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101화 (101/293)
  • 101.

    수업이 끝나자마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는 아직 책도 덮지 않았지만, 그가 일어나서 내게 다가와 또 이상한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덮고 품에 안았다. 의자에서 바로 일어났다. 알렉스는 내 뒤에 섰다. 여기까지 일 분도 걸리지 않았다.

    창가에서 누군가 일어나더니 “전하!” 하고 외쳤다.

    파벨과 그 무리였다.

    나가야 하는데. 난 하는 수 없이 알은척했다.

    “파벨레 상송.”

    “전하께서 저와 같은 수업을 들으실 줄이야! 굉장한 우연이네요! 식사는 하셨나요? 아직이라면 저희가 모시고 싶은데요!”

    파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변을 슬쩍 봤다. 으스대는 기색이었다. 왕자가 자기 인맥이라는 거지.

    파벨의 자랑이야 알 바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뭔가 반짝 떠올랐다.

    아카데미는 인맥을 쌓기 좋은 곳이다. 파벨의 무리는 벌써부터 호의적인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기서 조프리가 인사를 받아 주고 같이 식사하러 가면, 파벨 무리는 조프리의 인맥이 되는 셈이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는 사교성 좋은 왕자. 그건 게임 속 조프리였다.

    난 조프리가 하는 건 뭐든 반대로 할 생각이었다.

    아카데미가 인맥 쌓기 좋은 곳이라는 건, 반대로 인맥을 망치기도 좋은 곳이라는 뜻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조프리 왕자는 좀…….’이라는 평판을 심어 놓으면, 조프리의 세력은 생기지 않는다.

    난 그레이의 태도를 떠올렸다. 그레이가 거만하게 굴 때 어떻게 했더라?

    파벨을 똑바로 쳐다보며 턱을 살짝 들었다. 무표정하게 그를 빤히 보면서 위아래로 훑었다.

    이런 시선을 받으면, 상대는 일이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기 마련이다. 그레이가 침묵하면 사람들은 아주 불길한 느낌을 받곤 했다.

    파벨이 뺨을 붉혔다.

    “전하?”

    “…….”

    원하던 반응이 아닌데.

    파벨이 뭐라고 했더라? 식사를 대접하고 싶다고?

    “내 입맛은 고급이라 이 주변 식당 음식은 맞지 않아. 내 격에 맞는 곳을 네가 찾을 수 있을까?”

    난 거만하게 말했다.

    파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물론입니다, 전하.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군요? 정말이지 아카데미 주변 식당은 수준이 형편없더군요. 하지만 제가 누구입니까? 파벨레 상송, 유서 깊은 상송 가문의 아들 아닙니까? 전하께서도 흡족해하실 만한 곳을 발견했습니다.”

    “아, 정말?”

    “근처의 저렴한 식당에 고생한 혀가 위로받을 만한 곳입니다. 듣자 하니 그곳의 주방장이 셔벗에서 요리를 배워 온 실력파라고 하더군요. 제 나라라서가 아니라, 셔벗의 요리가 워낙 발달해 있지 않습니까?”

    파벨은 달변이었다. 원하던 반응이 아닌데.

    “그 정도로 날 만족시키겠다고? 셔벗의 요리 따위 궁에서 매일같이 먹었어. 좀 더 참신한 거 없나?”

    난 팔짱을 꼈다.

    “셔벗의 요리를 좋아하시는군요? 그렇다면 더더욱 괜찮으실 겁니다. 이 나라 사람들의 입맛에 맞춰 소스를 변형시켰다고 하더라고요. 그 독특한 느낌이 또…….”

    파벨이 기뻐하며 설명했다.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던 학생들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저, 전하. 좋은 식당을 찾으시는 거라면, 마차를 타고 조금만 이동하면 송아지 요리를 잘하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오리 요리는 어떠십니까? 잡내가 전혀 나지 않게 부드러운 살로 조리하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 와인을 좋아하십니까? 기회를 주신다면 저희 가문 양조장에 전하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간단한 요리와 곁들여 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을 수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열몇 명은 되는 학생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조프리의 신분을 얕봤다. 거만함을 참아 줄 수 있는 인내심 많은 학생들이 이렇게 많을 줄 몰랐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었다. 내가 참을 수 없는 진상이라는 걸 보여 주는 수밖에.

    “그렇게들 원하니 어쩔 수 없군. 식당은 어느 쪽이지?”

    “전하, 감사합니다! 틀림없이 만족하실 겁니다.”

    파벨이 기뻐했다.

    “전하, 저희도 함께해도 될까요? 전하께 인사 올리고 싶습니다.”

    송아지 요리를 권하던 학생이 물었다. 그의 곁에서 친구로 보이는 학생들이 기대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물론이지.”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로. 나도 목격자가 많은 편이 좋았다.

    열댓 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복도로 따라 나왔다. 교실에 남은 사람은 에드워드와 이델라밖에 없었다.

    에드워드의 시선이 싸늘해서 얼굴이 찔릴 듯했다.

    그가 보기에 지금 이 그림은, 조프리가 선동해서 사람들을 죄다 끌고 나가는…….

    난 위안을 얻기 위해 알렉스를 돌아봤다.

    알렉스는 평온한 무표정이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봤다.

    “명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에드워드가 날 찔러 죽이려 하면 막아 줄 거지?

    “아니.”

    “불편하십니까? 사람들과 거리를 둘까요?”

    “아니, 괜찮아.”

    알렉스는 고개를 숙였다. 주변 학생들이 와, 하고 탄성을 냈다.

    “저, 경이 누군지 알아요. 알렉스 바움쿠헨 경이시죠?”

    “아아, 바움쿠헨 경! 저분이?”

    “조프리 전하의 기사가 되신 건가요? 너무 멋져요.”

    알렉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있었다.

    그는 뿌듯해 보였다.

    역시 명성에 관심 있는 건가. 기사들은 대개 그렇더라.

    에드워드가 왕이 되면, 알렉스를 놔주자.

    알렉스의 호위를 받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 * *

    식당은 고급 레스토랑처럼 생긴 건물이었다. 실제 이름도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내가 어째서 알고 있냐면, 이곳이 이델라와 조프리가 데이트를 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파벨이 조프리 마음에 들 거라고 장담할 만했다. 왕자가 호감 가는 사람을 데리고 나올 정도의 식당이니까.

    웨이터가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몇 분이십니까? 예약하셨습니까?”

    파벨이 거만하게 말했다.

    “가장 좋은 자리로 안내해.”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닌데? 웨이터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우리의 머릿수를 재빨리 세기 시작했다.

    “와, 이 식당은 손님을 앞에 세워 두네.”

    우리를 따라온 학생 중 한 명이 말했다.

    혼잣말인가? 하지만 이곳의 모두가 들었다. 파벨이 얼굴을 붉혔다.

    귀족들이란 체면 상하는 일을 참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해서 싸움 나는 경우를 종종 봤다.

    싸우려나?

    난 한 걸음 움직였다. 파벨이 던지는 장갑에 잘못해서 맞을지도 모르니까.

    과연 파벨은 불같이 화냈다.

    “감히 왕자 전하 앞에서 나를 모욕하는 거냐? 이 게으른 놈, 당장 가서 사장을 불러와!”

    그런데 대상은 말을 꺼낸 학생이 아니라 웨이터였다.

    “죄송합니다, 나리. 그런 것이 아니라…….”

    “누가 변명이 듣고 싶댔어? 건방진 놈! 말대답을 하다니!”

    “아니, 아닙니다.”

    “내 말이 틀렸다는 거냐?”

    어이없어서 쳐다보는데 파벨이 내 시선을 느끼고 다시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전하. 이런 곳이 아니었는데요. 제가 혼쭐을 내놓겠습니다!”

    “너 이 식당 지배인이야?”

    “예?”

    “아니면 네가 왕자야?”

    “아닙니다, 전하!”

    “남의 나라 백성을 네가 무슨 권리로 처벌하게?”

    “죄, 죄송합니다, 전하.”

    파벨은 이마까지 벌게졌다.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웨이터는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진상 포지션을 파벨이 선점해 버렸다.

    정말이지 도움 되지 않는 캐릭터다. 그런 것치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파벨을 좀 더 쪼면 이 식사 자리 제대로 망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가 몇 명이지?”

    다른 학생에게 묻자, 그가 재빨리 대답했다.

    “열여섯 명입니다, 전하.”

    “그렇대. 남은 자리가 있을까?”

    “예, 전하.”

    웨이터가 고개를 숙였다. 목소리가 떨렸다. 파벨이 두려운가?

    “걱정하지 마. 이 친구가 성격이 급해서 그래.”

    “감사합니다, 전하.”

    웨이터는 여전히 떨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난 웨이터를 식당 안으로 돌려보냈다.

    우리가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레스토랑 지배인이 달려왔다. 그는 손을 맞잡고 재빨리 우리를 훑어봤다.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됐다.

    “조프리 전하! 제가 운영하는 식당에 전하께서 와 주시다니 이런 영광이 없습니다.”

    “맛이 굉장하다고 추천받았거든. 기대하고 있어.”

    “꼭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그때 파벨이 어깨를 으쓱이며 끼어들었다.

    “이 ‘친구’가 조프리 전하께 이곳을 추천드렸지. 저번의 그 특제 요리를 내오라고 주방장에게 꼭 말하게. 전하께서 주방장의 특제 소스를 마음에 들어 하시면 큰 상을 내리겠네.”

    방금 모욕당한 사람 같지 않았다. 회복이 뭐 이렇게 빠르지?

    “예. 꼭 전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전하께서 편히 계실 수 있도록 방을 비웠습니다.”

    나 때문에 방을 비웠다고? 먼저 먹던 사람들은 식사하다 쫓겨난 건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래……. 난 잘하고 있는 것 같다.

    방은 한쪽 벽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벽을 통해 식당의 후원을 구경할 수 있는 구조였다.

    희고 작은 꽃이 피어 있는 풀숲과 푸른 나무가 보였다. 허브를 기르는 화분과 여러 정원석으로 꾸며진 작은 연못도 있었다.

    내 착각이 아니라면, 저 연못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지배인이 반가운 듯 말했다.

    “아! 알아보셨군요! 지난 초겨울 정원 공사를 마쳤습니다. 전하께서 연못이 있는 정원을 좋아하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식사 후에 후원을 잠시 거닐어 주십시오. 전하의 안목으로 정원을 살펴봐 주시면 더한 영광이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 볼게.”

    그런 안목 없지만.

    이달에만 세 번째 받은 요청이었다.

    돌아보니 파벨이 뿌듯한 듯 웃고 있었다. 정말 회복이 빠른 성격이다. 어째서인지 다른 귀족들이 파벨에게 감탄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준비성이 철저할 줄이야.” 누군가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전하께 친구라는 말을 듣다니.” “부러워.” “파벨 놈, 잘난 척하기는…….”

    내가 언제? 쟬 친구라고 했다고?

    그보다 너희 친구 아니었냐?

    “전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응, 그래. 고마워.”

    무심코 대답하자, 파벨은 더욱 콧대를 올리며 “별말씀을요.” 하고 말했다.

    파벨 무리 중 하나가 파벨을 질시에 가득 찬 눈으로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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