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4화 (104/293)
  • 104.

    왕자가 눈을 반짝 떴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레이가 저도 모르게 숨을 삼키는데, 왕자가 맹하게 따졌다.

    “너 그렇게 바로 에드워드 편들기 있어?”

    “네?”

    순간적으로 온갖 생각이 들었다.

    뭐를 들킨 거지?

    찔리는 게 너무 많아서 왕자가 뭐에 대해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내온 세월이라는 게 있고 쌓인 정이 있는데, 어떻게 바로 에드워드한테 붙어서 내가 듣는 강의까지 미주알고주알 다 일러바칠 수 있어. 네가 그러고도 조프리 친구야? 왕자의 공부 친구라는 말을 쓸 자격이 있어?”

    조프리 왕자가 투덜거렸다.

    아. 그거.

    그레이가 책을 펼쳐 놓고 기다리던 용건이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에게서 조프리 왕자가 어떤 수업을 듣는지 전해 듣고, 하나도 빠짐없이 같은 수업을 신청했다.

    ‘너무 노골적인 것 같은데요.’

    ‘그럼 더 좋고.’

    그레이가 조언하자 에드워드는 그렇게 대답했다.

    조프리 전하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저잖아요, 라고 그레이는 생각했지만 에드워드에게 따질 수는 없었다.

    아무튼 그레이의 예측대로 조프리 왕자가 따지기 시작했다.

    그레이는 예상했던 상황에 오히려 안도해서 준비해 둔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왕자가 말했다.

    “서운하잖아.”

    “……예?”

    그레이는 귀를 의심했다.

    “누가 에드워드 심복 아니라고 할까 봐. 아카데미 올 때부터 너무 데면데면하게 구는 거 아니야?”

    조프리 왕자는 취했다.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말은 용케 또박또박 하고 있었지만, 들어 보면 제정신으로 입 밖에 낼 리 없는 내용이었다.

    지난 몇 년간 조프리 왕자가 그레이를 대하는 태도는 친근했지만, 그레이는 왕자의 입에서 저런 종류의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왕자는 그레이가 당장 사라져도 괜찮을 사람처럼 굴었다.

    이상했다.

    저러는 건 조프리 왕자답지 않은데.

    조프리는 솔직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의뭉스럽고, 늘 그레이의 머리를 아프게 하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레이는 하루 종일 조프리의 의중을 짐작하느라 골치를 앓는 게 아닌가.

    “제가 데면데면하게 굴어서 서운하셨어요?”

    그레이가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먼저 입이 열렸다.

    조프리는 착한 학생처럼 대답했다.

    “응.”

    “오늘 식사 자리에서 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렇다고 말했잖아.”

    “제가 없어도 인기 많으시다면서요.”

    그레이는 일부러 냉정하게 말했다.

    “알면서 왜 그래.”

    조프리가 미간을 좁혔다. 가슴이 간지러워서 그레이는 입술이라도 깨물고 싶었다.

    “내가 사교 행사 싫어하는 거 너는 알잖아.”

    “……그렇죠, 저는 알죠.”

    “응.”

    조프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취한 사람이 저래도 되는 건가? 그레이는 말려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조프리의 행동이 뚝 멎었다.

    “……전하?”

    “머리 아파.”

    조프리가 칭얼거렸다.

    돌겠네.

    그레이는 입술을 혀로 축였다.

    “술 얼마나 드셨어요?”

    “몰라……. 일곱 잔?”

    “왜 그렇게 드셨어요?”

    “다 마시기 전에 사람들이 안 일어날 것 같아서…….”

    “그걸 왜 전하께서 드셔요? 그냥 버리고 일어나지.”

    “너 화내는 거야?”

    “아니에요.”

    “화내는 거 맞잖아. 꼭 아닌 척하더라……. 넌 언젠가 왕족 모독죄로 잡혀갈 거야…….”

    조프리가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처벌하실 거예요?”

    “아니.”

    “그럼 누가 저를 처벌하겠어요?”

    “몰라. 넌 왜 사사건건 자신만만해? 어떻게 그래?”

    조프리는 눈을 뜨지 않았다. 겉옷 목깃이 조프리의 뺨을 누르고 있었다. 불편해 보였다.

    그레이는 손을 뻗었다. 손 그림자가 조프리 왕자의 얼굴을 지나 벽으로 움직였다. 그레이는 목깃을 들었다. 왕자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하는 김에 그레이는 왕자의 겉옷을 벗기려고 했다.

    조프리가 꾸물꾸물 상체를 벽에서 떼어 냈다.

    “내가 할게.”

    “팔 주세요.”

    그레이는 모른 척 옷시중을 들었다. 조프리 왕자의 팔에서 겉옷을 빼내고 셔츠 단추를 풀자 그는 멍하니 시중을 받았다.

    어쩐지 숨이 막혔다. 조프리가 그레이를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목소리를 떨지 않게 조심했다.

    “오늘 식사하러 몇 명이나 갔어요?”

    “열…… 여섯?”

    조프리가 골똘히 생각했다.

    “어떻게 도망치지 않고 잘 버티셨네요.”

    그레이가 칭찬했다.

    말하고 나서 왕자에게 하기는 부적절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상대는 조프리 왕자였다. 이런 일로 화낼 리 없었다.

    조프리가 고개를 기울였다.

    “나 잘했어?”

    “예, 잘하셨어요.”

    “사실 도망친 건데.”

    조프리 왕자가 활짝 웃었다.

    그레이는 단추를 풀다 말고 멈췄다.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미치겠다. 손끝까지 심장 박동이 전달돼서 단추를 구멍에서 빼내는 간단한 일조차 할 수 없었다.

    손이 떨렸다.

    조프리 왕자가 움직여서, 그레이의 손이 그의 가슴팍을 눌렀다. 그레이는 불에 덴 것처럼 손을 빼냈다.

    “그레이?”

    “잠시만…… 잠시만요.”

    온몸이 뜨거웠다.

    그레이는 바보가 아니었다. 이런 현상을 세간에서 뭐라고 부르는지 알고 있었다.

    “손 베였어?”

    조프리 왕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레이는 왕자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왕자가 황당한 얼굴로 그레이를 쳐다봤다.

    “일어나지 마세요.”

    “뭐?”

    왕자는 이제 술이 깬 것처럼 보였다. 취한 것 같은 쪽은 그레이였다.

    망했다.

    술 한 방울 입에 대지 않았는데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귀까지 쿵쿵 울려서 자꾸 마른침만 삼키게 됐다.

    “취하셨어요. 주무세요.”

    “그레이?”

    그레이는 이불을 끌어다 조프리 왕자의 품에 안겼다. 신발을 꿰어 신고 복도로 나가자 찬 공기가 얼굴을 식혔다.

    조프리 왕자는 따라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랐다. 그 왕자는 쓸데없이 주변 사람을 신경 쓰니까.

    그레이는 기숙사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는 층계참에 도달해서야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에드워드의 개선 축하연이 떠올랐다. 그레이는 그날 조프리 곁에 있으려고 했다. 그레이는 두 왕자 모두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고, 선택해야 할 때까지 어느 쪽도 놓을 생각이 없었다.

    그건 아버지의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연회장에서 그레이를 더 필요로 하는 쪽은 조프리였다. 에드워드는 그레이가 아니라도 그를 챙겨 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레이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조프리가 그레이를 필요로 할 테니 곁에 있어 주겠다. 조프리는 언제나 그레이가 필요 없다는 듯 굴었지만, 정말 필요할 때 그레이가 찾아가면 숨길 수 없는 안도의 표정을 보였다.

    조프리는 보기만큼 쉬운 사람은 아니지만 대하기 어려운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연회장에 들어올 때부터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웃고 있었으나 귀족들은 남의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사람이었고, 특히 그레이는 왕자를 오래 보아 왔다.

    조프리의 미소는 무의식중에 짓는 표정이거나 만들어진 표정일 때가 많았다. 연회장에서라면 대개 후자였다.

    왕에게 인사한 조프리는 에드워드를 찾았다. 두 왕자의 대면에 귀족들은 호기심을 갖고 있었다.

    조프리가 굳은 미소로 에드워드에게 인사하는 모습을 그레이는 지켜봤다.

    에드워드는 웃었고…….

    조프리의 얼굴은 파리해졌다.

    조프리는 테라스로 도망쳤다. 그레이는 그를 따라갔다. 조프리는 그레이를 필요로 할 것이다.

    예상이 맞아서 조프리는 그레이의 등장에 안도했다.

    외로움을 타는 왕자다. 그레이는 조프리를 다룰 수 있었다. 그가 정말 중요한 부분은 그레이에게 숨긴다는 건 알고 있지만.

    하지만 에드워드가 알렉스 바움쿠헨을 보내 그레이를 불러냈을 때, 조프리는 그레이를 보냈다.

    금방 그레이가 필요 없는 척하는 것까지 평소의 조프리 왕자였다.

    조프리 왕자는 회복됐다.

    그가 멀쩡해지는 건 좋은 일인데도 그레이는 약간 짜증스러웠다. 그를 멀쩡하게 만든 사람은 그레이가 아닌가. 조프리는 남의 노력을 알아주는 법이 없다.

    아마 그 순간 누가 곁에 있었어도 그는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겠지만.

    그레이는 귀족 무리에 둘러싸인 에드워드에게로 다가갔다. 일 년 전만 해도 에드워드의 이름이나 기억했을까 싶은 사람들이 그를 태양처럼 떠받들고 있었다.

    한심한 작자들.

    그들도 알 것이다. 에드워드의 환심을 사기엔 이미 늦었다. 미움이라도 받지 않기 위해 뒤늦게 얼굴도장 찍어 두는 거겠지.

    “에드워드 전하. 부르셨다고요.”

    “얼굴 보기 힘드네. 어디 가 있었어?”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레이의 행방을 신경이나 썼다는 투였다.

    그레이는 목을 긁고 싶은 걸 참았다.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에드워드에게 저 말투는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보니 귀족들은 에드워드의 부드러운 태도 때문에 희망을 품는 듯했다.

    “전하께서 오죽 바쁘셨어야죠. 인사드리고 싶어도 틈이 나질 않던데요.”

    “그런 것치고 즐거워 보이던데. 테라스에서 나왔잖아.”

    “그곳이 그런 용도로 쓰인다고만 생각하지 마세요! 대체 무슨 상상을 하시는 거예요?”

    뜻밖의 공격에 그레이는 당황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음담패설을? 전장에서 뭘 배워 온 거야?

    에드워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조프리와 무슨 얘기 했어?”

    그레이가 누구와 있었는지 알고 있다. 그레이는 켕기는 마음을 모른 척했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었다.

    “에드워드 전하께서 왜 이러시냐든가.”

    “…….”

    “무슨 속셈이시냐든가, 조프리 전하를 미워하시냐든가.”

    그레이는 궁금한 사실을 살짝 끼워 넣었다.

    “하하. 그런 게 궁금하대?”

    에드워드는 입으로만 웃었다. 그레이는 소스라칠 뻔했다.

    뭐야, 왜 이래. 전장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거 아닌가?

    조프리 왕자가 과하게 반응한다고 느꼈지만, 이 웃음을 눈앞에서 봤다면 질려 버린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에드워드는 지난 몇 년간 조프리의 이름조차 듣기 싫어했다.

    그런 것치고 조프리의 소식은 잘 알고 있어서 그레이는 ‘또 밖에서 소문 듣고 왔군.’ 하고 내심 혀를 찼다.

    전장에 나가서 조프리의 근황을 듣기 어렵게 되자, 에드워드는 그레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레이는 답장의 절반을 조프리의 행적으로 채워야 했다.

    이쯤 되면 조프리를 너무 싫어하는 건지 그 반대인지 알기 힘들 지경이었다.

    보통 싫어하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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