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8화 (118/293)
  • 118.

    그레이 크래커는 에드워드의 뒤에 서서 경비대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카데미 도시의 경비대장은 수염이 성성한 나이 든 남자였다.

    별다른 사건이 없었대도 이 남자가 오를 수 있는 직책은 경비대장까지였을 것이다. 그는 중앙에 끈이 없는 기사 가문 출신이었고 경비대장에 오른 것도 도시 귀족들의 이권 때문이었다.

    운이 좋은 남자였던 셈이다. 그 운도 이번 사건으로 끝이어서 그는 이미 거취가 정해졌다.

    왕과 왕비는 마음 맞는 부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비대장을 갈아 버리는 데는 한마음 한뜻이었다. 경비대장은 자신의 미래를 알면서도 에드워드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건의 당사자인 에드워드는 경비대장에게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경비대장 자신이 병사들을 잡으면 잡았을 것이다.

    그레이는 그가 부하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렸을지 궁금하지 않았다. 수도에서 왕의 병사들이 내려올 것이다. 자리가 몇 비었더라도 대신할 인력은 차고 넘쳤다.

    그레이는 오래도록 아카데미를 관리해 온 학식 있는 귀족들이 왕에게 충성한다고 믿지 않았다. 아카데미 도시는 왕의 소유다. 이곳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으나, 왕은 강한 주인이 아니었다. 병사들의 기강은 해이할 대로 해이했다.

    “전하께선 바쁜 분이시다. 보고를 올려라, 경비대장.”

    그레이가 말했다. 경비대장은 그레이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의 복식과 말투로 고위 귀족의 자제라는 것은 눈치챘다.

    “전하께 직접 고하고 싶습니다. 공자께서는 물러나 주십시오.”

    “건방진 소리 마라.”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께 반드시 직접 고해야만 합니다. 공자께서 사안의 중대함을 아신다면 저를 이리 핍박하지 않으실 겁니다.”

    경비대장이 눈을 들었다.

    “그 자존심을 하루만 일찍 보여 줘도 좋았을 뻔했군. 습격자들이 전하의 안전을 위협할 때도 털끝 하나 보이지 않던 자들을 어찌 믿으란 말이냐?”

    “그 죄를 갚고자 합니다. 전하.”

    경비대장은 젊은 공자를 상대해선 씨알도 안 먹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에드워드에게 직접 고변하자 그레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에드워드는 붕대 감은 손을 감상하듯 쳐다보다가 물었다.

    “보고할 게 있다?”

    “예, 전하. 그렇습니다. 밖으로 알려져선 안 될 사안인 듯하여 제가 직접 보고드리러 왔습니다.”

    “소공작이 들어선 안 될 정도의 내용이라면 병사들부터 물리는 게 순서겠군. 내보내.”

    에드워드가 명령하자, 아카데미의 하인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병사들을 붙잡았다.

    경비병들은 힘을 주어 버텼으나 상대는 왕자였다. 그들은 버티는 척하다 물러났다. 경비대장은 홀로 남았다.

    “너희들도 나가. 그레이. 어떻게 할래?”

    하인들까지 내보낸 에드워드가 물었다.

    “나갈까요? 어차피 저도 알아야 하잖아요.”

    “두 번 일하긴 귀찮지. 네가 들어.”

    “예, 전하.”

    그레이는 경비대장 앞에 섰다. 경비대장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어 긴장을 떨쳐 냈다. 어쩌면 이 보고가 그를 자리에 붙여 놓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반대일지도 모르지만.

    아카데미에 재학 중인 소공작이라면 재상의 외아들뿐이었다. 경비대장은 미래의 공작이 그를 가축이나 돌멩이라도 되는 것처럼 무표정하게 쳐다본다고 느꼈다.

    “말씀 올리겠습니다. 습격자들이 타고 온 마차를 추적해, 그자들이 마차를 빌린 대여소를 알아냈습니다. 대여소에서 일하던 하인이 말하기를, 그자들이 서로를 ‘경’이라고 호칭했다고 합니다. 기사 서임을 받았거나 혹은 기사 행세를 할 수 있을 만한 집안의 자식들일지도 모릅니다. 수사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단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경비대장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크래커 소공작이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에드워드 1왕자 전하가 “놀라운데.” 하고 칭찬했다.

    경비대장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기도 전에 쓰러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에드워드가 그레이에게 물었다.

    “신기할 정도로 일 처리가 허술하지 않아?”

    “예. 유감스럽네요.”

    그레이는 한 걸음 물러섰다. 그의 발치까지 피가 튀었다.

    어차피 제거될 자였지만, 눈앞에서 죽는 모습은 보기에 기껍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검을 수납했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조프리가 죽을 일은 없을 것 같네.”

    “전 잘 모르겠는데요. 전하께서 손을 다쳐 오셨잖아요.”

    “걸어 볼 만한 희생이었어. 어때?”

    에드워드가 손을 들어 보였다. 어설프게 붕대를 감은 손이 올라와서 그레이는 쳐다봤다. 뭘 자랑하는 거지?

    “손이 두 배가 되셨네요.”

    “조프리가 묶어 줬어.”

    “영광의 상처네요.”

    그레이는 말을 바꿨다.

    “얼마나 끄는 게 좋을까?”

    “뭘요?”

    “병자를 돌보는 건 귀찮은 일이잖아. 동정심 많은 사람도 금방 죄책감이 희석되지 않겠어?”

    그레이는 질렸다. 에드워드의 새 작전은 얼핏 생각해도 조프리에게 효과적일 만한 방법이었는데, 그는 그마저도 믿지 않았다.

    감정은 오래가지 않고 변덕스럽다. 에드워드는 조프리 왕자의 성품을 믿었으나 조프리 자체를 신뢰하진 않았다.

    에드워드에 비하면 그레이 자신은 인류애가 넘치는 편이 아닐까. 그는 조프리 왕자가 아직도 에드워드에게 거대한 부채감을 느낀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가 굳이 환기시킬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레이는 신중하게 말했다.

    “조프리 전하는 꽤 길게 가실 것 같은데요.”

    “좋아. 2주로 하자.”

    에드워드가 고개를 까딱였다.

    “훌륭한 결정이세요.”

    그레이는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그게 긴 건가 싶었지만. 조프리 왕자가 다치지 않았는지, 소문대로 무사한지는 묻지 않았다.

    방에 돌아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급해할 필요 없었다. 그레이는 하인들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발걸음이 빨라져서 기숙사 앞에 다다랐을 땐 거의 뛰고 있었다.

    어리석게 굴지 말자. 그레이는 의복을 단정히 하고 잠금장치를 풀었다.

    “전하.”

    기숙사엔 아무도 없었다.

    아니, 전날 습격당한 사람이 숙소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어딜 간 거야?

    * * *

    기숙사의 우편물은 오후에 도착한다. 우편물이 도착하면 개별 학생의 방으로 올려다 주는 서비스 같은 건 없었고, 대충 1층 관리실에 모아 둔 뒤 저녁까지 해당 학생이 안 가져가면 기숙사장이 한 마디 하는 식이었다.

    반대로 학생이 편지나 소포를 부치기 위해서는 아카데미 밖으로 나가야 했다.

    편지는 저녁에 보낼 생각이었다. 며칠째 아카데미 관계자들과 경비병들을 만나느라 수업도 듣지 못했다.

    저녁쯤 짬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카데미를 나서기도 전에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기숙사장이었다.

    “전하, 휴식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전하 앞으로 편지가 왔다고 합니다.”

    “가져다주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기숙사장은 난처한 듯 말했다.

    “아니요, 전하. 밖에 심부름꾼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하를 꼭 뵙고 편지를 전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려서 잡아 두고 있습니다. 인장은 가지고 있었습니다만, 혹 불순한 자일까 하여…….”

    “내가 볼게.”

    알렉스를 대동하고 아카데미 정문까지 나갔다. 경비소에서 기다리던 심부름꾼이 벌떡 일어났다. 궁에서 일하는 하인이었다. 얼굴이 눈에 익었다.

    “아시는 자입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난 심부름꾼에게 다가갔다.

    “전하, 무사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왕비님께서 전하를 몹시 걱정하셔서 잠도 못 주무시고 계십니다.”

    젊은 심부름꾼이 편지를 건넸다. 그가 전한 말은 모두 예상 가능한 소식이었는데도 난 새삼스러웠다.

    죄책감이 들었다. 당연히 왕비님은 걱정하시겠지. 몰랐던 사실이 아니니까 나도 편지를 보내려 했던 게 아닌가.

    하지만 내가 편지를 부치기도 전에 왕성에서 심부름꾼이 와 버렸다.

    전달받은 봉투는 두 통이었다. 보낸 사람은 왕비님과 도트였다.

    왕비님의 편지는 얇았고 도트의 봉투는 뭐가 들었는지 두툼했다. 난 왕비님의 편지부터 펼쳐 봤다.

    -왕자를 만나러 아카데미로 가겠어요.

    아니, 이건 아니지.

    식은땀이 흘렀다.

    왕비님은 그 외의 말은 적지 않았다. 날씨가 어떻고 근황이 어떤지, 혹은 내가 무사한지 건강한지조차 묻지 않았다.

    저 말을 전달하는 게 왕비님께는 중요했던 것 같다.

    진심이신가?

    진심이겠지. 왕비님의 행차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아카데미 관계자들이 전부 비상근무에 들어갈 사건인 데다, 실제로 왕비님맞이 특별 행사가 열릴 가능성이 컸다.

    아카데미로 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부터 길을 정비하고 안전을 점검해야 할 텐데 이런 얘기를 ‘가겠어요’로 끝내신다고?

    어떤 모습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초췌한 얼굴로 한 손에 붕대를 감은 에드워드가 왕비님 환영 행사에 학생 대표로 참여하고, 왕비님은 그 앞에서 웃는 모습이.

    아니, 이건 진짜 아니지.

    “잠깐 기다려 줘.”

    “어디 가십니까, 전하?”

    심부름꾼이 놀라 물었다.

    “지금 답장하게.”

    “혹시 편지지가 필요하신 거라면 제게 있습니다.”

    “왜 그런 걸 가지고 다녀?”

    “왕비님께서 전하의 편지를 몹시 기다리고 계셔서…….”

    죄책감만 가중되는 답변이 돌아왔다.

    난 편지지를 받아서 최대한 설득력 있게 왕비님이 아카데미에 오시면 안 되는 이유를 적었다.

    한 페이지쯤 쓰다 보니 이걸로 왕비님이 설득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뭔가, 이런 거 말고 좀 더 확실한 게…….

    난 새 편지지를 꺼냈다. 거기에 나는 멀쩡하고 안 아프며, 왕비님이 이런 일로 아카데미에 오시면 내가 아주 부끄러울 거라는 말을 썼다.

    조프리 왕자는 어머니 치마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덜떨어진 인간이라는 소문이 돌 거다. 그러면 왕비님이 원망스러울지도 모른다. 아카데미 평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느냐, 내가 얼마나 평판 관리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 또 공부는…….

    설득될까?

    편지를 봉했다.

    사실 왕비님의 편지는 통보였고 이미 출발하신 건 아니겠지.

    찜찜한 마음으로 도트의 편지 봉투를 잘랐다.

    그 안에는 하나의 편지만 들어 있지 않았다. 봉투를 기울이자 안에서 무언가 툭툭 떨어졌는데 연고와 의료용 테이프와 사탕이었다.

    무슨 조합일까?

    도트는 왕성의 모든 사람이 조프리가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받았으며, 조프리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모든 사람’이란 건 도트 하나겠지만.

    도트가 걱정할 줄 알았다.

    난 원래 도트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고 새로 답장을 썼다.

    무사하고 건강하니 걱정할 필요 없다고.

    사탕은 껍질을 까서 입에 넣고, 하나는 알렉스에게 먹였다. 도트가 보내온 다른 물품을 살펴봤다.

    ‘아주 효과 좋은 연고’. 이건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아카데미에서 파는 연고군요.”

    알렉스가 사탕을 문 채 말했다.

    게임 아이템 아닌가? 여주인공이 다쳤을 때 공략 캐릭터 누가 선물했던 것 같다.

    도트가 이걸 어디서 얻었지?

    쳐다본다고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도트의 편지에 ‘연고 고마워. 어디서 샀어?’라고 추신을 적었다.

    두 통의 편지를 심부름꾼에게 건네고 당부했다.

    “최대한 빨리 왕성으로 돌아갈 수 있어? 지친 사람에게 이런 부탁은 미안하지만, 조금만 힘내 줘.”

    “저 같은 것을 걱정해 주시다니 당치 않습니다. 말을 채찍질해 반드시 오늘 안에 도착하겠습니다.”

    난 부탁하는 사람이 마땅히 지참해야 할 금화를 편지와 함께 넘겼다. 심부름꾼은 편지와 주머니를 품에 넣고 모자를 벗었다.

    젊다고는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어린 얼굴이 드러났다.

    “전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정말로 다행이에요. 전하께서 건강한 모습을 제 두 눈으로 볼 수 있어서요. 궁으로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면 모두 기뻐할 겁니다. 언제나 축복이 함께하시길. 전하께서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는 다시 모자를 쓰고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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