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20화 (120/293)
  • 120.

    바움쿠헨 백작은 아들에게 경고했다.

    “전하께 네가 달라붙으면 어떡하냐? 전하께서 널 필요로 하시게 만들어야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대체!”

    “농담이다. 난 농담도 못 하냐? 아까도 잡아먹으려 하더라? 전하 앞에서 그 극존칭은 뭐고?”

    백작이 투덜거렸다.

    “전하께 자꾸 이상한 말씀 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애들은 제가 혼자 큰 줄 안다더니.”

    “뭐라고요?”

    “흠. 아무것도 아니야.”

    바움쿠헨 백작은 헛기침을 했다. 아이는 알렉스밖에 길러 본 적 없지만, 주변 기사와 병사들에게 듣기로 애들은 원래 그렇다는 모양이었다.

    오랜만에 본 왕자 전하가 알렉스를 대하는 게 편해 보여서 백작도 흐뭇해졌다. 알렉스의 목표는 이루어진 셈이다.

    아들에게 편지로 전하를 따라 아카데미에 가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잘 지내리란 짐작은 했다. 그러나 바움쿠헨 백작이 병사들을 이끌고 아카데미로 내려온 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뭐 그런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습격은 어떻게 된 거냐?”

    “제 불찰입니다.”

    “그런 말을 들으려던 게 아니야. 네가 붙어 있는데 어떻게 전하께 접근하는 사람을 알아채지 못했지?”

    알렉스는 삐딱하던 자세를 바로잡고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전하께 다가서는 사람은 그 수가 셀 수 없이 많아 아첨하는 무리인지 수상한 자인지 바로 구별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직도?”

    “예?”

    “아직도 그러더냐? 에드워드 전하 주변은?”

    “사람이 많다고 하긴 어렵습니다.”

    백작은 턱을 쓰다듬었다. 에드워드는 영웅이다. 영웅 소리 듣는 왕자에게 사람이 붙질 않아? 보통 일이 아니다.

    알렉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가 아들을 너무 중앙 정계와 떨어뜨려 키운 탓인가?

    아니, 아이가 앞뒤 없이 꽉 막히고 맹목적인 성격인 건 그의 탓이 아니었다. 너무 어려서 조프리 왕자 같은 사람을 만나 버렸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전하는 알고 계셨군.”

    “뭘 말입니까?”

    “누군가 노리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단 뜻이다. 살아남은 습격자는 없고, 어느 쪽을 노린 습격인지 아직 몰라. 하지만 에드워드 전하는 알고 있었어. 무슨 뜻인 것 같으냐?”

    “모르겠습니다.”

    백작은 사람은 각자 잘하는 걸 하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자기 아들이 못하는 일을 아예 안 하려 드는 데는 할 말이 없었다.

    “에드워드 전하께선 습격받으리란 걸 알고 계셨다는 거다.”

    “어떻게요?”

    “내가 알겠냐?”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런 점은 또 훌륭했다. 알렉스는 충직한 기사여서 맡은 바는 잘 해냈다. 내가 아이를 또 잘 키웠지.

    “왕자 전하 곁을 지켜야지.”

    “그럴 겁니다.”

    “에드워드 전하를 경계해.”

    “예.”

    “수도에 갔더니 재상이 바쁘더군. 좋은 예감은 안 들어.”

    “주의하겠습니다.”

    알렉스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기사다운 태도다. 백작은 그를 희한하게 보다가 물었다.

    “그 말투는 전하 취향이냐?”

    “스승님!”

    알렉스가 바움쿠헨 백작과 헤어져 기숙사로 돌아온 때는 한밤중이었다. 예상보다 이야기가 길어진 데다 술도 많이 마셨다. 그가 일어나려 할 때마다 백작이 붙잡아서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는 복도에서 멈춰서 옷깃을 쥐었다. 킁킁 냄새를 맡아 봤지만 몸에서 나는 냄새는 스스로 알기 힘들었다.

    왕자 전하께 저녁이면 들어오겠다고 말씀드렸다. 돌아왔다고 말씀드려야 한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알렉스는 306호의 문을 두드렸다.

    조프리 왕자는 경계심 없이 문을 열었다가, 알렉스를 보고 당황했다.

    “알렉?”

    다른 사람을 기다리셨던 것 같다. 알렉스는 가슴 위를 문질렀다.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의 침대가 비어 있었다. 그는 자주 방을 비웠고 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재상이 바쁘다던 스승님의 말이 떠올랐다. 그레이 크래커는 뭘 하고 있는 걸까. 어차피 안 들어올 거면 이 방에 알렉스가 들어와 살아도 되는 거 아닌가?

    첫날 전하께서 모르시게 협상했어야 했는데. 알렉스가 어리석었다.

    “알렉, 취했어? 경은 애한테 얼마나 술을 먹인 거야?”

    “아닙니다, 전하.”

    ‘바움쿠헨 경’은 이제 스승님이 아니다. 알렉스였다.

    왕자는 종종 호칭을 혼동했으나 알렉스는 지적하지 않았다. 언젠가 그를 ‘바움쿠헨 경’이라고 불러 주셨으면 한다고는 생각했지만.

    “들어올래?”

    “예, 전하.”

    “들어와서 자고 갈래?”

    왕자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였다.

    “예, 전하.”

    “진짜 취한 것 같은데.”

    “아닙니다, 전하.”

    혼잣말에도 대답하자, 왕자는 흠 하고 웃었다.

    “이래서 나랑 사교 행사는 갈 수 있겠어?”

    “사교 행사?”

    “응. 아카데미 외부 행사인데.”

    “이런 시기에 위험하지 않을까요.”

    바움쿠헨 백작의 경고가 떠올랐다. 사람을 조심하라고.

    사교 행사에는 사람이 모인다.

    “네가 있는데?”

    바움쿠헨 백작의 경고는 알렉스의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예, 전하. 전하께서 안전히 다녀오실 수 있도록 수행하겠습니다.”

    “아니, 너도 참여해야지. 일단 무도회고, 연회복도 입어야 하고.”

    “예?”

    왕자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춤도 춰야지. 바움쿠헨 백작이 사교춤은 가르쳐 줬어?”

    알렉스는 눈만 깜빡였다. 사교춤이라면 왈츠 같은 건가? 그와는 관계없는 귀족들 유흥이었다.

    그 모습을 본 왕자가 결정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벽에 붙어 있자.”

    “다른 분들과 춤추실 겁니까?”

    알렉스는 물었다. 저를 두고, 라는 말이 어째서인지 떠올랐지만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너 춤 못 춘다며.”

    “제가 출 수 있다면…….”

    “각자 파트너가 필요하겠지?”

    알렉스는 조급해졌다.

    “위험합니다. 전하 곁에서 떨어질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도 주의하시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충심으로 말했다. 낯선 사람이 왕자의 손을 잡고 서로의 숨이 느껴질 거리에서 한참 붙어 있게 하다니, 그런 위험한 짓을 할 순 없었다.

    “거기 다 신분이 알려진 귀족인데? 아니, 이번 습격의 목표가 나도 아니었고…….”

    “습격자의 목표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방심하셔선 안 됩니다.”

    “에드워드랑 대화하는 거 들었잖아.”

    “그분을 믿으십니까?”

    알렉스는 의문이었다. 두 왕자의 대화를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다.

    그러나 조프리 왕자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 듯했다. 알렉스의 말에 따르면 대화가 끝날 거라고 생각한 듯, 그가 순순히 말했다.

    “알았어. 아무랑도 춤추지 않고 네 곁에 있을게.”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었지만.

    알렉스는 왕자가 그렇게 대답할 줄 알고 있었다. 상대가 강하게 원하면, 왕자는 물러난다.

    습격의 배후가 밝혀질 때까지 알렉스가 왕자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주장하면, 이 방에서 머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전하께서 다시 한번 물어봐 주신다면.

    아니. 그가 요청한다면…….

    그때 문이 열리고 그레이 크래커가 돌아왔다. 그는 알렉스를 보더니 인상부터 썼다.

    “전하의 기사가 이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죠?”

    “아, 알렉은 금방 나갈 거야.”

    “전 바움쿠헨 경이 언제 나갈지를 묻지 않았어요, 전하. 방에 손님을 부를 땐 서로의 허락을 받기로 하지 않았나요? 기숙사에서 애인을 만나는 건 교칙에도 어긋나는데요.”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이 버릇없게 굴었다. 왕자는 “아니라니까. 내가 미안해.” 하고 소공작을 달래며 알렉스의 팔을 잡았다.

    “알렉. 내일 봐. 무도회에서 다른 사람이랑 춤 안 출 테니까…….”

    그레이 크래커가 왕자 뒤에서 팔짱을 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이었다.

    그가 어려서부터 왕자들의 공부 친구였다는 사실은 유명했다. 알렉스와 비교도 되지 않을 깊은 관계다.

    그가 있는데 알렉스가 침실에 남아 왕자를 지키겠다고 말하면, 왕자는 ‘네가 왜?’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런 말을 듣는 거야 별일 아니었지만.

    “예. 내일 모시러 오겠습니다.”

    왕자가 칭찬하듯 알렉스의 팔을 툭툭 두드렸다.

    “잘 자.”

    “예, 전하.”

    그레이 크래커가 문을 닫았다. 그러면서 그는 알렉스를 힐끗 쳐다봤다.

    힐난하는 눈빛이었다. 예전에 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 포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그를 바라보던 궁인들의 표정과 같았다.

    알렉스가 격에 맞지 않는 짓을 하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알렉스는 스스로를 되돌아봤다.

    그의 욕심이 정말 왕자 전하를 위한 것인가?

    알렉스는 주먹 쥔 손을 문에서 뗐다. 복도는 조용했다. 문 너머 대화 소리는 희미한 잡음으로만 들렸다.

    그는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방으로 돌아갔다.

    * * *

    로웰 몽블랑은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사교 모임에 그는 첫날부터 참석하고 있었다.

    파벨은 초대받지 못했다. 이 모임에 외국인은 참석할 수 없다. 로웰은 남자 기숙사장의 소개로 들어왔는데 그와 연결되기까지도 또 몇 개의 줄을 통했다.

    날 때부터 귀족 사회에 줄을 갖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라도 해야 한다. 로웰은 융화되기 쉬운 성격이어서 금방 모임의 주축에 끼어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이 모임의 사람들이 서로 은밀한 눈빛을 주고받거나 말조심하는 분위기는 적당히 모른 척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귀족들이 저들끼리 비밀을 갖고 결속력을 강화하는 건 어느 나라에나 있는 일이다.

    그 비밀이란 것도 대개는 별일 아니었다. 파벨의 무리처럼 범죄를 공유하는 일도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에 들면 로웰도 언제고 듣게 될 것이다.

    로웰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동경하는 태도로 대했다. 선배를 존경하는 하급생처럼.

    이때 관심을 보이고 감탄해야 할 점은 그들의 가문이나 재산이 아니다. 그들의 재지였다.

    이 테이블의 젊은이들은 우수한 학생이었고 아카데미 내에서 가문의 세력과 관계없이 스스로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자들이었다. 가문은 평범했고 기숙사장 정도나 알아줄 만했다.

    이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가문을 알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있거나.

    왕자 습격 사건은 모임의 참석자들에게도 화제였다. 누가 왕위 계승자를 노리는지, 냉정한 태도로 이야기하던 학생들은 밤이 깊어지고 술이 들어가자 입이 풀렸다.

    “애초에 전대에서부터 과욕을 부렸지. 국경 도시의 지배권을 왕이 가져갔을 때부터 혼란은 예기되어 있었어. 어떤 귀족이 자신의 사병을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경으로 차출하길 원하겠어?”

    “지금 영주들의 반발이 문제라는 거야? 아니겠지, 문제는 그들 주머니로 들어간 돈이야. 왕이 사병을 빌리는 대가로 국고는 텅 비었고 그를 채우기 위해 세금은 더욱 올라가지 않았나?”

    “왕자들을 습격한 세력이 정말 세력이겠나? 왕자가 돈을 푼다고? 언 발에 오줌 누기야. 근본적인 변화는 끌어낼 수 없어.”

    “그 말이 옳아. 선심성 공사? 그게 왕자가 할 일인가?”

    “몇 년이나 가겠어. 기껏해야 왕위 경쟁이 끝날 때까지 몇 년…….”

    로웰은 술이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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