드 소드 마스터설은 나 혼자 세운 가설이었다. 귀족들은 알렉스가 이 나라의 젊은이들 중 가장 뛰어난 기사라고 생각했다.
파벨 무리는 눈치는 없었지만 순발력은 뛰어나서, 화제를 넘나들며 아부하는 능력이 있었다.
“물론 두 분 전하께선 저희보다 훨씬 뛰어난 기사시지만요! 그 요적들을 단매에 처단하시다니, 전 과거 영웅들의 서사시를 듣는 것 같았답니다.”
“에드워드 전하의 부상은 마음이 미어지는 일이었으나, 저희 영지에서 나는 약초를 전하께 진상할 수 있어 얼마나 마음이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아, 에드워드 전하께서는 저희 가문을 모르시겠죠. 조프리 전하, 제가 소개를 올려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파벨 무리가 운을 떼었다. 예의를 아는 귀족이라면 여기서 소개를 허락한다거나, 좀 더 마음을 써서 소개를 대신해 주었을 것이다.
이들은 만만한 왕자를 발판으로 삼아 다른 왕자에게 접근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인격적으로 에드워드에게 득 될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가문이 좋았다. 소개를 해 줘야 할까?
내키지 않는 입을 떼는데, 에드워드가 내 어깨에 몸을 붙여 왔다.
등이 굳었다.
“조프리.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무서워. 나 얼마 전에 습격당했는데.”
에드워드가 가만히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얜 왜 자꾸 이러는 걸까?
하지만 학생들의 감상은 나와 달랐다. 누군가 볼멘소리를 냈다.
“전하를 잘도 생각하고 있군. 낯선 자에게 습격받은 분이시잖아?”
“아니, 우린 그런 게…….”
“수업 시작해. 전하께서 강의도 듣지 못하시게 할 셈이야?”
파벨 무리는 학생들의 항의에 못 이겨 자리에 앉았다. 파벨이 ‘앉아, 좀.’ 하고 친구들을 재촉해서 그를 다시 보게 됐다. 로웰의 친구를 할 정도의 눈치는 가지고 있었다.
이델라는 파벨보다 훨씬 뒤, 몰려든 학생들의 후미에 서 있었다. 그녀는 까치발을 들고 내 상태를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안도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갔다.
착하다.
아니, 착하면 안 되잖아?
책상에 머리를 박자,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프리. 거기 더러워.”
책상의 먼지 좀 먹는다고 죽을 리 없었다. 에드워드와 이델라는 죽일 수 있지만.
이델라는 조프리를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공략 캐릭터였다면 호감도 하트 하나에서 두 개는 이미 채운 거 아닌가?
철학 교수가 들어왔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에드워드는 다시 달라붙었다.
교수는 나와 에드워드가 뒷자리에 앉아 있는 걸 확인하고 교탁에 책을 내려놨다.
“수업에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수업 시작 전이니 괜찮겠지요. 두 분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아카데미의 교수로서 책임을 통감하는 바이며, 두 분 전하의 관대한 조치에 감사드립니다.”
에드워드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고개만 끄덕끄덕했다.
나풀거리는 금발이 뺨을 간질였다.
교수는 그대로 수업을 시작했다. 에드워드가 자세를 고치지 않았는데도 그의 태도 불량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수마저 ‘얼마나 놀라셨으면.’ 하는 얼굴로 모른 척해서, 난 꼼짝없이 그 자세로 수업을 들어야 했다.
사람의 머리는 꽤 무거웠다.
어깨에 점점 감각이 사라졌다. 에드워드는 그냥 날 괴롭히고 싶은 거 아닌가.
가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난 어깨에 힘을 줘 봤다.
“조프리, 불편해.”
에드워드가 안 잔다는 건 확인했다.
얜 목이 안 아플까? 기사라고 목 근육을 단련할 것 같진 않은데.
교수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교탁에서 한 뭉치 종이를 품에 안았다.
“수업을 끝내기 전에 간단한 시험을 보려고 합니다. 지난 수업까지의 이해도를 확인하려는 의도일 뿐이니 마음 편히 답안을 작성해 주길 바랍니다.”
교수가 빈 종이를 앞줄의 학생들에게 넘겨줬다. 학생들이 종이를 뒤로 넘기는 동안 그는 칠판에 커다랗게 시험 문제를 썼다.
난 이게 뭔지 알고 있었다. 쪽지 시험이다.
같은 수업을 몇 번 들으면 나오는 이벤트였는데, 플레이어 캐릭터가 만점을 받으면 일회성 장학금이 나왔다. 꽤 쏠쏠한 금액이라 미니 게임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났다.
교수는 분필을 내려놓고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자리가 붙어 있는 학생들은 거리를 두고 앉아 주길 바랍니다.”
“내가 일어날게.”
난 침착하게 말했다. 에드워드의 머리를 내려놓고 싶다는 말로 안 들리도록.
에드워드가 몸을 일으켰다. 어깨가 홀가분해졌다.
“번거롭잖아. 그럴 필요 없어.”
에드워드는 꿀이라도 바른 듯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책상을 떼어 내 옆으로 옮겼다. 손 다쳐서 불편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는 한 손으로 책상을 옮기고 있었다.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닿았다가 파스스 흩어졌다. 놀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아무튼 시험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