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2화 (102/293)
  • 102.

    집에 가고 싶다.

    이 생각은 내가 사교장에 들어설 때부터 하는 생각인데, 한번 머릿속에 떠오르면 사라지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었다.

    내가 사교에 소질이 없다는 건 현생과 게임 속의 삶 통틀어서 증명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대개 조프리가 그 자리에 있기만 해도 만족했지만,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조프리가 자기 이름을 기억해 주길 바랐고, 자기 안목을 치켜세워 주길 바랐으며, 기왕이면 자신의 딸 혹은 여동생과 잘 지내길 바랐다.

    아무튼 그렇게 꼬리를 물고 인사하러 온 귀족들의 이름을 열다섯 개쯤 들으면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이라고 생각하면 조프리의 궁을 떠올리게 된 지 한참 됐다.

    그곳은 집이라고 하기에는 좀 크지만.

    지금은 기숙사 방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기숙사에 그레이가 있을까?

    그레이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그를 핑계로 잠깐 빠져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조프리가 참석해야 할 자리에는 그레이도 참석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무튼 그레이는 재상의 하나뿐인 아들인 데다 크래커 소공작이라는 작위를 가졌기 때문에, 왕자를 초대하는 자리에 같이 초대하기로는 그만큼 격에 맞는 상대도 없었다.

    게다가 그레이는 조프리의 공부 친구이기까지 했다. 귀족들은 나와 그레이가 함께 서 있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면서 두 분의 우애가 깊다는 말을 하는 것도 좋아했다.

    “전하, 이쪽은 브륄레 남작의 장남입니다. 전하를 이미 뵌 적이 있다고 하던데요…….”

    “전하. 레온 브륄레입니다. 전에 왕실 신년 행사에서 인사드렸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 누이와 함께 있었는데요…….”

    “전하.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난 거만한 대꾸로 일관했다.

    “전혀 모르겠군.”

    “어떻게 기억하라는 거지?”

    “아, 그 조그만 영지.”

    “흠.”

    하지만 귀족들은 굴하지 않았다. 경쟁자가 무시당하는 걸 기뻐하며 “맞아. 전하께서 너 같은 놈을 어떻게 기억하신다는 거냐?” 하며 조롱했다.

    거만하게 구는 게 통하고 있는 거 맞나?

    나 잘못 걸린 것 같은데.

    그러다 식사가 나왔다. 식탁 위에 한꺼번에 음식을 올려놓고 먹는 이 나라와 다르게 셔벗식은 요리가 코스로 나왔다.

    이 나라에서도 잘 차려서 대접하는 자리는 셔벗 방식을 흉내 내곤 했다. 요리로 유명한 나라니까.

    전채부터 시작해서 수프가 나왔다. 흰 장갑을 낀 웨이터들이 접시와 와인 쿨러를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난 계획을 개시했다. 메뉴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 까다롭게 굴면, 지금 인내심을 보이는 이 귀족들도 왕자 비위 맞추기 한번 더럽다고 욕하게 될 것이다.

    난 수프를 한 입 떠먹었다. 뭐라고 싫은 말을 해야 할지 속으로 생각하면서.

    수프는…….

    “…….”

    나도 모르게 눈이 커질 뻔했다. 깜짝 놀랄 정도로 맛있었다. 맑은 수프에 고기가 몇 점 떠 있을 뿐인데, 뭘로 맛을 냈는지 깔끔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었다.

    난 스푼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믿을 수 없군. 이걸 진심으로 추천한 건가?”

    “예? 전하?”

    파벨이 당황했다. 스푼을 들어 한 숟갈 더 뜨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느라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설마 미맹은 아니겠지? 그대가 상송 가문의 적자가 아니었다면, 날 모욕하기 위해 이곳에 데려온 거라고 의심했을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파벨이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며 끽 소리를 냈다.

    그가 모욕을 견디지 못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내 신분 때문에 한 번은 참았지만, 두 번은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화낼까? 국제 문제로 비화하진 않을 것이다. 왕비님이 있으니까.

    “정말 참을 수 없군!”

    좋아. 화낸다.

    “이런 쓰레기를 음식이라고 내오다니. 네놈들이 왕족을 우습게 아는 것이냐? 관대하신 왕자 전하 앞이라 참으려 했으나, 전하께서도 참을 수 없는 맛이라 하시지 않느냐!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 내 명예를 걸고 네놈들을 단죄하리라.”

    “죄, 죄송합니다, 전하!”

    웨이터들이 무릎을 꿇었다. 파벨은 씩씩거리다 말고 나를 힐끗 봤다. 아니, 이게 무슨…….

    맛있게 먹고 있던 귀족들도 죄다 숟가락을 내려놓더니 표정을 굳혔다.

    “전하,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맛이었습니다.”

    뭐를? 기쁨을?

    알렉스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여전히 스푼을 쥐고 있었다. 접시의 반이 비어 있었다. 엄청 맛있게 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스푼을 내려놓았다.

    “저도 이 수프는 맛이 없다고…… 생각…….”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맺음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레스토랑 지배인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무릎 꿇은 웨이터들을 보더니 넙죽 엎드렸다.

    “노여움을 푸십시오, 전하! 귀한 몸을 모셔 본 경험이 없어 이놈들이 실수를 저질렀나 봅니다. 저희 같은 무지렁이들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식은땀이 흘렀다. 이게 아닌데.

    “으음, 믿을 수 없는 맛이더군.”

    “죄송합니다, 전하!”

    “너무 맛있어서 내 혀를 믿을 수 없었다는 뜻이었어.”

    “죄송, 네? 전하?”

    난 파벨에게 고개를 돌렸다.

    “셔벗의 음식이 너무 맛있는 나머지 놀림이라도 받는 기분이었어, 파벨. 우리나라도 셔벗처럼 조리법을 연구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앗. 감사, 감사합니다?”

    웨이터와 지배인은 아직도 바닥에 있었다.

    “주방장을 치하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행복한 기분이야.”

    지배인을 일으켜 세우자 뒤에 있던 웨이터들도 어리둥절한 채 일어났다.

    “예, 전하. 주방장을 불러오겠습니다. 더없는 영광일 겁니다.”

    “응, 그래. 식사 끝나고.”

    “예, 예! 물론 그래야죠.”

    조프리 진상 작전은 보류다. 레스토랑이 문을 닫는 건 곤란했다.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하지만 귀족들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조프리는 수많은 파티에서 수많은 귀족들을 만나 왔는데, 그 자리에서는 귀족들의 이름과 가족 관계만 소개받으면 일이 일단락됐다.

    사실 나이 지긋한 귀족들과 조프리가 할 얘기가 없기도 했다.

    열몇 살과 중년의 귀족들이 비슷한 취향을 가졌을 리도 없고 잡담으로 긴 시간을 때우기도 뭐했다.

    문제는 이 자리의 귀족들이었다. 젊고 쌩쌩하고 신분이 학생인, 조프리 또래의 귀족들은 왕자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들은 제각기 취미와 취향에 대해 털어놓으며 내 취미를 캐 보려고 했다. 하지만 한 명이 자기 취미를 말하면 다른 사람이 그 취미를 무시했기 때문에, 내가 대답할 틈은 없었다.

    “전하, 혹시 최근 유행하는 다트라는 게임을 아십니까?”

    “하! 그런 서민 게임을 전하께서 하실 거라고 생각하다니. 수준 참 알 만하네. 전하, 저는 영지에서 체스 챔피언이었습니다.”

    “그 손바닥만 한 영지에서 챔피언이었다고? 정말 놀라운 수준이군!”

    “뭐? 너 말 다 했어?”

    “…….”

    얘들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거 아닌가?

    내가 파투 낼 것도 없었다. 자리 분위기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장갑도 날아다닐 것 같다.

    테이블의 다른 쪽에서는 잉어 낚시에 관한 얘기가 진행되었다. 잉어 낚시는 최근 수도에서 유행하는 놀이로, 저택의 연못에 잉어를 풀어놓고 말 그대로 낚는 놀이였다.

    이때 잉어를 상하게 하면 실력 없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잡은 잉어를 먹지도 않았다.

    애초에 관상용 잉어는 그렇게 먹어 버리기엔 너무 비쌌다.

    “그럼 잉어는 왜 잡는 겁니까?”

    알렉스가 귓속말로 물었다. 그는 수도에서 유행하는 놀이를 전혀 몰랐다. 최근 유행뿐만 아니라 과거에 지나간 유행도 알지 못해서, 바움쿠헨 백작이 애를 어떻게 기른 건지 의문이 들었다.

    기사로 키워 달랬다고 정말 수련만 시킨 건 아니겠지.

    “사실 귀족들은 잉어를 낚는 게 아니야.”

    “그러면요?”

    “세월을 낚는 거지.”

    “……!”

    알렉스가 깨달음의 표정을 지었다.

    믿는 건가?

    얠 어쩌면 좋지?

    알렉스를 걱정하다 파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가 눈을 찡긋거렸다. 내 마음을 다 안다는 표정이었다. 뭐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하고 귀족들이 조용해졌다. 파벨이 와인병을 들었다.

    “이 자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전하께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행사 진행자 같았다. 거절하면 또 취미 얘기가 재개되는 건가?

    “고마워.”

    난 잔을 내밀었다.

    파벨은 잔에 찰랑거릴 정도의 와인을 따르고 건배사까지 했다.

    “조프리 2왕자 전하를 위하여!”

    “위하여!”

    귀족들이 제창했다. 그 태도가 진지하고 엄숙했다.

    “…….”

    집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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