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11화 (111/293)

111.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은 어두웠다. 불 켜진 거리를 지나치며 알렉스를 돌아봤다.

“뭐 물어볼 거 없어?”

“예, 전하.”

로웰에게 내 목적의 일부를 얘기했다. 알렉스는 내 계획을 미리 알고 있던 사람처럼 나를 도왔지만, 실은 로웰보다도 모르고 있었다.

물어볼 게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생각이 많은 건가 싶었는데 한편으로는 아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이상한 짓 한다고 생각 안 해?”

“전하께서 이상한 일을 하실 리 없습니다.”

알렉스가 즉답했다.

“내가 뭘 해도 따라올 거야?”

“물론입니다, 전하.”

“날 그렇게 믿어?”

“예, 전하.”

바움쿠헨 경은 알렉스를 어떻게 키운 걸까?

시종 캐릭터인 도트가 조프리를 따르는 건 기본값이라지만, 알렉스의 성격은 어떻게 형성된 건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어떡하지? 믿음에 보답할 자신 없는데.

수선을 마친 옷은 아카데미로 배달해 주기로 했다. 알렉스는 기숙사실 앞까지 나를 따라와서 내가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다려’ 중인 개 같다.

난 문손잡이를 잡았다.

“가게에서 옷이 오면, 한 번씩 입는다는 선택지는 둬 봐.”

매일 똑같은 옷 입지 말고.

‘예, 전하.’라고 대답할 줄 알았던 알렉스가 이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잘 차려입은 기사를 좋아하십니까?”

“못 차려입은 것보단 낫겠지?”

“예. 전하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잘 자.”

착하다.

난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책상 위를 손으로 더듬어 초에 불을 붙였다.

착하지 않고 내 편도 아닌 그레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도서관 같은 데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에드워드의 측근인 건 어쩔 수 없는 사안이지만, 내가 들을 강의를 추측해서 에드워드에게 알려 주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이 의리가 있지.

조프리랑 그레이 사이에 의리 같은 게 있었나?

하품이 나왔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씻고 침대에 누워서 촛불을 바라봤다. 그래도 잠이 안 와서 도트가 챙겨 준 잠 오는 차를 마시고, 책상에 있던 아무 책이나 펼쳐서 읽었다.

그레이가 읽고 있던 책인 듯했다. 중간에 책갈피가 꽂혀 있었다.

그레이는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추궁당하기 싫어서 늦게 들어오는 거 아닌가? 심증이 강했지만 물증은 없었다.

차를 한 잔 더 마셨다.

뭐가 잘못된 건지 차는 떫고 맛없었다.

무시하고 잔을 비웠다. 잔의 온기가 식을 때까지 쥐고 있다가, 다시 침대 위로 돌아가 몸을 말았다.

좀 외롭다.

* * *

수업 첫 주의 두 번째 요리 수업 시간이 돌아왔다. 내가 왜 요리 수업을 두 번이나 신청했냐면, 당연히 알렉스의 성품 효과를 빨리 보고 싶어서였다.

더 빨리 보려면 평일 오전, 오후를 전부 요리로 채우면 됐다. 내가 손가락 몇 번 두드려서 게임 하는 입장이었다면 그랬겠지.

같은 수업을 매일 듣고 같은 선생님을 매일 만나는 건 왕성에서만으로 족했다.

주 2회 수업은 타협점이었지만 어리석은 선택이라는 사실이 첫 수업에서 드러났다.

에드워드 포함 세 명만 듣는 수업을 또 들어야 한다니.

그것도 선생님이 에드워드를 무서워하는 상황이었다.

여차하면 선생님이 말려 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입학식에서도 교장 선생님이 ‘아카데미의 이념은 평등한 교육 기회를 모든 인재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듯한데.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교장 선생님 훈화를 열심히 들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 부분은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달력이 넘어가기도 전에 교권이 권력에 굴복하는 상황을 지켜봐야 하다니.

나와 알렉스는 수업 시작 아슬아슬한 시간에 들어갔다. 우리가 뒷문으로 들어서서 조리대 사이를 통과하자, 에드워드가 뒤를 돌아보며 빙그레 인사했다.

난 못 본 척했다.

“여,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늘은 계란을 구운, 가정에서 쉽게 해 먹을 수 있는 요리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약간의 후추와 베이컨, 신선한 채소를 손질해 곁들여서…….”

요리 선생님이 열심히 말했다. 에드워드는 놀랍게도 수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집중하고 있었다.

반대로 선생님은 그를 외면하고 필사적으로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는데, 왜인지 알 수 없었다.

드디어 조프리가 왕자인 걸 아셨나? 에드워드에게서 벗어나게 해 줄 사람으로 보였나?

무린데.

에드워드를 외면하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는 오늘 앞머리에 뭐를 발라서 슬쩍 뒤로 넘기고 왔는데 그 때문에 반듯한 이마가 드러났다.

그래서 더 잘생겨졌단 뜻은 아니지만 주변이 좀 더 화사해지긴 했다.

손질한 머리카락의 일부가 흐트러져 눈썹을 찌르고 있어서, 그 부분에 시선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요리 선생님은 에드워드에게서 고개를 돌리면서도 이따금 견딜 수 없다는 듯 그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왜 저렇게 꾸미고 왔지?

멀쩡하게 교복 입고 있는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도 이상했지만.

저런 머리는 파티장에 나가거나 누구 잘 보일 사람이 있을 때만 하지 않나?

도트가 종종 내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 버리던 게 떠올랐다.

조프리가 했을 땐 영화에 등장하는 뻔한 귀족 소년 캐릭터로 보였는데, 원래는 에드워드 같은 효과를 내야 했던 것 같다.

에드워드에게서 눈을 돌렸다. 화구에 불을 피우고, 프라이팬을 올리고, 기름을 둘렀다.

오랜만에 요리를 했더니 손이 서툴렀다. 계란 껍데기 파편이 흰자 안에 튀었다. 흰자와 같이 익고 있었다.

알렉스의 계란은 손안에서 산산조각 나서 팔뚝을 타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에드워드는 어쩌고 있지?

그는 선생님을 빤히 보고 있었다. 계란을 깨지도 않았다.

그리고 선생님은 불을 내고 있었다.

“어? 어! 이거 왜 이래!”

화구에서 불길이 치솟아 천장까지 닿았다. 엄청난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연기가 천장을 채우고 아래로 내려왔다.

잠깐 넋을 잃었다.

행동을 개시한 건 알렉스였다. 그는 대뜸 사방의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받았다. 하지만 필요한 만큼 많은 물이 모이지 않았다.

“다들 나가요! 아니, 나부터? 문을 열어야? 다들 움직이지 않고 뭐 해요!”

선생님이 혼비백산해서 외쳤다.

그것만으론 안 된다.

“나가서 사람을 불러. 이 층엔 아무도 없어. 수업하는 강의실을 찾아.”

알렉스에게 명령했다. 알렉스는 즉시 일어나 뒷문으로 달려 나갔다.

난 그의 뒤를 따르려고 했다.

알렉스의 등이 보였다. 뒷문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선생님은 앞문을 열고 비틀거리며 빠져나갔다. 아카데미 교정을 둘러싼 안개와 비교할 수 없는 매캐한 연기가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난 에드워드에게 손목을 붙잡혔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너 뭐 하는…….”

에드워드가 재킷을 벗었다.

그가 불타는 화구에 재킷을 씌우자, 불이 꺼지고 연기가 덮였다.

마술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에드워드가 다시 손을 내밀어서 난 무심코 잡았다. 에드워드는 자기 손을 빼내더니 내 손을 그러쥐었다.

몸이 끌려갔다. 공기 중의 매캐한 연기가 눈과 코를 찔렀다. 기침이 나고 눈을 뜰 수 없었다.

창문을 열고 싶었지만 에드워드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난 숨과 함께 기침을 참았다. 잔기침이 가시자 입을 열 수 있었다.

“어떻게 껐어?”

“교복 천은 방염 처리 되어 있잖아.”

“……진짜?”

“응. 보통 모르더라.”

“왜 옷에 그런 짓을 해?”

“글쎄. 내가 만든 건 아니니까. 설계한 연금학자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

“넌 그걸 어떻게 알아?”

“안내서에 적혀 있어.”

눈을 감은 채 에드워드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차분해서 심장이 조용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싶었다.

이곳이 사고 현장 같지 않았다.

그냥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사실에 대해 에드워드에게 설명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안내서?”

“아카데미 안내서.”

그런 걸 받은 기억이 났다.

작은 사전만 한 두께였다. 그런 걸 읽는 사람은 그레이뿐일 줄 알았는데.

“진정됐어?”

에드워드가 물었다.

“창문 열어 줘.”

난 대답했다.

에드워드가 숨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가 몸을 떼고 창가로 향했다.

창문을 열자 쌀쌀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숨쉬기 한결 편해졌다.

그 와중에도 에드워드는 내 손을 놓지 않아서 나도 창가에 서게 됐다.

“손 놔도 될 것 같은데.”

“응.”

“손 아파.”

“이래도?”

에드워드가 손아귀 힘을 풀었다. 그러더니 손목을 움켜쥐었다.

잡혔던 부위가 저릿저릿했다. 손등까지 피가 통하지 않는 듯했다. 잡혀 있을 땐 몰랐다. 그가 날 잡고 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손힘이 풀리자, 틀림없이 멍들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에드워드가 어떤 힘으로 나를 잡고 있는지는 인지하지 못했다.

문제는 힘이 아니었지만.

“사람을 불러올게.”

실습실 바닥이 더러웠다. 구두에 붙은 재일까? 우리가 지나온 길을 따라 흔적이 남았다.

“부르러 두 명이나 갔잖아. 곧 돌아오겠지.”

머리 위에서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약간 웃는 듯했다.

“아니면, 보호자 없인 나랑 못 있겠어?”

“아니.”

난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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