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3화 (103/293)
  • 103.

    그 뒤로 귀족들은 ‘맞아, 왕자 전하가 주인공이시지’라는 태도로 내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논쟁할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그렇게 바꾼 파벨은 내게 계속 눈을 찡긋거리고 있었다.

    뭘 어필하고 싶은 거지? 내가 이렇게 당신을 귀찮게 할 수 있다?

    정말 도움 안 되는 캐릭터다.

    난 파벨이 따른 잔을 단숨에 비웠다. 집에 가고 싶다.

    뭐라고 말하고 있던 대각선 자리의 귀족이 빈 잔을 보고 일어났다.

    “전하, 이번에는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고마워.”

    뭐든 됐으니까 빨리 끝나라.

    와인은 여섯 병이 나왔다. 귀족들은 맛을 음미하느라 도무지 잔을 비우지 않아서 이대로 뒀다간 세 시간이 넘게 식사할 듯했다.

    이 자리의 모두가 공평하게 한 잔씩 따르자 두 병이 비었다. 찔끔찔끔 잔을 채우지 말고 가득 채워서 마셨으면 좋겠다.

    와인 다 마시면 일어나는 거지?

    내가 한 잔 두 잔 넙죽넙죽 비우자 귀족들은 기뻐하며 내 잔을 채워 줬다.

    “전하. 이번에는 제 잔을 받아 주세요.”

    “이렇게 와인을 좋아하실 줄 몰랐습니다. 다음번에는 꼭 저희 양조장에 와 주세요.”

    얼굴이 화끈거린다 싶더니 목이 말랐다. 하지만 잔에 와인이 남아 있으니 상관없었다.

    그런데 와인을 계속 마셔도 갈증이 사라지지 않았다. 귀족들은 내 잔을 채우는 데만 열의를 쏟고 있었다.

    아니, 나 혼자 마셔서 어떻게 병을 치우라는 거야?

    “다들 잔 비워.”

    “예?”

    “빨리.”

    귀족들이 자기 앞의 와인을 마셨다. 그들이 나를 쳐다봤다.

    “자. 다시 채워.”

    “예? 전하?”

    “어서. 뭐 해? 짠 해야지.”

    웨이터들이 와인을 따랐다. 하지만 귀족들은 잔에 손대지 않았다.

    파벨이 선창하지 않아서? 그래서 안 마시는 건가?

    난 잔을 들어 올렸다.

    “다들 건배.”

    “……전하?”

    “취하신 건가?”

    “맞춰 드려.”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정해진 멘트가 있었지.

    “나를 위해서.”

    “위, 위하여?”

    귀족들이 잔을 들고 따라 했다.

    네 병 끝냈다.

    난 잔을 비우고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 단번에 마셨지만, 자기 몫의 술을 끝까지 안 마신 사람들이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매너가 아니잖아. 건배했으면 다 마셔야지.”

    “죄, 죄송합니다, 전하.”

    그들이 잔을 비웠다. 머리가 흔들렸다. 알렉스가 내 팔을 잡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알렉스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다.

    “괜찮아. 아, 넌 술 마시지 마.”

    “예?”

    “몸에도 안 좋은 거 왜 마시나 몰라.”

    “……전하?”

    “병 얼마나 남았어?”

    파벨이 당황한 채 병을 확인했다.

    “두 병입니다, 전하. 앗. 부족하시군요. 와인을 더 주문할까요?”

    “무슨 소리야? 너 잔이 비었네. 그래서 헛소리를 하는 거야. 자, 마셔.”

    “앗, 전하가 따라 주신 술……. 영광입니, 아, 그런데 전하, 넘칠 것 같은데요?”

    “자. 마셔.”

    파벨은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냥 눈을 감고 마셨다.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고 머리가 아팠다. 눈을 깜빡이는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전하께서 취하신 것 같은데요.”

    “잠깐, 이러다 쓰러지시면…….”

    낯선 목소리 사이로 알렉스의 당황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와인을 마시고 취하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난 대답했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전하?”

    알렉스가 나를 붙잡았다. 커다란 손이 내 어깨를 잡고 있어서 알렉스라는 걸 알았다.

    알렉스의 얼굴을 봐야 하는데. 고개가 안 들렸다. 얼굴에 피가 몰렸다.

    이게 취한 건가? 냉정하게 생각해 봤다.

    취하진 않았다. 정신은 멀쩡했다. 졸리고 심장이 뛸 뿐이었다.

    육체와 정신의 괴리를 지금 처음 느끼는 게 아니었다. 이 몸은 조프리의 몸이고, 몸을 조종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였다.

    이걸 내 몸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조프리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조프리 몸은 운동만 안 받는 게 아니라 알코올도 잘 안 받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어떤 자리에 참석하든 와인은 마시는 시늉만 했다. 주량의 한계까지 한번 마셔 볼걸.

    그러고 보니 나 나이 차면 하려고 했던 게…… 주색…….

    조프리가 술도 못 마시면 주색 어떻게 하지?

    “전하. 일어나실 수 있습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당연하지.

    난 일어났다. 멀쩡하게 서서 알렉스를 쳐다보자 그가 손을 내밀었다.

    “괜찮으십니까?”

    “응.”

    “기숙사로 돌아갈까요?”

    “응.”

    “모시겠습니다.”

    알렉스가 계속 손을 내밀고 있어서 마주 잡았다.

    알렉스는 멈칫하더니 앞장서 걸어갔다.

    “잠깐. 그러면 우리는…….”

    파벨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를 기숙사로 모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은 남아서 즐기시길 바랍니다.”

    알렉스가 똑 부러지게 말했다.

    말 잘한다.

    그를 따라서 식당을 빠져나갔다. 숨통이 트였다.

    앞으로는 이런 자리 나오지 말자.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취한 건 조프리다.

    난 취하지 않았다.

    * * *

    그레이 크래커는 모든 수업을 마치고 도서관을 찾았다. 학생당 빌릴 수 있는 책의 권수는 열 권이었다. 그레이는 열 권을 품에 안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갔다.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책을 읽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아홉 시였다.

    룸메이트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식사가 늦어지나?

    같은 방을 쓰는 조프리 왕자와는 찜찜한 일이 있었다. 그레이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조프리 왕자에게 붙잡힐지도 모른다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왕자가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들어와 불평하리라는 생각은 변함없었다.

    왕자는 어리석지 않다. 누가 자신의 수업 일정을 에드워드에게 노출했을지는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있던 건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함이 컸다.

    그런데 찾아오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았다. 왕자에 대해 잊기 위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왕자가 신경 쓰여서 내용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니.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레이는 책을 덮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 건 그때였다.

    “왕자 전하?”

    그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시간에 누가 찾아온다면 당연히 조프리 왕자겠지만, 왕자라면 문을 두드릴 리 없었다. 그레이와의 타협 끝에 단 이중 잠금장치를 열고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밖은 조용했다. 방문자는 한참을 부스럭거리더니 열쇠를 끼워 맞추고 돌리는 듯했다. 철컥 소리가 들렸다.

    왕자가 맞나?

    그런데 두 번째 열쇠를 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고 문이 덜컹거렸다. 손잡이를 잡아 돌리는 상대의 힘이 얼마나 무식하게 센지 문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침입자.

    그레이가 경계할 때, 조프리 왕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열쇠가 하나 더 있어. 내가 열게. 이제 돌아가 봐.”

    “괜찮으시겠습니까?”

    대답하는 목소리는 알렉스 바움쿠헨이었다.

    “응.”

    “들어가시는 것까지 보고 가겠습니다.”

    “응, 그래.”

    착하다, 하는 말투로 대답한 조프리 왕자가 문을 열었다. 그레이는 경계하느라 자리에 앉을 타이밍을 놓쳤다.

    방으로 들어온 왕자가 그레이를 발견했다.

    “그레이잖아? 먼저 와 있었네.”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화나지 않았나? 그레이는 당황해서 왕자를 쳐다봤다.

    “예, 늦으셨네요.”

    “그럴 일이 있었어.”

    조프리 왕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두 뺨이 발그레했다.

    왕자는 잘 가꿔진 듯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머리카락은 부드러웠고 피부는 도자기처럼 매끄러웠다. 혈색 있는 건강한 피부와는 거리가 있었다.

    조프리 왕자는 왕과 달리 사냥에 취미가 없었고 형제인 에드워드 왕자처럼 이름 난 기사인 것도 아니었으므로, 귀족들은 왕자가 땀을 흘리거나 뺨을 붉히는 모습 같은 건 볼 일이 없었다. 조프리를 가까이서 봐 온 그레이도 마찬가지였다.

    술을 마신 건가?

    대개 조프리 왕자의 얼굴에는 핏기가 없었다. 왕비와 닮은 얼굴이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는 건, 왕자의 태도 때문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천천히 걸어서 침대에 앉았다. 꾸물거리며 벽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뻗은 채 신발을 툭툭 벗었다.

    왕자가 벽에 머리를 툭 기대고 그레이를 쳐다봤다.

    “알렉스 바움쿠헨과 둘이 계셨어요?”

    그레이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왕자가 그를 추궁할까? 그럴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냥 넘어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왕자는 어떤 기준에 따라 대부분의 일을 무던하게 넘겼는데, 그렇다고 그 일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로제 부인의 사후 조프리 왕자는 자신의 궁에서 일하는 궁인들의 반을 내보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충하지 않았다.

    왕자는 자신의 궁인들을 믿지 않는다. 왕자가 궁인들에게 예민한 태도를 보였다면, 그레이는 납득했을 것이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게 왕족이라면 더욱 그랬다.

    하지만 왕자는 궁인들에게 여전히 좋은 주인이었다.

    궁인들에게 패물을 베풀고 다정하게 대했으며, 시종들을 불러 성의 이야기를 듣는 일과도 없애지 않았다.

    왕자가 시종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며 그레이는 새삼스레 조프리 왕자에 대해 다시 생각했다.

    이 왕자는 보이는 것만큼 허술한 사람이 아니다.

    “아니, 다른 동급생들도 같이 있었어. 학우들과 함께 즐거운 식사 시간을 보냈지.”

    왕자가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는 뚱한 얼굴로 그레이를 쳐다봤다. 몹시 불만스러워 보였다.

    “정말 즐거우셨던 거 맞나요?”

    “아, 물론이야. 조프리 왕자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확인했거든. 벌써 저택에 놀러 오라는 초대를 열 번은 받았으니까.”

    왕자는 잘난 체하듯 말하더니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본인이 말해 놓고 우울해진 모양이었다.

    인기는 무슨. 그레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왕자가 사교 활동을 싫어하는 건 몇 번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뭘 자랑하려는 건가 싶었다.

    “전하야 워낙 만나기 힘든 분이니까요. 싫으셨으면 그런 자리에 왜 나가셨어요?”

    “몰라. 네가 없었잖아.”

    “제가 없어서…… 분위기에 휩쓸려 가신 거예요?”

    “그래. 너 때문이야.”

    그레이는 그게 왜 저 때문이냐고 반박하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입이 열리지 않았다. 찡그린 얼굴인데도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레이는 의식적으로 이 기분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언제부터인가 왕자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그레이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왕자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유일할지도 모른다. 그런 기대가 들어서 바보같이 들떴다.

    그레이는 바람 드는 가슴에 돌을 얹었다. 기분을 가라앉히고 침대에 늘어진 왕자에게 권했다.

    “씻고 주무세요.”

    “그럴 거야.”

    “눈 감지 마시고요.”

    “응…….”

    “눕지 마시라니까요. 옷에 주름지잖아요. 여긴 하인들도 없다고요.”

    “응…….”

    왕자는 말 안 듣는 어린애처럼 굴었다. 실제로 그런 어린애였던 적은 한 번도 없으면서.

    하는 수 없이 그레이는 왕자에게 다가갔다. 왕자는 벽에서 미끄러진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발그레한 얼굴에 가까이 다가서자 술 냄새가 났다. 역시 취한 거였다. 그레이는 왕자의 겉옷을 벗기려고 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