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8화 (108/293)
  • 108.

    “전하께서 제게 투자를 맡기시고, 전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봤어요. 전하께 투자를 받은 사업가들은 각기 노예 선원들과 베테랑을 구해 상행을 꾸렸는데, 전 그들 중 대부분이 돈만 먹고 몸을 빼리라고 생각했거든요.”

    로웰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나를 힐끗 봤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이었는데?”

    “저는 전하께 일을 소개한 책임이 있으니까요. 책임지고 원래의 자리로 돌려주려고 했죠. 필요하다면 무력을 써서라도.”

    “…….”

    애초에 망할 일이었던 모양이다. 로웰은 책임감까지 있었다.

    왜 저렇게 쓸데없이 좋은 상인인 걸까?

    호구 같은 투자자를 잡으면 그냥 물고 안 놓아주면 되잖아. 왜 후속 조치까지 해 주려는 거야?

    “아무도 도망치지 않았어요. 노예들은 자신의 신분을 복원하고 가족들에게 남은 선수금을 건네줬죠. 그리고 항해에 올랐어요. 한탕 벌어 보겠다고 배를 탄 사람들은 많지만, 그렇게 선원의 규율이 잘 잡혀 있는 상행은 처음 봤어요. 오래 뱃일을 한 선원들을 끌어들인 것도 아닌데 노예들조차 준비해 왔더군요. 가진 돈이 있으니 자신을 구할 궁리를 하게 되고, 약속을 믿을 수 있으니 미래에 자신을 걸 수 있게 된 거죠. 선급금으로 그만한 거금을 아무 조건 없이 쥐여 준 사람이 성공 보수를 아낄 리 없으니까. 상행에서 돌아온 노예들은 살아 있다는 게 최고의 보수인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전하께서는 그들을 그렇게 대우하지 않으셨잖아요.”

    로웰은 어디서 생각을 정리하고 온 것 같았다.

    “상인은 돈을 다루는 직업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사람을 상대하는 게 더 큰 직업이에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백 전의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죠. 전하께서는 금화 백 전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사신 거죠. 전 전하 같은 거상을 본 적이 없어요.”

    눈이 반짝거렸다. 그는 정말 조프리에게 감탄하고 있는 듯했다.

    “로웰…… 너…… 생각이 많구나?”

    “감사합니다.”

    로웰이 상기된 얼굴로 웃었다.

    칭찬 아닌데.

    머리 회전이 빠른 애들은 이상한 점을 보면 해결하지 않곤 못 배기는 모양이다.

    그레이도 별거 아닌 일에 의미 부여하기 좋아하던데. 로웰도 감탄이 나오는 상상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니까 내가 거금을 들여 선원들의 마음을 샀다는 거지?

    조프리가 투자의 신이라는 거지?

    그럴 리가 있냐?

    이 흐름은 아주 좋지 않았다. 조프리가 왜 사람들 마음을 사야 하는데?

    “그래서……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다고 생각해?”

    로웰의 표정이 굳었다.

    “예. 알고 있어요.”

    뭘?

    나도 알려 줘.

    “전하께서는…… 왕이 되시려는 거죠?”

    “뭐?”

    뒤에서 덜컹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가 동요하고 있었다. 그의 표정이 변하더니 ‘그랬구나’ 하는 얼굴이 됐다.

    아니야!

    눈치가 귀신같은 로웰은 알렉스의 반응을 보고 아차 했다.

    “죄송합니다, 전하. 바움쿠헨에겐 이미 말씀하신 줄 알고…….”

    “아니야!”

    “죄송합니다!”

    로웰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니, 그거 말고!

    “내가 하는 짓 말이야!”

    “네, 전하.”

    “그냥 봐도 돈 낭비잖아?”

    “예?”

    “난 돈 쓰는 걸 좋아해.”

    “예?”

    로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치를 좋아한다고. 남들 돈 쓰는 데는 나도 써야 직성이 풀려.”

    “예?”

    “내 말 듣고 있는 거 맞지?”

    “예, 전하.”

    로웰이 대답했다. 납득한 것 같지 않았다.

    난 알렉스를 돌아봤다. 얘도 오해를 풀어 줘야 하나?

    알렉스가 얼굴을 굳히고 말했다.

    “전하 말씀을 안 믿는 건가?”

    그가 다시 검을 철컥거렸다. 날이 번뜩였다. 로웰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제 생각이 틀렸군요? 전하께서는 아무 계획도 없으신 거였어요. 선원들의 고용 조건을 좋게 하거나, 백성들의 마음을 사겠다는 생각은 조금도 없으셨어요. 그저 돈 쓰는 걸 좋아하실 뿐이었군요!”

    계획이라면 있지만, 그 계획은 아니었다.

    로웰을 납득시켜야 했다. 저런 끔찍한 생각이 공략 캐릭터 머리에 박혀 버리면 무슨 결과가 나올지 몰랐다.

    “응. 그래. 난 돈 낭비를 좋아해.”

    “예.”

    “그렇게 안 보여?”

    “예.”

    “…….”

    “아, 그러니까 제 말씀은, 저는 전하께서 하시는 말을 믿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러기 힘들 거라는 뜻이었어요.”

    로웰이 변명했다.

    “역시 그래? 다른 사람이 보면 쟤는 왕 되려고 수 쓰는구나 싶을까?”

    “예.”

    그래. 망한 것 같더라.

    에드워드의 시선이 떠올랐다.

    올해가 가기 전에 이 나라를 뜨는 게 어떨까?

    “전하께선 전하의 행동이 사치하는 걸로 보이길 바라시는 건가요?”

    로웰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맞아. 귀족들 이상으로 돈 쓰고 다녔다고 생각하는데. 사람 모인 장소만 골라 다녔고. 왜 소문이 안 나지? 뭐가 문제 같아?”

    “일단 전하께서 진짜 쓸데없는 데 돈을 안 쓰시는 게 문제 같은데요.”

    주기적으로 보석점을 포함해 시장을 터는 걸로는 부족했나?

    조프리 궁을 장식해 둔 돌덩이는 또 어디에 쓸모 있는 건지 모르겠다.

    하나같이 쓸모를 찾아볼 수 없는 것들뿐인데 로웰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은 다 영리해서 그것들의 쓰임새를 찾을 수 있나?

    “쓸데없는 게 뭐야? 도박?”

    그러고 보니 로웰은 유흥에도 일가견이 있었다. 주색과 도박을 하는 데 도움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음, 전하. 제가 알기로 돈 쓰는 데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충동구매라는 걸 하는데요.”

    내가 시장 나갈 때마다 하는 게 그거 같은데.

    “그런 스케일로는 안 될걸요.”

    “그럼?”

    “진짜 말도 안 되는 걸 충동구매하셔야죠.”

    “말도 안 되는 거?”

    “죄송하지만, 전하. 제가 도와 드려도 될까요?”

    로웰은 투자를 도울 때처럼 말했다.

    그는 언제나 도움이 됐다.

    “물론이지.”

    로웰은 빙긋 웃으며 일어났다. 든든하다. 그가 움직이자 소파에서 다시 먼지가 일었다.

    로웰은 기침을 하며 방 밖으로 나갔다.

    카페 주인은 잔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그가 웃으며 물었다.

    “아이고, 손님들. 이제 가십니까?”

    “‘손님’이 아니야. 이쪽은 조프리 비스코티 2왕자 전하시다. 예의를 갖춰라.”

    로웰이 명령했다.

    “예? 왕자 전하? 아니 우리 가게에 무슨 왕자 전하가…….”

    카페 주인은 알렉스의 검을 보고 웃음을 멈췄다.

    “전하! 죄송합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카페 주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자신이 무지하여 왕자 전하의 존안을 알아보지 못했고 너무도 죄스럽다는 이야기를 더듬거렸다.

    로웰은 잠시 기다렸다가 카페 주인에게 말했다.

    “일어나. 네놈의 사죄를 듣고 계실 만큼 전하께서 한가한 분이 아니시다. 긴말 필요 없겠지. 전하께서 이 카페가 마음에 드신다니, 가게를 넘겨라.”

    “예?”

    “어디서 반문이냐?”

    로웰이 깔보는 자세로 누르자 카페 주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 하오나 이 가게는 저희 가족의 유일한 밥줄인데…….”

    “생활비는 벌어?”

    궁금해서 묻자, 주인은 송구스럽다는 듯 대답했다.

    “제 능력이 부족해 운영비가 더 나가는 형편이지만…….”

    그럼 사업을 접는 게 맞지 않나?

    “죄송합니다, 전하. 나리. 부디 한 번만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벌이 안 되는 가게라도 제 터전입니다. 저는 이곳을 빼앗기면 갈 곳도 없습니다.”

    카페 주인이 호소했다.

    로웰이 뭘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나 대신 조프리 평판을 떨궈 주려는 건가?

    이런 식으로 악명 얻다간 길거리에서 칼 맞아 죽겠는데. 에드워드가 나설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알렉스는 로웰을 쓰레기 보듯 하고 있었다.

    “시세의 두 배.”

    로웰이 말했다.

    카페 주인의 우는 소리가 뚝 끊겼다.

    “싫은가? 세 배는 어때?”

    “……!”

    “네 배?”

    주인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나도 비슷한 기분이었다.

    “아직도 부족한가? 다섯 배. 이만하면 충분한 대가가 되리라 생각하는데.”

    “나, 나리.”

    카페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몇 배까지 갈까? 나는 두근두근한 상태로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고 있었다.

    카페 주인은 욕심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계약서는 언제 작성해서 보내 드리면 될까요?”

    “지금.”

    로웰이 나를 보며 방긋 웃었다.

    * * *

    우리는 거리로 나왔다.

    나와 알렉스는 로웰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전하?”

    로웰이 불편한 듯 물었다.

    “아니. 너 사치에 재능 있구나.”

    “칭찬이시죠?”

    물론이었다. 믿음직스럽다.

    손님 한 명 없는 카페를 나는 거금에 인수했다. 구매 후 쓸모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이번 쇼핑은 돈 낭비 그 자체였다.

    건물을 충동구매하다니.

    부자는 생각하는 게 달랐다. 나처럼 왕자 몸에 들어온 일반인은 생각할 수 없는 씀씀이였다.

    로웰에게서 후광이라도 비치는 것 같았다.

    경매에 나오는 굉장한 보석이나 그림을 구매하는 게 돈은 더 드는데도, 건물 쪽이 더 큰 지출 같은 생각이 들었다.

    크기가 커서 그런가?

    “이 카페는 그렇게 비싼 매물도 아니었으니까요. 전하에 관한 소문을 내고 싶으시다면, 이런 식으로 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알 것 같아.”

    이건 성공한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