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6화 (106/293)

106.

지금까지 그레이는 노력해 왔다.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올바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훌륭한 학생인 그레이는 파이 공작에게 늘 좋은 질문을 던졌다. 파이 공작이 그에게 공부를 더 해 보라고 권유한 건 그래서였다.

그레이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사태가 왜 이렇게 됐을까.

이 총체적인 난국의 시발점은 어디인가?

왕비?

물론 왕비는 문제다. 시급하고 거대하며 강력한, 당면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레이를 가장 곤란하게 하는 건?

조프리다.

그는 알렉스 바움쿠헨과 연인 관계인가? 이델라 에클레어와의 관계는?

그에게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조프리는 왜 그런 의뭉스러운 행동을 하는 걸까?

그레이에게 뭐든 알려 줄 것처럼 말하면서, 실상 내용 없는 대답밖에 하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행적을 숨기고 이런저런 일을 벌이는 건?

차가운 난간에 이마를 대고 다시 생각해 보려고 했지만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레이는 살면서 이렇게 멍청한 상태가 되어 본 적이 없었다.

빌어먹을! 알 게 뭐야! 왕이라도 되고 싶나 보지!

그렇다면 에드워드는 조프리에게 왜 그런단 말인가?

아니, 차근차근 들어 보니 납득할 만한 계획이었지만.

그 말을 듣고 그레이는 왜 동요했지?

정말로 질문해야 하는 건 그거였다.

조프리에게 질문할 게 아니라 그레이는 스스로에게 물었어야 했다.

왜 그렇게 조프리 왕자에게 연연하냐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난간에 식힌 머리는 차가운데 그 안의 물질은 멋대로 열을 내고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런 감정은 제정신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런 감정을 느낀다고? 사랑에 빠져서 연애라는 걸 하고 희비극을 양산해 낸다고?

이런 감정이 즐거울 수 있다고?

왕족들만 해도 왕의 어리석은 사랑 때문에 불행해졌다.

그레이는 이런 감정을 원한 적이 없었다. 세간에선 원하지 않는 것을 억지로 남에게 떠넘기는 행동을 강매라고 하지 않나?

그레이는 강매당한 기분이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한 번도 감정을 애걸해 본 적 없는데 그 대가로 쓸데없는 감정을 받아 버렸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크래커 공작의 독자로 태어나 남부러울 것 없는 능력과 지위, 외모를 가지고 살아온 그레이 크래커는 이제 와서 세상의 부조리함을 탄식했다.

조프리 왕자는 잠들었을까?

취해서 그렇게나 달게 굴 정도니까, 지금쯤 꿈속이겠지.

속 편해서 좋겠다.

그레이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사실 찌르고 싶은 곳은 두개골 속 어딘가였으나 그의 두개골은 단단해서 손으로 파고들 수 없었다.

그레이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왕자가 있는 방으로 돌아간다는 생각만으로 다시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이런 멍청한.

그레이는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때렸다. 그는 평소 대화로 해결하지 않고 폭력으로 해결하려 드는 족속을 경멸했지만, 지금은 그런 인간의 기분을 이해할 것 같았다.

물론 때린다고 심장이 말을 들을 리는 없었고 가슴팍만 아팠다.

그레이는 기숙사실 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심장이 진정되면 방으로 들어갔다가 견디지 못하고 오 분 만에 나왔다.

그 과정을 몇 번 반복하다 조프리가 눈앞에 없으면 한결 낫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레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같이 기숙사를 빠져나갔다.

* * *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잠에서 깼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숙취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온몸에서 냄새가 나는 기분이었다. 입안은 더욱 찝찝했다.

술 같은 걸 왜 마시는 걸까?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나빠지기만 하는데.

단기 기억 상실에 걸리지도 않아서 어제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나 기숙사로 돌아와 잠든 과정도 멀쩡히 떠올랐다.

술 때문에 실수한 일이라면…… 그레이. 앉혀 두고 추궁했어야 했는데.

그레이는 새벽부터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회가 또 있을 것이다.

두통은 낮까지 계속됐다. 내게 인사하러 다가온 학생들이 내 얼굴을 보고 걱정하며 물러가서, 하루 종일 인상을 쓰고 다니면 사람들을 다 쫓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졌다.

그 생각은 오전 수업이 끝나고 사라졌다. 학생들은 몸 건강에 좋다는 각종 음료를 가져와서 내게 먹이려 들었다.

보양식이 대개 그렇듯 개구리 점액 같은 이상한 것들이었다. 거절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조프리는 인상을 써도 사람이 꼬였다. 왕자라는 신분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사용자의 사교성을 100쯤 올려 주는 듯했다.

조프리 왕자 주변에 사람이 많았던 건 어쩌면 조프리의 의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전하, 숙취에 좋은 음료입니다. 수업 시작되기 전에 얼른 드세요.”

책상 앞에 선 파벨이 눈을 찡긋하며 보온병을 내밀었다. 그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강의실에서 나갔다.

여긴 다들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걸까? 오늘은 같은 수업도 듣지 않으면서.

난 보온병을 알렉스에게 내밀었다. 그가 종이봉투에 보온병을 넣었다.

이로써 조프리는 열네 개의 건강 음료를 챙겼다. 다른 학생들은 파벨보다 발이 빨라서, 이미 강의실을 방문한 뒤였다.

수업 시작 5분 전까지는 강의실이 와글와글할 지경이었다.

꼭 선물을 주고 가는 게 아니라도 귀족들은 덕담도 잘했다. 조프리의 만수무강을 바라는 사람이 많았다.

정말 조프리가 오래 살길 바란다면 여길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학생들이 자기 수업을 들으러 가 버리자 강의실은 텅 비었다. 요리 수업을 듣는 세 명의 학생만 남아 있었다.

나머지 한 명은 물론 에드워드였다. 그는 기어코 기초 요리 수업까지 따라 들어와서, 학생들이 ‘어디가 아프세요, 전하’, ‘건강하셔야죠’ 하는 꼴을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에드워드가 물었다.

“이쪽으로 올래? 수업 듣기 더 좋을 텐데.”

에드워드의 자리는 교단에 가까웠다.

저번처럼 추태를 보이지 말자. 에드워드는 조프리를 친근하게 대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세 번째 수업까지 겹쳤다. 에드워드는 의도를 가지고 조프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내가 피한다고 피해지는 일이 아니다.

분위기를 맞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드워드를 상대하고, 무슨 생각인지 알아내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괜찮아.”

난 침착하게 말했다.

“거긴 너무 뒷자리 같은데. 교단이 보여?”

“생각해 줘서 고마워. 잘 보여. 선생님 들어오시는 것도 보이는데.”

“눈이 좋네.”

에드워드가 칭찬했다.

“앞을 보라는 뜻이었어.”

“…….”

아무튼, 에드워드의 상대를 꼭 지금 해야 할 필요는 없다.

“우리 학생들 모두 왔나요? 자리에 있죠? 아주 좋아요.”

강의실 문이 열리고 후덕한 인상의 강사가 들어왔다. 그는 나와 알렉스를 포함해 세 명이 참여한 수업 풍경을 보고 놀라 입을 가렸다.

“요리 수업에 세 명의 학생이 참여하다니.”

너무 적어서 충격받았나?

“제 이름은 베이커입니다. 베이커 선생님이라고 불러 주세요. 요리의 중요성을 아는 여러분, 올 한 해 복 받으실 겁니다. 이 미개한…… 아니, 조리법이 발달되지 않은 나라에서 여러분같이 훌륭한 인재를 만나다니 너무도 반갑습니다. 우리 함께 요리의 세계로 떠나 보아요.”

베이커 선생은 감동하며 말했다.

왕성에서 맛있는 거 잘 먹고 잘 자란 조프리에게는 와 닿지 않는 말이었지만, 이 나라는 조리법이 발달되지 않았다는 설정인 모양이었다.

왕의 요리사도 유학파 출신이었고, 조프리의 요리사는 아예 외국인이었다. 왕비님의 모국인 셔벗 출신이었으니까.

그래도 왕자 앞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에드워드가 왕자인 걸 모르시는 걸까?

조프리야 자선 행사에 참여하는 귀족들이나 얼굴을 아는 왕자였으나, 에드워드의 얼굴은 승전 이후 온 나라에 알려져 있었다. 조악한 초상화가 거리에서 팔리고 있었고 귀족들은 아예 화랑에 에드워드의 초상화를 모사해 걸어 놓았다.

에드워드는 세기의 미남이라 그를 그린 그림은 왕자의 초상을 넘어 하나의 예술품으로도 가치가 있었다.

게다가 그는 신입생 선서도 했다. 저 얼굴을 한 번 보고 잊기는 어려울 텐데.

요리 선생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는 공정한 시선의 소유자인 듯했다. 나와 에드워드를 공평하게 모르고 있었다.

나도 저 요리 선생님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게임 초반에 난 여주인공에게 모든 수업을 한 번씩 들어 보게 했다. 어떤 수업이 어느 능력치를 올려 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요리 수업이 올려 주는 능력치는 성품과 도덕성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 이 수업은 다시는 수강시키지 않았다.

두 능력치는 어떤 시험에서도 쓸모없었다. 여주인공의 가시적인 스펙 향상을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수업이었다. 내 여주인공은 요리 수업을 안 들어도 선량하니까 괜찮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카데미에서 이렇게나 인기 없는 수업일 줄은 몰랐는데.

강의실을 대신한 요리 실습실은 반짝거리는 조리 도구로 가득했다. 잘 관리된 최신 도구처럼 보였으나, 유독 반짝이던 건 단순히 사람의 손을 타지 않아서였나 보다.

요리 선생님은 앞치마로 눈물을 닦아 내고 앞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코에 걸쳤다.

그는 에드워드를 보더니 깜짝 놀랐다.

“에드워드 1왕자 전하?”

단순히 눈이 안 좋은 분이었나 보다.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요새 노안이 와서…….”

“그래. 주의하도록 해. 노안 탓에 목이 달아나면 얼마나 억울하겠어.”

요리 선생님은 얼어붙었다.

“죄, 죄송합니다.”

“왜, 조프리. 할 말 있어?”

에드워드가 내게 물었다.

“아니.”

난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에드워드가 저런 성격이었나?

마치 귀족들처럼 말한다고 생각했다. 에드워드는 왕자였지만.

요리 선생님은 허둥지둥 수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가라앉은 분위기에서 수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에드워드는 수업을 잘 듣고 있었으나 그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요리 선생님은 할 말을 잊어버리는 듯했다. 수업은 오 분마다 중단됐다.

비인기 수업 무섭다.

한 명이 만드는 분위기 탓에 수업 자체가 진행되지 않았다. 공기가 따끔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학생이 세 명밖에 없다는 건 큰 단점이었다.

파이 공작의 수업에서도 학생은 세 명이었지만.

그때 에드워드는 책장이나 접으며 노는 아이였지, 선생님을 접으며 노는 왕자는 아니었다.

성장해서 왕자로 인정받는 에드워드는 내가 알던 모습과 달랐다. 어쩌면 이게 에드워드의 원래 성격인지도 모른다.

이 수업은 반드시 옮기자.

알렉스는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양파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손이 크고 힘이 좋아서 껍질이 금방 벗겨졌다.

껍질을 버리고 양파를 썰며 알렉스가 코를 훌쩍였다. 눈이 매운 모양이었다.

어쨌든 열심히 하고 있다.

알렉스에게 성품 함양이란 게 정말 필요할까? 뭐든 열심히 하는 앤데.

난 아카데미 수업이 정말 능력치에 영향을 주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공략 캐릭터에게 능력치라는 게 존재하는지도.

조프리가 된 뒤 7년간 거의 매일 공부했다. 도트의 말대로 조프리는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어서 방학도 없었다.

여주인공은 일 년간 수업을 꾸준히 들은 것만으로 지력 수치가 700인지 800인지까지 무난히 올랐다.

같은 기준이 적용된다면 조프리도 성장해야 했다. 이미 열두 살에는 지력 만렙을 찍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암기력은 특별히 좋아진 것 같지 않았고 내 머리는 대단한 지략을 떠올리지도 못했다.

조프리의 능력치엔 변화가 없었다.

내 첫 번째 가설, ‘공략 캐릭터에게도 능력치가 있고 그건 성장시킬 수 있다’는 그래서 폐기됐다.

내가 세운 두 번째 가설은 ‘능력치는 아카데미에서만 올릴 수 있다’였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조프리도 성장 가능성이 있다.

조프리가 성장할 수 있다는 건 다른 공략 캐릭터들도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알렉스라든가.

지금은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수업을 듣는 셈이다.

세 번째 가설은 ‘능력치는 원작 게임이 시작되는 2학년에만 올릴 수 있다’였고, 네 번째 가설은 ‘공략 캐릭터는 능력치 따위 없다’였다.

마지막 가설은 ‘여주인공에게도 능력치는 없으며, 아카데미에서도 능력치는 올릴 수 없다’다.

왜냐하면…….

이 경우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수업이 끝나기 전까지 우리는 양파가 잔뜩 들어간 토스트를 만들어 냈다.

토스트?

이게 대체 어느 나라 음식일까? 한국?

의문이었지만 어쨌든 토스트는 맛있었다.

“전하. 제 것도 맛봐 주십시오.”

알렉스가 수줍게 권했다.

난 한 입 먹고 맛있다고 대답했다. 알렉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건강을 위해 설탕은 넣지 않았습니다. 전하께 드릴까요?”

왜 맛이 없나 했더니.

“나보고 네 간식을 빼앗아 먹으라고?”

“아닙니다, 전하.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나보단 네가 더 먹어야 하는 거 아냐? 근육량이 다르잖아. 방에 가서 건강 음료 같이 먹을래?”

“아, 그거 드실 건가요?”

알렉스가 당황했다.

“상품 같아 보이는 거 하나쯤은…….”

나중에 ‘잘 마셨어.’라고 대답할 때 양심의 가책을 안 받을 정도로는.

난 토스트 하나를 해치우고 실습실에서 나가려고 했다. 학생들보다 먼저 실습실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선생님이 있었기 때문에 시간이 약간 지체됐다.

“그럼 다음 수업 시간에 뵙겠습니다, 여러분.”

선생님이 도망치듯 사라졌다.

실습실에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조프리, 이런 거 좋아해?”

에드워드가 물었다.

‘이런 거’가 뭘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

선생님 겁주는 거?

“그럼 내 토스트 먹을래?”

아. 그거.

“아니. 됐어.”

에드워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선물이야.”

“난 선물 안 좋아해.”

“…….”

에드워드는 알렉스가 든 종이봉투를 쳐다봤다. 귀족들이 떠넘기고 간 건강 음료가 들어 있었다.

그래. 저것도 선물이긴 하지.

난 저거 안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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