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5화 (105/293)
  • 105.

    그레이는 아니었다. 그는 싫어하는 사람을 무시하면 했지 신경 써 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쓸 만한 대답은 해 줬어?”

    에드워드가 테라스를 보며 물었다. 조프리가 들어가 있는 칸에 알렉스 바움쿠헨이 들어가고 있었다.

    “뭐…… 그냥…….”

    “그냥?”

    “대답을 원하시는 게 아닌 듯해서요.”

    그레이는 변명했다.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답해 버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바움쿠헨의 덩치에 가려져 조프리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저 둘은 커튼도 다 안 닫고 뭐 하는 걸까. 남들에게 만남을 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그레이는 태평하게 생각하다가 바움쿠헨이 무릎 꿇는 걸 목격하고 말았다.

    미쳤나 봐.

    그레이는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가 웃고 있었다.

    “결국 둘이 만났네.”

    “조프리 전하는 알렉스 바움쿠헨에게 명령을 내린 사람이 본인이 아니라고 하시던데요. 주변인이 조프리 전하께 극진히 구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요.”

    내가 왜 변명해 주고 있지?

    “조프리는 그런 사람이지.”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레이는 입을 다물었다. 괜한 말을 꺼냈다고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수도로 돌아오면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물었지?”

    “예, 전하. 언제 적 편지에 답을 하시는 거예요? 아카데미에 가신다면서요.”

    주제가 바뀌어서 다행이다. 그레이는 안도했다.

    안도할 일이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잔을 들어 입을 가렸다.

    “왕비를 제거할 거야.”

    “…….”

    내가 무슨 말을 들었지?

    그레이는 동요를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왕자와 재상의 아들이 사람을 물렸기 때문에 주변에는 서버조차 없었다.

    복수는 훌륭한 명분이다.

    에드워드가 전장에 나간 건 왕비의 수작이었다. 왕비는 사냥터에서 에드워드를 충동질했다. 만약 그 자리에서 거절했더라도 에드워드는 결국 국경으로 가야 했을 것이다. 왕성에 왕비의 돈을 먹지 않은 귀족은 없다.

    에드워드와 왕비는 한 하늘 아래 살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출전한 가을, 그레이는 그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조프리의 경고는 늦었고 또 안일했다. 그 경고 때문에 에드워드는 마음을 정했다.

    에드워드가 왕비와 대적할 세력을 쌓으려 한다면, 출전 외에는 수가 없었다.

    그레이는 일단 반대했다.

    ‘너무 위험해요.’

    ‘살면서 내가 위험하지 않았던 적은 없어. 왕성은 안전해?’

    ‘전장이잖아요. 사방에 이목이 달린 왕성과 비교하신다고요? 눈먼 화살이 신분을 가릴 거라 생각 마세요.’

    ‘수백의 이목이 내 편이 아닌데 수백의 화살이 대수겠어. 그곳에선 피아 식별은 되겠지.’

    ‘이 나라 군복을 입은 병사라고 전하의 편이라는 생각은 마세요.’

    ‘적어도 끼니마다 독일까 걱정할 일은 사라지잖아. 재상에게 말해. 내가 살아 돌아오면, 왕좌의 대안으로 생각하라고.’

    ‘진심이세요?’

    ‘그래.’

    에드워드가 대답했기 때문에 재상은 그를 지원했다. 에드워드와 함께 참전한 백 명의 병사는 재상과 줄이 닿은 귀족이 보낸 것이다.

    국정을 쥐고 흔드는 외국인 왕비를 내쫓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세력을 이루고 있지 못할 뿐이다.

    그들을 규합할 만한 왕자가 나타난다면, 그 왕자가 명분까지 쥐고 있다면.

    ‘승산이 있다고 보느냐?’

    ‘고작 백 명이에요. 에드워드 왕자를 눈여겨보라고 말씀하신 분은 아버지였어요. 적은 투자로 왕자의 자질을 확인하는 겁니다.’

    에드워드는 자질을 증명했다.

    실은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벌써? 왕비 제거를 도모하겠다고?

    에드워드는 이제 이름을 알렸다. 그의 인기가 대단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왕비에게는 조프리가 있었다.

    백성들이 사랑하는 영민한 왕자, 이를 뒷받침하는 지지 세력, 지참금으로 가져온 부유한 영지. 그리고 그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부유한 왕국을 배경으로 둔 왕비.

    에드워드가 왕관을 노리기 위해선 그의 세력을 키우는 게 먼저였다.

    그래서 이 연회에서 에드워드는 가장 바쁘게 움직였던 게 아닌가.

    에드워드가 몸을 숙였다. 건배라도 하듯 잔을 가까이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은 중독되고 있어. 얼마 전 왕의 기미를 보던 시종의 목이 날아갔지. 오 년 넘게 이루어지고 있던 일이니 눈치채는 게 늦을 만도 했어. 왕비도 이렇게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겠지만.”

    “그런 불경한……!”

    그레이의 안색이 변했다. 왕비가 지금껏 저지른 일과 그녀가 존재함으로써 생기는 문제는 이것과 완전히 다른 종류였다.

    한 나라의 왕을?

    왕비는 제정신이 아니다.

    “왕이 제때 죽어 주지 않아서 초조했겠지. 초조하면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잖아.”

    “전하께선 어디서 이런 정보를 들으셨어요?”

    “누구겠어?”

    에드워드가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왕이 즉위하고 스무 해. 그동안 왕을 독살하려 한 게 왕비 하나였겠어?”

    정보의 출처는 왕이다. 신뢰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레이는 고개를 들어 왕과 왕비의 자리를 봤다.

    왕비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미인이었다. 그레이의 기억 속에서 왕비는 항상 저 모습이었다. 반면 그 옆의 왕은 지치고 골이 난 노인 같았다.

    알고 보니 소름 끼치는 광경이었다.

    왕비를 끌어내려야 한다. 한시라도 빨리. 에드워드는 서두르는 게 아니다.

    “시종이 죽었다면, 증거는요?”

    “필요 없겠지. 왕이 증인이니까.”

    “왕비를 제거하겠다는 건 폐하의 의중인가요?”

    “왕은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좋아해.”

    “확실한 방법?”

    에드워드는 그레이를 쳐다보지 않았다.

    하. 에드워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테라스를 보고 있어서 그레이는 다른 의미로 가슴이 떨렸다.

    또 무슨 일인데?

    테라스를 보자마자 그레이는 눈을 부릅떴다.

    그곳에선 망할 조프리 왕자와 알렉스 바움쿠헨의 포옹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프리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서 그레이는 둘이 키스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가슴이 벌렁거려서 그레이는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테라스가 직선으로 보이는 자리에 그레이와 에드워드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 자리의 귀족들이 테라스를 내다볼 만큼 매너가 없지 않아서, 또 망할 조프리 왕자가 귀족들의 존중을 받고 있어서.

    누가 저 꼴을 본다면……. 소문이 퍼지는 데 하루나 걸릴까?

    수도의 입 달린 사람이라면 모두 떠들고 있을 것이다. 조프리 왕자의 연인은 남자라고.

    왕이 될 왕자가 남색? 안 될 일이다.

    동성혼은 대안이 전혀 없을 경우,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으로만 이루어졌다. 후계자는 어쩔 것인가?

    에드워드는 잔을 내려놓고 손수건으로 젖은 손을 닦았다.

    “조프리의 기사가 아니랬다고?”

    그가 물었다.

    “아, 그러니까, 그게…….”

    “사실일 수 있겠네. 연인이라고는 안 했으니까.”

    “아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 없는데요!”

    “난 봤어.”

    “언제요?”

    조프리와 붙어 있던 시간은 그레이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에드워드가 무슨 수로?

    “네 말대로 조프리는 다른 사람이 마음대로 기대하게 만들잖아.”

    에드워드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았다.

    그레이는 뺨이 창백해질 지경이었다.

    정말로 저 둘이 연인 관계인가? 에드워드는 뭔가 알고 있나?

    ……그가 조프리의 ‘연인’을 무기로 삼을까?

    온갖 질문이 떠올라서 입을 열기도 힘들었다. 이윽고 그레이가 물었다.

    “조프리 전하는 어떻게 하실 건가요?”

    “조프리가 걱정돼?”

    “나쁜 분은 아니니까요.”

    그레이는 에드워드의 눈치를 살폈다.

    “네가 했던 말을 잊은 것 같네.”

    “예?”

    “조프리가 다칠까 봐? 죽을까 봐?”

    에드워드가 말을 돌렸다.

    “어느 쪽이든요.”

    그레이는 너무 감정적으로 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왕비를 축출하려면 조프리 왕자의 희생이 있어야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실 조프리의 죽음이다. 그가 없으면 왕비는 어떤 세력도 유지할 수 없다.

    확실한 방법?

    ……설마.

    그레이는 냉정하게 생각했다. 조프리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구역질 나는 스스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왕비의 손과 발을 자르려면 왕비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걸 인질로 잡아야 하지 않겠어.”

    “예, 전하.”

    그레이는 한숨을 삼켰다.

    “조프리를 손에 넣을 거야.”

    에드워드가 말했다.

    예?

    “……어떻게요?”

    “그러려면 역시 조프리 본인의 도움이 필요하겠지.”

    방법은 네가 생각하라는 듯 에드워드가 그레이를 쳐다봤다.

    그레이는 눈을 깜빡이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한쪽 뺨에 경련이 일어났다. 그는 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아니, 뭐 이런…….

    왕의 연설이 시작됐고, 테라스에서 조프리와 알렉스가 돌아왔다. 둘은 놀랍도록 친밀해 보였다.

    자신의 기사가 아니라더니.

    아, 그래. 주군이 아니라 연인?

    대체 그레이는 왜 저 왕자를 믿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

    조프리와 눈이 마주쳤다. 그레이는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머리가 멍했다. 그러니까 그가 해야 하는 일이…….

    그레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어깨를 으쓱였고, 조프리는 희미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얼굴로 그레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