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1화 (121/293)
  • 121.

    없는 곳에서야 나라님 욕이라도 할 수 있다. 상인에게 충성심이란 바라기 힘든 가치여서 로웰은 여러 불온한 자들을 만나 왔다. 그 자신도 충성스러운 백성이냐고 하면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건 본격적으로 위험한 얘기 아닌가. 셔벗 같은 나라였다면 공공연히 입에 올리기도 무서운 대화였다. 당장 병사들이 들이닥칠 것이다. 이 나라 병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로웰, 넌 어떻게 생각하지? 외국에서 오래 살았잖아. 이 나라 돌아가는 꼴이 어때 보이냔 말이야.”

    “그러고 보니 2왕자 전하와 친분이 있다 하지 않았나? 전하의 기사와 같은 방을 쓰고 있지?”

    “친분은 무슨. 전하께서 상인이 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셔서 가끔 이것저것 질문하시는 정도지. 무슨 친분을 쌓겠나?”

    로웰이 분위기에 맞춰 대답하자 경계하던 시선이 사라졌다.

    “그분은 정말 사업을 좋아하시더군. 진로를 잘못 잡으신 게 아닌가?”

    “돈 버는 재주를 일국의 왕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

    꽤 악의적이다. 이 무리에서는 금방 빠져나오는 게 좋겠다. 전하께 오해라도 산다면 재미없을 것이다.

    로웰은 이들이 얼마나 불온한가 생각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글깨나 읽었다는 사람들은 비판하길 좋아했다. 이 말랑말랑한 도련님들이 어디 불온 세력을 형성할 만한가…….

    그는 이들이 외부의 불온 세력과 결탁해 거리를 달리는 모습을 상상하려 했다. 불가능했다.

    로웰은 점잔 빼는 학자 부류를 여럿 알고 있었다. 그들의 단점은 하나같이 현실을 살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카데미 내에서만 영향력 있는 불평꾼들이라니. 사용처가 떠오르지 않는가.

    로웰은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내키지 않아 미뤄 둔 일이었지만, 이들이라면 왕자의 부탁을 들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2왕자 전하께선 그보다 돈 쓰는 걸 좋아하시지.”

    “흠?”

    로웰이 꺼낸 말에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관심을 보였다. 로웰은 카드를 섞고 옆자리로 넘겼다. 기숙사장이 받아 반으로 끊고 돌려서 게임이 시작됐다.

    “저번에 전하의 외유에 동행했을 때, 낙후 지역의 건물을 사시는 걸 봤어. 카페나 뭐 그런 곳이었는데 사람도 다니지 않는 지역이라 개인용으로 사용하실 건가 했지. 흔하진 않잖아? 개인 티룸을 갖는 것도 아니고 아예 건물을 사서 그런 용도로 사용하는 건 말이야.”

    로웰은 그 자신이 욕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으려고 어조를 골랐다. 하지만 내용은 욕해도 좋다는 것이어서 금방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물어뜯으리라 예상했다. 지금까지 조프리 왕자에 대해 싫은 소리를 하고 있지 않았는가?

    누군가 얼굴을 찌푸리더니 기숙사장에게 물었다.

    “낙후 지역의 건물을 사들여? 효과를 짐작할 수 있나?”

    “글쎄. 계획 발전이라도 하시려는 건가? 하지만 구획을 다듬는 것도 아니고 건물 한두 채를 박아 두는 걸로는…….”

    “야심만만하시군. 그럴 만도 한가? 이제껏 실패하신 적이 없었으니.”

    혀를 차는 어조였지만 흥미가 가득했다. 기숙사장부터 “죽었어.” 하고 카드를 엎더니 로웰에게 몸을 기울였다.

    “그 건물이 어디지? 한번 봐 두고 싶은데.”

    “가 보게?”

    “너넨 어때.”

    기숙사장이 테이블을 둘러봤다. 맞은편 남학생이 장초를 비벼 껐다.

    “카페라고?”

    “위치 기억해?”

    로웰은 너희가 가서 뭐 하게,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입을 닫았다.

    활동성 없는 엘리트들?

    이 찜찜한 기분은 뭘까.

    “아, 물론 기억하고 있지만…….”

    샌님들이 잔을 내려놓고 코트를 들었다.

    “말 나온 김에 가자. 일 있는 사람?”

    “여기 바쁜 놈이 어디 있어?”

    너구리 굴에서 학생들이 하나둘 일어났다. 로웰은 ‘뭐,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앞장설 수밖에 없었다.

    그로부터 30분 뒤 조프리 왕자가 인수한 카페는 대량의 손님을 맞이했다.

    * * *

    늘 해 오던 방식이라는 건 몸에 편한 방식이다. 목표를 정하고 계획을 세우지 않으면 사람은 자신의 몸이 편한 대로 생활한다.

    내 경우 매일 아침 어떻게 하면 강의실에서 에드워드와 마주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하는 게 그랬다.

    양치를 하다가 거울을 봤다. 조프리 비스코티 2왕자는 게임에서 내가 본 것과 흡사한 얼굴로 성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흡사하다는 건 내 생각일 뿐이어서 실은 조금쯤은 인상이 변했을지도 모르겠다.

    오 년도 더 전에 한 게임의 일러스트를 정확히 기억할 순 없었다. 다정한 느낌의 캐릭터가 여주인공을 위로해서 ‘이런 캐릭터구나’ 생각했던 인상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내가 아는 조프리와, 내가 아는 에드워드. 그 결말을 바꾸겠다고 나는 조프리가 열한 살일 때부터 생각해 왔다.

    처음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땐 에드워드의 마음을 얻어서 그가 날 해치지 못하게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어디선가 들었다. 나이를 먹으면 겁이 많아지고 현실적으로 변한다고.

    이번에 내 목표는 덜 원대해져서, 에드워드에게 이용 가치를 증명해서 살아남겠다는 데까지 작아졌다.

    입안의 거품을 뱉어 냈다.

    ‘다시 잘 지내고 싶어. 어릴 적처럼.’

    ‘널 보고 싶지 않아.’

    양 뺨을 짝 때리자, 얼굴이 붉어졌다.

    에드워드는 우리가 어릴 적에 어땠는지 기억 못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친밀했던 적이 있다면, 그건 내가 노력해서였다.

    에드워드는 손을 내민 적 없다. 유연호가 말했다. 공략 캐릭터는 먼저 호감도 이벤트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호감도를 올리고 싶다면, 플레이어가 행동해야 한다.

    여기서 문제는 조프리도 공략 캐릭터라는 거지만.

    알렉스를 대동하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하루를 일찍 시작한 학생들이 조프리에게 말을 걸려고 했다. 그들을 거절하고 405호 앞에 섰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알렉.”

    내가 손을 내밀자, 알렉스는 영문을 모르고 그 위에 손을 올렸다. 난 그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405호 문을 두드리고 잠시 기다렸다. 긴장했지만,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에드워드?”

    “…….”

    “에드워드. 안에 없어?”

    문이 갑자기 열려서 코를 찧을 뻔했다. 알렉스가 나를 뒤로 당겼다.

    눈만 들어 에드워드를 쳐다보자, 한쪽으로 뻗친 금발이 보였다. 한동안 말끔하게 꾸민 모습만 보다가 헝클어진 모습을 보니 익숙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얼굴을 마구 문지르더니 바로 섰다. 푸른 눈이 깜빡거렸다.

    “조프리?”

    “내가 너무 일찍 왔어?”

    “아니.”

    에드워드의 눈이 내 얼굴 위에서 미끄러졌다. 금방이라도 ‘네가 왜 여기에 있어?’라고 물을 것 같은 얼굴로, 에드워드는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

    그는 ‘어쩐 일이야’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고마워. 룸메이트는 아침 일찍 나갔나 봐.”

    “아니, 난 룸메이트가 없어.”

    특별 대우인가? 물어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나를 올려다봤다. 잠이 덜 깬 듯 멍한 얼굴이었다. 그의 시선이 계속 나를 따라다녀서, 날벌레가 얼굴에 붙은 듯 신경이 산란했다.

    “날 보러 왔어?”

    그가 물었다.

    어렸을 때 내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 기억하려고 했다. 착하게 굴려고 했던 것 같긴 한데.

    “수업 준비 도와주려고. 손 때문에 불편하잖아.”

    “응, 맞아.”

    “씻는 건 괜찮았어?”

    “불편하고 힘들었어.”

    “아카데미에 부탁해 볼까? 네 손이 나을 때까지만 시종이나 하인을 한 명 들이게 해 달라고.”

    “그런 특권을 나만 누릴 순 없지.”

    에드워드가 나보다 더 착하게 말했다.

    2인실을 혼자 쓰는 건 뭔데? 역시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단추가 두 개 풀린 셔츠를 입은 채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친 손은 검은 하의를 입은 다리 위에 올라가서 흰 붕대가 눈에 띄었다.

    간병 이벤트, 라는 말이 떠올랐다. 에드워드는 법칙을 모를 것이다.

    진짜 조프리는 왕비님의 착한 아들, 도트의 좋은 주인이었을지 모른다. 왕비님의 기대와 도트의 믿음을 이용하진 않는 사람이었을지도.

    여주인공은 이용하려고 접근했지만.

    난 아니었다. 처음부터 에드워드를 공략하겠다고 생각했고 거의 성공할 뻔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좀 더 나은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하고. 하지만 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모두 이기적이다. 자신이 편한 쪽으로 생각하고, 최후에는 자신만을 위한 선택을 한다.

    변명이다.

    사람이 모두 그렇진 않다. 내가 그럴 뿐이다.

    난 내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에드워드가 날 이용한다면, 그러기 위해 내 접근을 허용한다면, 내 행동을 받아 준다면…….

    다시 호감도 작업을 할 수 있다.

    난 이런 생각이나 하게 된다.

    “도와줄까? 힘들어 보이는데.”

    에드워드는 한 손으로 불편하게 셔츠 단추를 풀고 있었다. 난 태연한 척 물었다.

    심장이 부풀고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들었다.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줄래? 네 호위 기사는 등 돌리고 있게 해. 부끄러우니까.”

    “알렉.”

    알렉스는 잠시 망설이다 몸을 돌렸다. 에드워드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에드워드의 호감도를 올리려면, 알렉스는 떼어 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알렉스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전부터 한결같이 그랬다. 내게 목숨을 걸 용기가 생기면 혹시 모르겠다. 알렉스를 떼어 놓을지도.

    지금은 아니었다.

    “단추만 풀면 돼?”

    “응.”

    에드워드 앞에 서자, 그는 목을 드러낸 채 얌전히 기다렸다. 예민하고 순종적인 생물 같았다. 거대한 초식 동물. 말 같은 게 떠올랐다.

    난 에드워드의 셔츠 단추를 위에서부터 쭉 풀고 옷장에서 교복을 꺼내 왔다.

    “파이 공작이나 그레이에게 부탁해 보는 건 어때? 가문의 주치의를 보내 달라고.”

    아카데미의 의사를 믿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에드워드는 열의 없이 대답했다.

    “그것도 좋겠네.”

    그는 교복 셔츠를 팔에 꿰더니 다리를 벌리고 앉아 물었다.

    “바지도 갈아입혀 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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