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7화 (117/293)
  • 117.

    24. 아주 희미한 빛

    알렉스 바움쿠헨은 새벽에 눈을 떴다. 조프리 왕자는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셔츠는 배 위로 올라갔는데 이불은 다리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알렉스는 왕자의 배 위로 이불을 끌어 올려 덮었다.

    새벽에 왕자는 두 번쯤 깼다. 그가 일어나서 알렉스의 존재를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는 걸 느꼈다.

    가는 숨이 가슴팍에 닿아서 알렉스는 숨을 내쉴 수도 들이쉴 수도 없었다.

    왕자는 금방 다시 잠들었다. 왕자와 한 침상에서 잘 때 알렉스는 푹 잠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건 아주 어릴 적, 왕자의 손에 끌려가 그의 침대에 누웠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동이 트지 않은 시각이었다. 알렉스는 간단히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머리맡에 둔 검을 허리에 차고 침대 옆에 섰다.

    왕자는 그레이 크래커 소공작이 들어오기 전에 나가면 아무도 알렉스가 이곳에서 잠들었단 사실을 모를 거라고 말했다.

    왕자 전하는 알렉스와 같은 침상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신다.

    숨겨야 하는 건 당연했다. 전하의 명에 누가 될 일이다. 이미 전하의 시종이 경고한 바 있었다. 알렉스는 경고를 기억하고 있었지만, 전날 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왕자의 침대에 누웠다.

    변명이라면 있었다. 왕자는 습격당했고 불안정한 상태였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주군을 홀로 두는 건 기사가 할 일이 아니다.

    문을 닫자 이중 잠금장치가 철컥철컥 돌아갔다. 알렉스는 문을 당겨 단단히 닫힌 걸 확인했다.

    그는 새벽 운동을 위해 일찍 일어나는 일이 잦았다. 학생들의 기상 시간이 이르지 않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일엔 예외가 있기 마련이었다. 알렉스는 등 뒤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어느 방에선가 문이 닫혔다. 다른 사람을 의식해 몰래 닫은 게 명백했다. 알렉스는 문 닫은 자가 의식한 상대가 바로 자신이라고 확신했다.

    알렉스는 소리가 난 곳으로 달려가 이미 닫힌 문을 거칠게 열었다.

    “악! 뭐야!”

    경박한 얼굴의 귀족이 안에서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알렉스는 문과 벽 사이에 발을 끼워 넣고 몸을 들이밀었다. 귀족은 겁에 질려 안으로 뒷걸음질 쳤다.

    이 귀족은 전에 본 일이 있었다. 분명 전하의 곁에서 얼쩡거리던…….

    파벨레 상송?

    알렉스는 입에 검지를 댔다.

    상송이 신호를 못 알아듣고 소리를 지르려 들어서 알렉스는 직접 입을 막아야 했다. 얼굴이 틀어막히자, 상송은 몸을 버둥거렸다. 알렉스가 검날을 보였다.

    “닥쳐.”

    알렉스가 조용히 경고했다. 상송은 눈을 부릅뜬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뭘 봤지?”

    손을 풀자, 상송은 목 졸린 소리로 속삭였다.

    “아무것도…….”

    “그래. 넌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이만하면 됐을 것이다. 나가려는 알렉스를 상송이 붙잡았다.

    “이런 짓을 하고도……!”

    경박한 놈이다. 신의라곤 없다. 자신이 방금 전에 한 말도 잊는단 말인가?

    알렉스는 파벨레 상송의 목을 쥐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만 힘을 주자 상송은 반항도 하지 못했다.

    알렉스는 믿지 않았다. 상송은 겁에 질린 듯했지만, 그가 나가자마자 또 떠들어 댈 것이다. 알렉스는 좀 더 겁을 줘 보기로 했다.

    “내가 어디서 나왔지?”

    상송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고개를 저을 만큼의 힘은 있는 듯했다.

    알렉스는 상송의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손의 힘을 잠깐 풀었다.

    “아무것도 못 봤나?”

    상송이 기침했다. 그는 꿈틀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마라.”

    상송은 계속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문을 닫고 나왔다. 이번에는 그가 어디서 나왔는지 목격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알렉스는 뻣뻣한 목을 좌우로 꺾으며 방으로 돌아갔다. 로웰의 침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채워져 있었다. 술독에 빠진 로웰이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있다가 인기척에 깼다.

    “바움쿠헨? 어디 갔다 왔어?”

    목부터 맛이 갔다.

    알렉스는 말없이 경멸의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로웰은 신경 쓰지 않고 잠들었다.

    알렉스는 잠들지 않았다. 동이 트면 그는 왕자를 깨워 운동시키러 갈 것이다. 아닌가. 오늘은 쉬는 게 좋을까?

    어제 많은 일이 있었다. 전하껜 휴식이 필요했다.

    알렉스가 아는 조프리 왕자는 강한 사람이었다. 왕자가 그에게 매달려서 기쁘다는 생각을 해선 안 된다. 스승님도 그런 일은 기사가 느낄 기쁨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왕자 전하께서 그를 기사로서 의지하고 계신다는 뜻이 아닌가. 그가 기뻐해도 되는 일이 아닐까…….

    감은 눈 너머로 해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일어나 왕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노크하고 기다리자, 잠시 뒤 왕자가 문을 열었다. 그는 눈을 반쯤 감은 채 “알렉” 하고 불렀다.

    알렉스는 이 시간이 좋았다.

    * * *

    경비병들은 습격자들의 사체를 수습하고 신원을 조회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들이 도시로 들어온 경로를 파악하고 있는데 아직 확인되지 않은 듯했다.

    적어도 하루 이틀 안에 들어온 자들은 아니었다. 습격 대상이 왕자인 줄 모르고 강도질을 하려던 잡범이 아니라는 건 경비병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습격자들의 품에선 신분 패가 발견되지 않았다. 난 그들이 군인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군기가 잔뜩 든 경비병들은 내가 허락만 하면 바닥에 머리를 찧을 기세였다.

    너무도 끔찍한 일이 일어났으며 왕자 전하께 죄송하고 송구스럽고, 죽을죄를 지었다는 말을 몇 번 들었는지 모르겠다.

    “맞아, 위험했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대들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은데. 내가 그대들을 베어 버리면 이 도시는 안전해지는 건가?”

    고장 난 레코드처럼 반복되는 말을 막자, 경비병들은 그제야 대비책을 보고했다.

    아카데미 도시의 경비는 더욱 철저해질 예정이었다.

    병사들은 2교대를 하면서 밤낮으로 도시를 지키고, 동시에 두 시간마다 순찰도 돌 거라고 했다.

    내가 안 죽여 준다고 스스로 수명을 깎아 내려는 걸까? 산 사람이 못할 스케줄이라는 건 알겠다.

    “경비대장은?”

    경비대원들이 머뭇거렸다.

    “같이 오지 않았어? 조사 중인가?”

    “죄송합니다, 전하. 경비대장님은 에드워드 전하께 가 계십니다.”

    내가 놀랐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왕자는 두 명이다. 조프리는 특별 취급 받아 왔지만, 에드워드가 돌아온 뒤로 상황은 달라졌다.

    두 왕자 중에서 침입자를 잡는 일에 대해 보고해야 한다면, 그 대상은 물론 에드워드였다.

    “알려 줘서 고마워. 경비에 대해서는 에드워드와 논의하는 게 좋겠다. 나보다 나을 거야. 내 증언은 여기까지야. 도움이 못 돼서 미안해.”

    “아닙니다, 전하.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경비대원들은 송구스러워하며 물러갔다.

    경비대원들을 만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니, 306호 문 앞에 무언가 놓여 있었다. 구급 키트였다. 게임에서도 나온 듯한 평범한 아이템으로, 아카데미 내 상점에서 구매할 수 있는 물품이었다.

    웬 키트?

    누가 까먹고 간 건가? 이상한 걸 놓고 다니는 사람이다.

    옆으로 치워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한참 뒤에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복도를 내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장난친 건가?

    왕자가 되고 처음 당해 보는 장난이었다. 아카데미 학생들은 생각보다 간이 큰지도 모르겠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학생은 강의를 듣고 있을 시간대였다.

    그렇다고 아무런 변화가 없는 건 아니어서, 아까 그 구급 키트 위에 쪽지가 붙어 있었다.

    조프리 왕자님께. 사용해 주세요. -마음을 담아

    단순한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폭발물일까?

    기숙사 외부 쓰레기통에 키트를 버리고 쪽지는 종이함에 분리수거했다.

    저기라면 터져도 사람이 다치진 않을 것이다.

    손을 털고 방으로 돌아갔다. 마주치는 학생들마다 ‘조프리 전하’ 하고 놀라서, 이제야말로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이 습격은 이벤트였지만 학생들에겐 사건이었다.

    왕비님과 도트에게도 그럴 것이다.

    난 책상에 앉아 전에 사 둔 편지지를 꺼냈다. 왕비님에게 할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저는 무사해요.’ 그 한 마디밖에.

    가끔 왕비님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다면, 이라고 생각했다.

    조프리를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하셨을 수많은 일이 없었더라면. 상황이 지금처럼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궁금했다. 진짜 조프리라면 왕비님을 원망했을까?

    적어도 미워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왕비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살았다. 내가 왕비님을 원망해선 안 된다.

    그건 내가 조프리라고 불리는 한 지켜야 하는 선이었다.

    도트에게, 라고 첫 줄을 썼다.

    -잘 지내? 난 네가 없어서 불편한 점이 많아. 이미 소식 들었겠지만, 늦게라도 안부를 전할게. 이번 습격 사건에 대해선 걱정할 필요 없어. 난 다치지 않았으니까. 에드워드는 좀 안 좋아. 사실, 꽤 안 좋아. (……) 궁금한 점이 있어. 왕비님이 최근 만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야? 알아볼 수 있어? 힘들면 괜찮아. 단순한 궁금증이니까. (……) 답장 기다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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