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4화 (114/293)
  • 114.

    “너 취했어?”

    “아닐걸. 술 한잔 마시지 않고 취하는 사람도 있어?”

    에드워드는 잔을 내 앞에 놨다. 의자에 앉은 채라 그를 피할 공간이 없었다.

    귀족들은 왜 남의 시중을 필요로 하는 걸까? 시종이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목이 달아날 텐데.

    “뭔가 부탁해 봐. 들어줄 수 있잖아.”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바라는 게 있지만.

    “넌 못 들어줄걸.”

    “뭔데?”

    난 고개를 저었다.

    에드워드가 미소를 지웠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할게. 말해 봐.”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이미 난 여러 번 물었지만 에드워드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면 뭘 하고 싶어?”

    나한테 더 바라는 게 있어?

    에드워드의 눈이 커졌다.

    “그것만 대답하면 돼?”

    “응.”

    “……디저트를 먹으러 갈까?”

    “디저트.”

    한숨이 나왔다. 에드워드가 말을 바꿨다.

    “거리를 구경할래?”

    “거리 구경. 또?”

    “시장을 보러 가는 건 어때? 좋아하잖아.”

    “다 하려면 하루가 모자라겠네.”

    “갈 거야?”

    그가 내 눈을 들여다봤다.

    “더 원하는 거 없어?”

    “더 있으면?”

    “얘기해.”

    “난 네가 뭘 원하는지 물었는데.”

    에드워드가 중얼거렸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었다.

    “네가 나랑 뭘 하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

    “몰랐어?”

    에드워드가 놀라서 난 되레 당황했다.

    “이미 말한 줄 알았는데. 너랑 다시 친해지고 싶어. 어릴 적처럼. 우리 그때 좋았잖아.”

    너 뭐라고 했냐?

    에드워드가 말을 붙여서 뭐라고 더 대답했던 것 같긴 한데, 그 대화는 기억에 없었다. 살면서 저렇게 어이없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에드워드는 어렸을 때도 안 하던 다정한 짓을 해서 나를 챙기려 들었고 그래서 식사 내내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용인들은 여러 번 오가며 디저트를 내왔다. 코스에 예정되어 있던 메뉴는 아니었다. 디저트만 세 접시가 나와서 식사를 마쳤을 땐 배가 꽉 차 있었다.

    “저희의 약소한 마음입니다, 전하.”

    사용인들이 수줍어하며 나가자, 에드워드는 제삼자처럼 논평했다.

    “일하는 사람들에게 존경받는구나, 조프리.”

    아니었지만 대꾸할 기운도 없었다.

    “고마워.”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에드워드는 따사롭게 말했다.

    그가 계산하러 나간 동안 지배인은 저번에 못 한 정원 구경을 권했다.

    연못은 내 궁에 만들어 놓은 것보다 화려하다는 느낌이었다. 모양이 기묘하고 색이 다채로운 돌로 장식되어 있어서 조형을 잘 모르는 나조차 아름답다고 느꼈다.

    잉어 밥을 주던 어린 사용인이 나를 보고 고개를 숙이고는 자리를 비켰다. 사용인은 떠나기 전에 수줍게 물어 왔다.

    “전하, 금방 또 이곳을 찾아 주실 거죠? 다음번 식당을 찾아 주시면 더 좋은 방을 비워 두겠습니다. 미리 연락 주시면 셔벗의 특제 디저트를 얼려 둘 수 있을 거예요. 가까운 시일 내에 꼭 다시 찾아 주세요.”

    “응, 고마워.”

    그 뒤로 몇 명의 사용인이 정원에 들러 내게 인사하고 갔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고마워하고 있었는데 난 결국 그 이유를 알아냈다.

    파벨은 이곳에서 유명한 진상 손님인 듯했다.

    그가 너무 짜증스레 군 나머지 내가 파벨과 그 귀족 무리를 이곳에 데려왔다는 사실은 잊혀서, 난 외국 귀족에 맞서 사용인들을 보호한 왕자가 됐다. 알렉스가 사용인들의 말에 하나하나 기뻐하고 있어서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파벨레 상송은 조프리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자가 다음번에 찾아오면 손님으로 받지 마.”

    “예? 하오나 저희가 어찌…….”

    “내 이름 팔아. 다음에 또 무례하게 굴면, 정말 그래도 돼.”

    사용인은 웃으며 물러갔다. 그는 정원 입구에 서 있던 에드워드에게도 고개 숙여 인사하며 지나쳤다.

    에드워드가 얼마나 그곳에 있었는지 모른다. 난 쭈그려 앉은 다리를 폈다. 연못을 보고 있던 알렉스도 일어나서 뒤를 따랐다.

    “왜 안 부르고 있었어?”

    에드워드는 온화한 얼굴로 그냥, 하고 대답하더니 물었다.

    “돌아갈까?”

    레스토랑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이 길을 걸어 들어올 때와 달리 인적이 드물어서, 우리가 거리를 세놓은 기분이었다.

    뒤에서부터 다가온 소음이 내 옆으로 지나갔다. 4인승 대여 마차였다.

    “조심하십시오.”

    알렉스가 나를 길가로 당겼다. 에드워드가 말했다.

    “안쪽으로 와.”

    머릿속에 구슬처럼 흩어져 있던 이상한 행동이 하나로 꿰어지면서 에드워드의 행동이 설명됐다.

    에드워드는 ‘조프리와 다시 친해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한 줄은 알고 있을까?

    그런 노력이라면 나도 경험이 있었다. 상대의 호감을 사고 싶은 사람은 그 상대를 노려보지 않는다.

    난 에드워드와 알렉스 사이에서 걷고 있었다. 중립적인 위치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몸을 알렉스에게 좀 더 붙였을 때였다.

    양옆의 두 사람이 일제히 검을 빼 들었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를 들은 건 그 다음이었다.

    꺾이는 길에서 세 사람이 튀어나왔다. 난 뒤를 돌아봤다. 소리 없이 다가온 두 명이 퇴로를 막고 있었다.

    앞뒤로 둘러싸였다.

    “전하! 제 곁으로!”

    알렉스가 외쳤다.

    습격자 중 하나가 내게 달려들었다. ‘전하’라고 부른 게 잘한 짓일까? 아무튼 그 호칭은 습격을 막지 못했다.

    알렉스가 습격자를 막아 냈다. 그러나 한 손이 세 명을 막아 낼 순 없어서 누군가는 내가 상대해야 했다.

    검을 뽑고 습격자와 대치했다. 단련된 힘을 느끼자마자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한 강도가 아니다. 우리는 치안 좋은 아카데미 도시에서 불운한 일을 당한 게 아니라, 정확히 우리를 노리고 온 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검을 다루는 방식에서 상대가 훈련받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바움쿠헨 백작은 군을 통솔하던 사람이었다. 군대에서는, 하며 젠체하던 말투가 떠올랐다.

    이 사람은 군에서 훈련받았다.

    습격의 목적은…….

    억눌린 비명이 들렸다. 뒤다. 에드워드?

    신경이 흐트러졌다. 습격자가 성큼 다가왔다. 크로스가드로 검날을 막았다. 힘이 밀렸다.

    검을 맞부딪힌 채 뒤로 몇 걸음을 물러났다. 온몸에 과부하가 걸리고, 등이 흠뻑 젖었다. 발에 무언가 걸려서, 뒷걸음질 치다 넘어질 뻔했다.

    시야에 희끄무레한 게 비쳤다. 신발 밑창에 닿은 물컹한 감촉.

    시체다.

    솜털이 곤두섰다. 정신없이 얼굴을 확인했다. 에드워드와 알렉스는 아니다.

    에드워드가 상대하던 사람이 하나로 줄어 있었다.

    뒤이어 알렉스가 찌른 습격자가 나무토막처럼 쓰러졌다. 비명도 없이 상대를 절명시키고, 알렉스는 남은 습격자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배후를 말해라.”

    찔린 습격자는 입에서 거품을 내고 있었다. 컥컥대는 신음이 들렸다.

    알렉스가 귀를 기울였다.

    습격자는 피를 토하고 고꾸라졌다.

    알렉스가 당황했다.

    죽으라고 찔러 놓고 뭘 바란 거야?

    알렉스는 나를 도우러 다가오고 있었다. 그가 내 상대 역시 죽여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물러서던 반동으로 상대를 뒤로 밀쳤다.

    상대가 한 걸음 물러나자마자 접근해, 일부러 날을 부딪혔다. 상대는 힘 싸움으로 받으려 했다. 나도 그게 기사의 방식이라고 배웠다.

    난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악!”

    검끝을 턱에 대자, 상대는 움직이지 못했다.

    바움쿠헨 백작은 군을 통솔했지만, 나한테 가르친 건 체계적이고 그럴듯한 훈련이 아니었다.

    그는 몇 번 나를 굴려 보더니 “뭐, 전하께서 검술 대회에 나가실 일은 없을 테니까요.” 하고는 개싸움을 가르쳤다.

    ‘전하께서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게 가장 상책이고, 만약 위험해졌다면 바로 도망치는 게 중책이고, 가장 하책이 전하께서 검을 들어 스스로를 보호하는 겁니다.’

    ‘기사들이 자신의 일을 하게 두라는 거지?’

    ‘예. 그겁니다.’

    ‘난 검술에 재능이 없나?’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군요.’

    왕자는 살아남아서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게 최고의 전술이라는 것이다.

    바움쿠헨 백작은 내 실력을 신뢰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난 첫 실전에서 백작이 좋은 스승이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손이 떨렸다. 실은 손만이 아니라 온몸이 떨렸다. 상대에게 들켜선 안 된다.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했지만, 상대도 떨고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검 끝이 흔들려서 상대의 목을 파고들 것 같았다. 이 상황이 길어지면 틀림없이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떨지 마. 누가 보냈어?”

    “내, 내, 내가, 말할 것…….”

    “쉿. 목소리 낮춰. 죽이고 싶지 않아.”

    상대가 목울대를 움직였다. 가슴을 헐떡이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어두운 시야에 그의 흰자위만 비쳤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있었지만, 확연히 겁에 질려 있었다.

    “이 얼굴 못 알아보겠어?”

    조프리 왕자의 외모는 유명하지 않다. 검은 머리는 갈색 머리만큼은 아니지만 흔해 빠졌다.

    하지만 습격자를 보낸 게 내가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대를 보냈어?”

    왕비님이야?

    두 명의 왕자가 습격당했다. 귀족들이 모여 있는 아카데미 도시는 불온한 자들에게 군침 도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의 방비도 삼엄했고 치안도 철저히 관리했다. 학생들이 늦게까지 거리를 쏘다닐 수 있는 건 도시의 치안 덕분이었다.

    왕자 두 명이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외부인에 대한 경계는 전보다 더 심해졌다.

    이런 상황에 누가 습격자를 보낼 수 있을까?

    “아는 걸 말해. 다른 사람의 이름을 팔아 네 목숨을 사는 거야. 저승보단 이승이 나을걸. 장담해.”

    상대의 눈이 떨렸다. 난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확연히 느껴지게 떨고 있었다.

    하나만 확인하면 된다. 왕비님인지 아닌지.

    습격자의 몸이 흔들렸다.

    “전하!”

    알렉스가 나를 부축했다. 내가 검을 대고 있던 상대는 눈을 부릅뜬 채 죽었다. 그는 상황을 모르고 의아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 채로 절명했다.

    검은 그의 뒷목을 관통해 앞으로 빠져나왔다. 난 에드워드가 그의 목에서 검을 빼내는 걸 봤다.

    멍해져서 에드워드를 올려다보자, 그는 “아” 하더니 소매로 얼굴을 닦았다. 식지 않은 피는 약간의 자국만을 남기고 말끔히 사라졌다.

    “괜찮아, 조프리? 다치진 않았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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