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3화 (113/293)
  • 113.

    낮부터 술집을 전전하는 학생 겸 주정뱅이들은 초저녁이 되자 알딸딸해져서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카페 문이 열릴 때마다 작은 종소리가 들렸다. 거리의 조명이 반짝였다.

    내가 인산인해를 좋아했던가?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에드워드와 말 한 마디 없이 걸어도, 거리가 시끄러워서 위화감은 없었다.

    사람들은 본능에 따라, 우리를 지나칠 때마다 잊지 않고 에드워드를 돌아봤다. 대화를 나누던 일행들이 갑자기 조용해지고, 무례함도 잊고 에드워드를 응시한다.

    가는 길마다 목격자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누구야?’

    ‘에드워드 전하.’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거리를 차지한 건 대부분 아카데미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입학식에서 목격한 에드워드를 기억하고 있었다.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 이상으로 매력적인 신분이기도 했다.

    난 그들 중 몇 명이 홀린 듯 따라와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예전에 파벨 무리가 조프리를 따라왔듯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 시간대 거리에 나온 학생들은 점잖고 훌륭한 품성을 가진, 다른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난 왕이 될 왕자쯤 되는 사람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자유를 좀 박탈당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학생들은 예의를 지켰다.

    파벨은 어떻게 된 걸까. 저녁 먹으러 나오지 않았나? 하이에나처럼 이 근처를 기웃거리며 내 행방을 찾는 줄 알았더니. 필요할 땐 보이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나를 힐끗 쳐다봤다.

    “뭘 찾는 거야?”

    “아무것도.”

    “가게? 사람?”

    에드워드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 아니다. 어릴 적 그는 조프리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언제 들어가려나 생각하고 있었어.”

    “배고파?”

    난 고개만 끄덕였다. 신경이 곤두서서 배고픈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다.

    에드워드는 “다 왔어. 이쪽이야.” 하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척 봐도 사람 없는 골목이었다. 현실에서라면 숨겨진 맛집이라도 있나 싶겠지만.

    갑자기 게임 속 장면이 떠올랐다.

    엔딩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사랑을 이룬 여주인공 앞에 어두운 얼굴의 에드워드가 나타났다.

    [할 얘기가 있어.]

    [잠깐 따라와 줄 수 있어?]

    여주인공은 에드워드를 따라 인적 드문 곳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질 때까지.

    [전하? 무슨 일이세요?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조프리를 사랑하게 됐어?]

    에드워드가 묻자, 선택지가 떠올랐다.

    [-긍정한다]

    [-부정한다]

    난 에드워드가 초반 호감도 때문에 미련을 보이나 싶어서, 그 미련을 깔끔하게 끊어 주려고 했다.

    [예. 전 조프리 전하를 사랑해요.]

    선택지를 고르자, 여주인공은 죽었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

    내 착한 여주인공은 경계심 없이 에드워드를 따라가 줬지만, 난 아니다.

    “꼭 여기로 들어가야 돼?”

    “왜?”

    내가 발을 멈추자 에드워드가 뒤를 돌아봤다.

    “여긴 너무 어둡고, 사람이 없고.”

    “응.”

    에드워드는 뭐가 문제냐는 얼굴이었다.

    “난 왕자잖아.”

    “…….”

    알렉스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귀까지 화끈거렸다. 아니, 내가 너무 귀한 몸이라 뒷골목엔 행차도 못 하겠단 뜻이 아니라.

    “그렇구나, 조프리. 넌 왕자였지. 우리 고급 레스토랑으로 갈까?”

    에드워드가 따듯하게 말했다.

    “응.”

    그냥 귀한 몸 하자.

    결국 우리가 도착한 곳은 파벨이 데려간 그 레스토랑이었다.

    안내하러 나온 사용인이 나를 발견하고 쏜살같이 레스토랑 안으로 달려갔다. 레스토랑 밖을 빗자루로 쓸고 있던 사용인도, 마차를 부르던 사용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조프리 전하! 조프리 전하십니다!” 하고 레스토랑 안으로 소리쳤다.

    에드워드가 물었다.

    “여기 온 적 있어?”

    “전에 한 번. 나 아무 짓도 안 했어.”

    “그래?”

    지배인이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조프리 2왕자 전하! 다시 찾아 주시기를 저희 모두 마음 깊이 바라고 있었습니다! 저번에 대접이 부족했던 점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미리 연락 주셨으면 아침부터 준비했을 텐데요!”

    “대접이 부족했다니? 극진히 대접받은 기억밖에 없는데. 저번처럼 맛있는 식사 기대할게.”

    “그렇게 다정한 말씀을. 성은이 망극할 따름입니다.”

    성은은 왕의 은혜를 뜻하는 말이다. 한자어가 원래 좀 어렵지. 에드워드만 뒤에 없었어도 관대해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냐.”

    “예, 예, 그러겠습니다, 전하. 전하를 위한 특별한 방을 준비했습니다. 저희들의 마음이 담긴…….”

    지배인이 활짝 웃었다. 내 말 알아들은 거 맞나?

    에드워드의 시선이 뒤통수를 찌를 듯했다.

    지배인은 도통 시선을 옮겨 에드워드를 쳐다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조프리 왕자라는 어려운 손님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내 형제에게도 인사해 줘. 알고 있겠지만 이 나라를 구한 자랑스러운 영웅이야.”

    “세상에, 에드워드 전하도 함께 오셨군요! 두 분 전하를 모실 수 있다니!”

    에드워드의 초상은 워낙 유명한 데다 그의 금발은 이름표나 다름없었다.

    “에드워드 전하까지 이 누추한 식당을 찾아 주시다니, 당장 내일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조프리 전하께는 도움만 받으니, 정말이지 이 감사의 마음을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도움을 줬는데?

    지배인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두 왕자가 극찬한 레스토랑이라고 선전이라도 할 생각인가? 상관없지만, 언젠가 왕실모독죄로 잡혀갈지도 모른다.

    나가기 전에 말해 주자.

    그리고 안내받아 들어선 방은, 뭐라 할 말이 없었다.

    테이블 위엔 흰 식탁보가 펼쳐져 있고, 테이블 한가운데 촛불이 켜져 있었다. 은으로 만든 휘황찬란한 촛대 주변은 장미로 장식되어 있었다.

    쓸데없이 로맨틱했다. 방을 잘못 안내한 거 아닌가?

    사용인은 원형 테이블에 의자가 두 개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서 의자를 하나 더 가져왔다.

    나와 에드워드는 서로를 맞은편에 두고 앉았다. 의자를 든 사용인이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저, 이 의자는 어디에 두면 될까요?”

    “여기.”

    난 내 근처를 대강 가리켰다. 의자에 알렉스가 앉자, 옆에 벽을 둔 듯 든든해졌다.

    “조프리 전하, 저번 일은 정말 감사합니다.”

    사용인이 수줍게 웃으며 속삭이고 나갔다.

    뭐가?

    코스에 따라 요리가 나왔다. 메인 요리가 나올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먹기만 했다. 들어오는 사용인들마다 내게 미소를 보냈다.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수상한 느낌은 전에도 받은 적 있다.

    파이 공작과 그레이가 소문을 언급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메인 요리는 송아지 스테이크였다. 에드워드는 한 입 먹더니 깜짝 놀라서 스테이크를 내려다봤다.

    예나 지금이나 먹이는 보람이 있는 반응이었다. 음식을 대할 때 에드워드는 솔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생각해 보면 수상쩍고 비밀이 많은 것도 예전과 다를 바 없었다.

    변한 건 나뿐인지도 모른다.

    몇 가지 소스가 종지에 담겨 있었다. 그중 하나는 달았다. 에드워드가 좋아할 것 같다.

    후추와 소스를 그의 앞에 당겨 주자 에드워드의 손이 멈췄다. 그는 나를 잠깐 노려봤다. 소스를 놔준 게 화낼 만한 일인가?

    “조프리, 스테이크 썰어 줄까?”

    에드워드가 언제 노려봤냐는 듯 물었다.

    “싫어.”

    “…….”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됐지.

    반사적인 거절이었다. 에드워드와 분위기를 맞추려면 받아들여야 했는데.

    에드워드가 스테이크에 독을 뿌리진 않을 것이다. 그건 너무 노골적이고, 빤히 보이고, 범인이 확실히 드러난다. 여긴 알렉스라는 입 막기 어려운 증인도 있다.

    에드워드는 싸늘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너 나랑 좋은 분위기 내고 싶은 거 맞아? 실은 싸우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손목도 다쳤잖아.”

    에드워드가 다정한 척 말했다. 멍 든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난 셔츠 소매를 내렸다.

    “누구 덕분인데?”

    “아까는 놀라서 힘 조절을 못 했어. 미안해. 내가 책임질게.”

    입에 침이나 바르고 얘기해라.

    “괜찮아. 스테이크 써는 법은 나도 배웠어.”

    “손목 아프잖아. 아까부터 표정 굳는 거 봤어.”

    그러니까 누구 때문인데?

    절로 표정이 굳을 지경이었는데 갑자기 알렉스가 말했다.

    “저도 나이프 사용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전하.”

    “잘했어.”

    그런데?

    “저도 전하께 스테이크를 썰어 드릴 수 있습니다.”

    “…….”

    “사과를 깎아 드릴 때처럼 어설프지 않을 겁니다.”

    나도 나한테 스테이크를 썰어 줄 수 있어.

    하지만 에드워드와 알렉스가 서로를 쳐다보고 있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 줄래?”

    난 알렉스에게 접시와 나이프를 넘겨줬다. 알렉스가 아이처럼 웃었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전하.”

    스테이크는 주먹만 한 크기로 잘려서 돌아왔다.

    한입에 넣자 입안이 가득 찼다. 육즙이 씹히면서 풍미가 퍼지는데, 스테이크 조각이 커서 입안에 공간이 없었다. 입을 열면 밖으로 넘쳐흐를 것 같았다.

    알렉스는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보는 중이었다.

    “어떠십니까, 전하?”

    난 스테이크를 두 번 씹고 삼켰다.

    “맛있네. 혹시 백작한테도 이렇게 잘라 줬어?”

    “예? 스승님께 스테이크를 왜 잘라 드립니까?”

    그럼 나한텐 왜 잘라 줘?

    도트가 이상한 물을 들인 게 맞는 것 같다.

    에드워드는 턱을 괸 채 포크를 돌리고 있었다. 식사하는 바른 자세가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식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

    “시종을 보내고, 요즘 식사 시중은 기사에게 시켜?”

    그가 웃으며 물었다. 나한테 시비를 걸고 있다.

    “내가 누구한테 시중을 맡기든. 너한테 부탁한 것도 아니잖아.”

    “부탁할 거야? 난 좋아.”

    에드워드가 일어나더니 와인을 들었다. 내 잔에 따르고 옆으로 와서 섰다.

    “또 뭐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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