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9화 (119/293)
  • 119.

    며칠 뒤 왕국 병사들이 추가 경비로 파견됐다. 에드워드의 습격은 게임 속에서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지나간 사건이라, 난 이렇게 일이 커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나와 에드워드는 추가 병력이 올 때까지 수업을 듣지 못했다. 보호 명목으로 각자 기숙사 방에 칩거해야 했다. 답답한 시간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아카데미 내에서 병사들의 번쩍이는 갑옷을 보는 게 더는 어렵지 않았다.

    그들을 통솔해 온 기사는 내게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물론 알렉스에게 더 익숙한 사람일 거였다.

    “아버지?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오, 전하 앞이라고 깍듯하게 굴기로 결심한 거냐?”

    바움쿠헨 백작이 물었다. 그는 전쟁의 뒷수습 때문에 국경에 남아 있다가 최근 수도로 귀환한 참이었다.

    귀환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왜 여기서 얼굴을 보는지 모르겠다. 왕성은 막 일 끝난 사람 부려 먹는 게 취미일까?

    “전하, 키가 크셨군요? 이거 내년엔 저랑 눈높이가 비슷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바움쿠헨 백작이 씩 웃었다.

    “신 바움쿠헨, 복귀했습니다.”

    날 알렉스로 아는 걸까? 일 년에 한 뼘씩 자라게. 저만한 속도로 클 자신은 없었다.

    “경, 휴식은 취한 거야? 국경에서 오래 고생한 사람에게 왕성 인심이 박하네.”

    “아. 이번 일은 제가 자원한 겁니다. 전하께서 습격당하셨는데 가만있을 수 있어야죠. 뛰어난 무예 솜씨로 적들을 물리치셨다는 소식은 들었습니다만, 정말 괜찮으십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걱정하거나 웃거나 하나만 해 줬으면 좋겠다. 바움쿠헨 백작은 약간 히죽거리고 있었다.

    내 무예 솜씨라는 것의 정체를 그는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활약이냐는 거겠지.

    저래 봬도 그는 나를 걱정해서 여기까지 왔다. 난 그의 표정을 지적하진 않았다.

    “무슨 일이랄 것도 없어. 나한테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그대가 병력 통솔자야? 언제까지 머물지?”

    바움쿠헨 백작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아카데미 경비를 맡길까? 보통은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왕비님은 이미 전적이 있었다.

    “아니요. 왕자 전하의 안위만 확인하고 전 영지로 내려갑니다. 책임자는 따로 뭐 지시받을 일이 있다던데요. 며칠 뒤에나 도착할 겁니다.”

    난 감탄했다.

    “경, 정말 안 해도 될 일을 맡은 거네.”

    “감동하셨습니까?”

    그 말만 없었어도 할 뻔했다.

    “별일 아닙니다. 이 녀석이 아카데미에서 어떻게 지내나도 구경하고 싶었으니까요. 아카데미라니, 흠.”

    바움쿠헨 백작이 알렉스를 보며 묘하게 웃었다.

    “공부는 잘 하고 있냐? 아주 얼굴이 폈구먼. 좋냐?”

    “예.”

    알렉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흠. 청춘이구먼.”

    바움쿠헨 백작이 놀렸다.

    “예. 아카데미에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바움쿠헨 백작이 나를 돌아봤다.

    “애가 크니까 놀리는 맛이 없네요.”

    놀리려고 키웠나?

    “그대가 더 애 같군.”

    “전하께서 애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아십니까? 어릴 적에도 아이답지 않던 분이.”

    “좋은 분을 스승으로 둔 덕분에 좀 알고 있지.”

    바움쿠헨 백작을 빤히 보자 그는 “영광입니다, 전하.” 하고 대답했다.

    백작은 우리를 도시 내에 임시로 설치한 지휘 본부로 안내했다.

    그는 왕자가 습격당했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국경의 분위기는 수도보다 불온해서, 분쟁이 잦을 때는 엄청났다는 모양이었다.

    왕국의 사령관은 행정관 역할도 맡아야 했다. 국경에서 백작은 여러모로 부담이 컸을 것이다.

    현재는 전쟁에서 승리해 백성 모두가 들떠 있으나, 한번 생긴 불만이란 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백작의 생각이었다.

    “한번 불만을 품은 자들입니다. 앞으로 온전한 충정을 보일 거란 건 순진한 기대 아닙니까?”

    백작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뜻밖의 말이었다.

    “충분한 여유가 있다면 백성들의 충정도 흔들리지 않을걸. 결국 나라의 가난이 문제 아니야?”

    무심코 반박하자 백작은 미소 지었다.

    “예, 물론 그렇습니다. 불만을 잠재우는 게 위정자들의 몫이죠. 그걸 모르는 분이 계시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게 누군데?”

    “절 왕족 모독죄로 처넣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비님을 말하는 건가?

    “폐하께서 펄펄 뛰시지 뭡니까? 정신 빠진 경비병들을 잡아 가두지 않고 뭐 하냐고요. 이게 아카데미 경비병만의 문제겠습니까?”

    약속도 안 했는데 백작은 술술 말했다.

    불온하기는 백작도 만만치 않았으나 이곳에 있는 사람은 백작과 그 아들뿐이었다.

    알렉스는 백작의 말에는 관심 없는 듯했다. 그가 내가 앉을 의자를 빼 주는 모습을 보고 백작은 눈썹을 올렸다.

    난 좀 억울했는데, 알렉스에게 내 시중을 들라고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스는 도트의 부탁을 받았다며 내 시중을 들고 있었다. 난 말리지 않았다.

    옆에서 보면 같은 학생을 호위 겸 시종으로 부려 먹는 왕자 같겠지. 그렇게 소문나는 건 내게 좋은 일이었다.

    알렉스의 보호자 앞에서 그를 부려 먹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제 아들이 전하께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것 같군요.”

    백작이 말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난 알렉스에게 편하게 있으라고 눈짓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다.

    “물을 떠올까요, 전하? 목이 마르십니까?”

    바움쿠헨 백작을 못 보겠다.

    “아니, 괜찮아. 좀 앉는 게 어때?”

    “예, 전하. 의자를 가져오겠습니다.”

    알렉스는 나가려고 했다.

    지휘 본부의 내실은 임시 시설답게 비품이 부족했다. 의자는 지휘관용으로 보이는 것 하나밖에 없었다.

    이런 방으로 안내한 바움쿠헨 백작의 잘못 아닌가?

    “아냐, 괜찮아. 우리 나갈까? 여기가 아니라도 대화할 만한 곳은 있을 텐데.”

    “모시겠습니다.”

    알렉스가 대답했다.

    “나만 나가도 괜찮고. 국경을 떠나고 부자가 처음 만나는 거잖아. 회포를 풀고 싶을 텐데.”

    “배려 감사합니다, 전하. 하지만 괜찮습니다. 이런 시기에 전하를 혼자 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냥 제발 쉬면 안 돼?”

    “예? 전하?”

    알렉스가 당황했다.

    백작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왜 저러는 걸까?

    내가 알렉스를 너무 부려 먹고 있었나?

    나를 호위하는 게 알렉스의 업무라면, 알렉스는 아카데미에 머무는 시간이 곧 근무 시간인 셈이었다.

    내가 휴일 없는 무임금 노동을 알렉스에게 시키고 있었다고?

    “전하. 오늘 저녁쯤은 제 아들을 제게 양보해 주시는 게 어떻습니까? 저는 오랜만에 부자의 정을 나누고 싶은데요.”

    바움쿠헨 백작이 히죽거리며 말했다.

    “물론이지. 둘이 오붓하게 식사하고 와. 경, 금방 내려가야 하나? 일정이 바쁘지 않다면 여기 며칠 머물면서 알렉스에게 도시 안내라도 받는 게 어때? 앞으로 알렉스가 몇 년 지낼 곳이잖아.”

    “관대하신 처사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전하.”

    “예? 싫습니다.”

    알렉스가 질색했다.

    “며칠이나 떨어져 지내면 전하의 호위는 누가 합니까? 싫습니다, 전하.”

    그만해. 내가 널 엄청나게 부려 먹고 있는 것 같잖아! 사실이지만!

    바움쿠헨 백작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어서 동화에 나오는 고양이처럼 보였다.

    “알렉스가 전하께 정말로, 몹시 도움이 되는 것 같군요.”

    “늘 도움이 되고 있지.”

    “여러 방면에서요, 전하.”

    “응. 그래.”

    돌려서 욕하는 걸까?

    “전하께서 기대하신 만큼 좋은 기사가 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거기에는 제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전하. 제 입으로 말씀드리긴 뭐하지만, 이 녀석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모자람 없는 실력 좋고 충성스러운 기사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자람 없는 정도가 아니라 왕국 제일이지.”

    “제 말이 그 말이었습니다, 전하. 소중히 대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 알았어.”

    잡일 시키지 말아야겠다.

    “스승님!”

    알렉스의 얼굴이 붉었다.

    “스승님이라니, 아버지라고 불러야지.”

    “아무튼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무슨 말은? 네 행복을 빌어 주고 있잖아?”

    “제가 알아서 할 거거든요! 스승님은 이만 가세요!”

    “기사다운 말투는 어디 갔냐?”

    알렉스는 켕기는 듯 나를 보더니 “스승님은요!” 하고 바움쿠헨 백작을 문으로 밀쳤다.

    이곳에서 외부인은 나였다. 내가 나가야 하지 않나?

    아무튼 바움쿠헨 백작을 쫓아낸 알렉스는 아버지와 대화를 하겠다며 따라 나갔다.

    난 집무실에 혼자 남았다. 사장실 의자처럼 생긴 거창한 의자에 앉아 등을 젖히고 서류를 넘겼다.

    도시의 제반 사항이 적힌, 아무래도 기밀 서류인 것 같은 물건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었다.

    이런 데 외부인을 막 두고 가도 되는 건가?

    바움쿠헨 백작과 알렉스는 한참 뒤에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전하. 아버지는 내일 아침에 떠나신다고 합니다.”

    “좀 더 쉬지 않아도 돼?”

    바움쿠헨 백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눈치가 있습니다, 전하. 환영받지 못하는 자리에 오래 남아 있는 거 아닙니다. 아이들에겐 사춘기라는 게 있다는 모양이니까요.”

    바움쿠헨 백작이 사춘기에 더 가까워 보였지만 난 말하지 않았다. 누구와 달리 예의를 아는 사람이니까.

    알렉스는 죄송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와 식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오랜 시간은 아닐 겁니다.”

    “물론이지. 오래여도 상관없어. 좋은 시간 보내고 와. 기숙사장에겐 내가 말해 둘 테니까 아예 내일 백작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건 어때?”

    “저녁만 먹고 돌아오겠습니다.”

    알렉스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 * *

    알렉스와 떠나기 전, 바움쿠헨 백작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에 손을 넣어 뭔가를 꺼냈다.

    ‘전하께 이걸 전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요.’

    편지 봉투였다.

    왕비님은 바움쿠헨 백작에게 경비 병력 통솔을 맡기는 대신 편지 배달을 부탁했던 모양이다.

    내가 사과하자 백작은 ‘뭐 그 마음을 이해 못 할 바도 아니니까요.’ 하고 산뜻하게 나왔다. 별일이었다.

    둘과 헤어지고 기숙사로 돌아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편지를 펼쳤다.

    -정말 무사한 건가요?

    -내가 왕자의 말을 믿어도 되나요?

    -왕자를 믿을게요. 대신 왕자의 소식을 들을 수 있게 해 줘요. 왕자가 참석해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자리를 알아봤어요. 내게 무사한 모습을 확인시켜 주겠어요?

    왕비님이 왕성에서 출발하지 않았다는 건 희소식이었지만.

    수십 개의 초대장이 후드득 떨어졌다. 이 근방에서 개최되는 사교 행사 초대장이었다.

    아, 이걸 원거리에서?

    왕비님의 정보력은 굉장했다.

    원래 조프리가 이걸 다 참여했다면, 사교가 타이틀을 얻을 만했다.

    초대장을 앞뒤로 살펴봤다.

    조프리 왕자 앞으로 온 초대였다. 신분 높은 누군가를 초대하는 행사에는 보통 함께 부르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초대하고 싶은 목표물과 친분이 있는 다른 사람.

    예를 들어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 같은 인물.

    그레이라도 있는 편이 낫지 않을까? 행사 참여 여부를 묻기 위해 밤까지 그레이를 기다렸다.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은 방에 붙어 있더니 다시 도서관을 집 삼은 모양이었다.

    별수 없었다. 다른 사람을 데려가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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