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7화 (97/293)
  • 97.

    미친 건가?

    난 슬슬 진심으로 에드워드가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네가 죽었다면 난 살아갈 희망을 잃었을 거야.”

    미친 게 맞나 보다.

    기숙사생들 사이로 그레이가 보였다. 그는 뭐 씹은 얼굴로 서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입을 열었다.

    “와, 놀라운 형제애다.”

    뭐라는 거야?

    품에서 빠져나가려는데 에드워드의 팔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날 꽉 끌어안고 있었다.

    “두 분 전하께서 정말 우애가 좋으시네.”

    “헛소문이라고 한 거 누구야?”

    “에드워드 전하의 전승 축하연에서 직접 봤다잖아.”

    기숙사생들이 수군거렸다.

    내 바로 앞에 있던 학생이 안쓰러운 얼굴로 말했다.

    “에드워드 전하, 걱정 마세요. 조프리 전하께서 이렇게 금방 깨어나셨잖아요.”

    에드워드는 고개도 들지 않았다. 그는 나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무서웠어.”

    난 에드워드를 다시 한번 밀쳤다. 팔이 나와 그의 몸 사이에 끼어 있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도 손바닥으로 미는 힘은 느꼈을 것이다. 두 몸 사이에 낀 손가락이 벌벌 떨렸다.

    에드워드는 미동도 없었다.

    그가 눈을 피하지 않아서, 난 눈싸움이라도 하듯 그를 노려봤다. 어느 날의 왕이 떠올랐다. 거부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거 놔.”

    “싫어.”

    에드워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조가 다정해서 꼭 그래, 라고 말한 것 같았다.

    팔에 힘이 쭉 빠졌다. 어이가 없어서 다시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미쳤는데 이곳에서 그 사실을 눈치챈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레이는 알고 있는 듯했지만 날 도울 마음이 없었다.

    그때 에드워드의 팔이 풀렸다. 관성 탓에 균형을 잡을 수 없었다. 난 비틀거리다가 뒷걸음질 쳤다.

    알렉스가 뒤에서 내 몸을 붙잡았다.

    “무슨 용건이십니까?”

    알렉스는 물었다. 단어 선택 때문에 그의 말은 더욱 사무적으로 들렸다.

    “조프리가 쓰러졌다고 들어서.”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쓰러지셨다고요?”

    “아니야.”

    난 사실을 알려 줬다.

    알렉스가 에드워드를 쳐다봤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난 에드워드가 다가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무언가를 할 것 같았다. 난 그를 거의 노려보고 있었을 것이다.

    “좋은 기사를 뒀구나, 조프리. 널 혼자 두는 시간이 많긴 하지만.”

    에드워드는 칭찬이라도 하듯 말했다.

    알렉스가 날 혼자 뒀다고? 언제?

    알렉스는 내 기사가 되겠다고 말한 이후로 내 그림자라도 될 것처럼 굴고 있었다.

    “조심해야지. 혼자 쓰러져서 누구의 도움도 못 받으면 안 되잖아.”

    “시정하겠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로웰이 301호의 문을 붙잡고 있었다. “전하”라고 부르는 목소리가 동아줄 같았다.

    뭐 하러 나왔을까? 저 문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상황 종료였다.

    “걱정 고마워, 에드워드. 하지만 잘못된 소문이란 건 빨리 퍼지니까.”

    난 상황을 정리할 준비를 했다.

    “그래?”

    에드워드가 대꾸했다.

    “응. 소문은 너무 믿지 않는 편이 좋잖아.”

    난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눈을 굴리며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했다.

    “306호에 귀신 같은 건 안 나와. 다들 걱정해 줘서 고마워. 이제 들어가도 될 것 같은데.”

    “예, 전하.”

    누군가 대답했다. 몇몇 학생들이 부스럭거리며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에드워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그가 다시 물었다. 뭐가 ‘그래’야? ……라고 생각했지만 에드워드는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귀신이 안 나온다고?”

    “…….”

    목덜미가 쭈뼛했다.

    에드워드는 그레이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레이는 안경을 벗었다. 그가 나를 보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

    뭔데? 그 방 진짜 귀신 나와?

    301호의 문이 닫혔다. 나와 로웰, 알렉스는 방 안으로 들어와서 잠시 침묵했다. 복도에 있던 학생들이 분분히 흩어지고 방문이 하나둘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내 생각이라도 읽은 것처럼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옆에서 로웰이 한숨을 내쉬고 약간 웃었다.

    “두 분 전하께서 우애가 좋으시다더니……”

    너까지 그 소리야?

    “……정말 무섭네요.”

    로웰의 얼굴에 웃음기가 없었다. 그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십 분 사이에 기력이 빨린 듯했다.

    “아까 나가려고 하지 않았어? 나 때문에 들어온 거야?”

    “아니요. 강의 책자라도 받아 올까 했는데 밖이 영 뒤숭숭해서요. 저녁때나 다시 나가 볼까 하고요.”

    “잘됐네.”

    난 그레이의 책자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걸 언제 가져왔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내 품 안에 있었다.

    “강의 책자 내가 가지고 있어.”

    “와. 저 읽어 봐도 돼요?”

    “응.”

    알렉스는 생각에 잠긴 듯했다.

    “알렉스?”

    “예, 전하.”

    “강의 신청 안 할 거야?”

    “전하와 같은 강의를 듣겠습니다.”

    “으응, 그거 좋지.”

    “전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겠습니다.”

    에드워드가 쓸데없는 생각을 주입하고 간 것 같다.

    로웰이 우리를 쳐다봤다.

    “그것도 좋은데, 내 생각엔 네가 요리 수업을 들으면 어떨까 하거든.”

    “아카데미에 요리 수업이 있군요.”

    알렉스가 놀란 듯 말했다.

    “없어?”

    갑자기 불안해졌다. 로웰이 책자를 팔락팔락 넘겨봤다.

    “여기 있네요, 전하. 초급요리, 중급요리…….”

    맞다. 이 게임은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다.

    “전하께서도 요리 수업을 들으십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아니라고 대답하면 안 들을 것 같은데.

    “물론이지.”

    “또 어떤 수업을 들으실 겁니까?”

    “여기 표시된 수업인가요?”

    로웰이 물었다. 알렉스가 책자를 넘겨다봤다.

    “아니. 그건 그레이가 표시한 거야.”

    알렉스는 책자에 다시 관심을 잃었다.

    “너도 읽어 봐. 관심 있는 수업 없어?”

    “예, 전하.”

    “안 읽어 봤잖아.”

    알렉스가 너무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어차피 올해는 별일 없을 텐데. 중요한 건 내년부터였다.

    그 전에 알렉스가 검술 능력치를 에드워드보다 높여 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이 있긴 했지만.

    올해 알렉스는 자유였다. 여주인공과 잘되는 것만 제외하면 뭐든 해도 괜찮았다.

    “아카데미잖아, 알렉. 또래들과 어울리는 건 거의 처음 아니야? 사교계에도 얼굴 비치지 않았잖아. 친구를 사귀어 보면 즐거울걸.”

    알렉스를 처음 본 건 열한 살 때였다. 알렉스는 자신이 몇 살인지 모른다고 했지만, 아마 그때 알렉스는 열 살 남짓이었을 것이다.

    바움쿠헨 백작은 좋은 사람이지만 백작 저에 다른 어린애는 없었다. 그런 곳에서 알렉스는 기사 수련을 하며 자랐다.

    난 백작에게 알렉스를 맡긴 게 좋은 판단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알렉스의 사교성과 정서 함양에도 좋은 판단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알렉스가 말하는 걸 들어 보면 아는 또래 귀족이 아무도 없는 게 분명했다.

    “친구요?”

    “그래. 같은 방을 쓰는 로웰이라든가…… 로웰…… 로웰은 말고.”

    본편에서 알렉스는 로웰을 싫어했다. 상성이 안 맞는 사람이란 건 있는 법이니까.

    로웰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바움쿠헨 경의 친구로 저는 마음이 안 차시나요?”

    “아니, 그건 아닌데.”

    “예. 몽블랑과는 친하게 지내지 않겠습니다.”

    알렉스가 진지하게 말했다.

    “전하?”

    로웰이 슬퍼했다.

    “음. 아니야. 로웰 몽블랑은 좋은 친구지.”

    “예, 그래요, 바움쿠헨 경. 전하께서도 저렇게 말씀하시잖아요.”

    로웰이 맞장구쳤다. 그런데 말투가 이상했다.

    “둘이 아직도 말 안 놨어?”

    기숙사 들어온 지 이틀밖에 안 되긴 했지만. 로웰과 알렉스가 서로를 쳐다봤다.

    “얼굴 볼 시간이 없어서…….”

    “예. 그렇습니다, 전하.”

    변명할 필요는 없는데.

    로웰이 갑자기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요, 바움쿠헨 경. 어차피 일 년간 같은 방을 써야 하는데 지금 말 놓을까요.”

    “예.”

    “어, 말을 놓자는 건 반말을 쓰자는 뜻이에요.”

    “알아.”

    알렉스가 대답했다.

    “아. 그래. 아는구나.”

    로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난 로웰이라고 불러도 돼.”

    “알렉스 바움쿠헨.”

    알렉스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이쯤 되니 알겠다. 얘들이 사이좋게 지낼 일은 없을 것 같다.

    알렉스는 이미 로웰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긴 둘의 상성이 나쁜 건 게임에서 못 박아 둔 설정이니까.

    로웰은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전 노력했어요’라는 것 같았다.

    딱히 둘이 친하게 지내길 바란 것도 아니었는데. 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알아.

    알렉스는 표정이 안 좋아지더니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전하. 나가서 식사를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

    너 로웰 어지간히 싫어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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