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6화 (96/293)
  • 96.

    그레이가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고 있어서 난 화제를 돌렸다.

    “그건 뭐야?”

    그레이가 읽고 있던 책자를 침대에 내려놨다.

    “강의 목록이요. 수강 신청 해야 하잖아요.”

    “나 읽어 볼래.”

    그레이가 책자를 옆으로 밀어 줬다. 난 두 침대 사이에 놓인 책상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책장을 쭉 넘기는데 강의 이름이 다 비슷했다.

    [기초검술]

    [중급검술]

    ……

    [기초정치학]

    [중급정치학]

    내가 아는 대로 재미없는 수업 목록이 펼쳐져 있었다.

    게임 속 수업 이름과 똑같았다.

    게임 플레이를 할 때 수업 난이도를 착각했던 일이 떠올랐다. 게임 시작 시점에서 여주인공은 2학년이었다.

    보통 2학년쯤 되면 기초 교과는 떼기 마련이라고 난 생각했다. 나 자신도 커리큘럼을 잘 따라가는 학생이 아니었으면서, 게임 속 주인공에겐 왜 그렇게 높은 기대치를 가졌을까?

    아무튼 여주인공이 당연히 기초 수업은 뗐을 거라고 생각했다. 첫 주가 시작되자마자 중급 수업부터 듣게 했더니, 강의료는 쭉쭉 빠져나가고 여주인공의 스트레스는 수직 상승 했다.

    수업은 계속 실패가 떠서 능력치 상승도 거의 없었다.

    여주인공에게 수업을 짜 줄 땐 무조건 기초 수업부터 시작해야 했다.

    2학년인데 왜 기초 수업부터 들어야 했을까? 나와 달리 여주인공은 성실한 고학생이었는데. 지금도 의문이었다.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사실 현실에 대입해 생각하면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서 기초 수업을 무조건 들어야 하는 그런 사소한 일은 이상하지도 않았다.

    이 게임의 스케줄은 일주일 단위로 짜였다.

    그 말은 3월 첫 주에 기초 수업을 들은 애가 다음 주에 중급 수업으로 넘어가도 된다는 뜻이었다.

    학교 수업을 뭐 이런 식으로 제멋대로 듣지? 이 학교는 커리큘럼도 없나?

    하지만 이건 게임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에드워드와의 결별 이후, 난 내가 기억하는 이 게임의 얼개를 대충 기록해 뒀다.

    혹시라도 이곳이 게임 속이란 걸 잊어버릴까 봐.

    내가 진짜 조프리라고, 현실의 일은 조프리 왕자가 꾼 이상한 꿈이었다고 생각하게 될까 봐.

    그 기록을 틈틈이 읽으며 이 세계가 얼마나 이상하고 인위적인지 되풀이해서 생각했다.

    그게 도움이 됐다. 어떤 수업이 무슨 능력치를 올려 준다거나 하는 사실을 기억하는 데는.

    조프리에게 능력치 상승이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얘 능력치를 길러서 어디다 쓰지.

    현실적으로 내게 필요한 능력치는 무력과 승마 기술 등이었다. 여차하면 나를 지켜야 할 테니까.

    건강해서 나쁠 것도 없었다. 내가 운동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검술, 궁술, 승마 강의는 내가 절대 들어선 안 되는 수업이기도 했다.

    수업에서 에드워드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

    “무슨 수업 들으려고? 생각해 둔 거 있어?”

    그레이에게 물었다.

    “행정학과 정치학은 꼭 들어야 하고, 역사랑 문학도 괜찮을 것 같아요. 그리고 교양으로 승마 정도…….”

    그레이가 책자에 체크해 둔 게 보였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그렇구나. 에드워드는?”

    “…….”

    그레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티 났을까?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에드워드의 뒤로 열린 기숙사 문이 보였다.

    이 방은 방음도 안 되면서 문은 뭐 저리 조용하게 열릴까?

    “내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 궁금해?”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

    “나한테 물어보지 그랬어.”

    “왜…….”

    에드워드가 고개를 기울였다.

    “왜 노크도 없이 들어와……?”

    에드워드는 문을 힐끗 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혔다.

    뭐 하는 짓이지?

    밖에서 누군가 노크했다. ‘누군가’라고 했지만, 누군지 물을 것도 없었다. 에드워드겠지.

    하지만 난 물었다. 혹시 모르니까.

    “누구세요?”

    “나야.”

    “나가 누군데?”

    “에드워드 비스코티.”

    “…….”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레이가 나를 한심하게 쳐다봤다.

    “들어오세요, 전하.”

    에드워드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잠금 장치를 새로 다는 게 좋겠다. 삼중으로.

    “의자에 앉으실래요?”

    그레이가 손님 맞는 태도로 물었다. 남은 의자는 내 바로 옆에 있었다.

    “고마워.”

    에드워드가 친절하게 대답했다. 난 의자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와 그레이가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난 씻어야겠어.”

    “오늘 아침에 씻으셨잖아요.”

    “알렉스랑 약속이 있는 걸 까먹었어.”

    “……알렉스 바움쿠헨을 만나는데 씻고 나가신다고요?”

    왜 일일이 태클이야?

    “생각해 보니까 씻을 필요는 없겠다.”

    난 되는 대로 책자를 들고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프리. 내가 무슨 수업을 듣는지 안 듣고 나가도 돼?”

    에드워드가 물었다.

    “응. 괜찮을 것 같아.”

    “그래?”

    에드워드는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잘 다녀와. 너무 늦게 들어오지 말고.”

    왜? 내가 일찍 들어오면 어쩌게? 여기서 기다리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목덜미가 뻣뻣했다.

    설상가상으로 문손잡이는 헛돌기만 할 뿐 제 역할을 못 했다. 잠금쇠가 걸리지 않고 덜컥거렸다. 아까 매끄럽게 열리던 문은 이 문이 아니었나?

    뒤에서 뻗어 온 손이 내 손을 잡고 힘주어 문을 열었다.

    “도와줄게.”

    에드워드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 말은 보통 도와주기 전에 하잖아.

    내가 고맙다고 대답했던가? 그 전에 대답은 했나? 쾅 닫을 뻔한 문을 가까스로 속도를 줄인 것만 기억났다.

    복도를 달려 301호에 도착하자 마침 문이 열리고 있었다.

    “알렉스!”

    “전하?”

    방에서 나온 건 로웰이었다.

    “로웰? 이 방이야?”

    “예, 전하. 무슨 일 있으세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셔서…….”

    로웰은 무언가 깨달은 듯했다.

    “귀신이 나왔군요?”

    “귀신이라고? 왕자 전하께서 귀신을 목격하셨다고?”

    303호의 문이 열리고 파벨이 고개를 내밀었다.

    “끝 방에서 귀신이 나왔대! 왕자 전하께서 보셨다는데?”

    “왕자 전하께서 귀신을 보고 기절하셨다고?”

    “귀신 때문에 왕자 전하가 심장 마비에 걸리셨다고?”

    복도의 문이 벌컥벌컥 열렸다. 기숙사생들은 놀라울 정도의 단결력으로 기절한 왕자를 구경하러 나왔다.

    난 로웰을 방으로 밀어 넣고 301호의 문을 닫았다.

    나야말로 남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로웰은 따질 자격이 없었다.

    “앗. 전하. 전하께서 죽지 않으셨다고 알리고 올게요.”

    로웰이 말했다.

    “됐어. 아무것도 하지 마.”

    “하지만 곧 전하의 장례식이 치러질 것 같은데요?”

    “누구 때문인데?”

    “죄송해요, 전하. 예전부터 파벨레 상송이 끼면 되는 일이 없었어요.”

    로웰은 죄를 전가했다.

    “아, 정말?”

    “예. 외국에서 만들어진 제 소문의 반은 파벨 탓이라니까요.”

    그럴 리가.

    둘이 어지간히 친한 모양이다.

    알렉스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샤워실의 물소리가 뚝 끊기더니 문이 열렸다. 알렉스가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며 나왔다.

    상의를 벗고 있었다. 엄청난 근육이다. 그보다 눈에 들어오는 건 전신에 빼곡한 흉터였다.

    “안녕, 알렉스.”

    “전하?”

    알렉스는 머리를 털다 말고 수건으로 가슴팍을 가렸다.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뚝뚝 떨어져서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전하께서 왜 여기에…….”

    “머리를 닦는 게 낫지 않아? 카펫 다 젖고 있는데.”

    “죄송합니다.”

    그는 수건을 머리로 가져가더니 얼굴을 가렸다. 아니,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 알아서 하겠지.

    알렉스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전하.” 하더니 물기 터는 강아지처럼 머리를 탈탈 털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이 수건을 쥐고 머리의 물기를 제거하는데 기세가 굉장했다.

    나랑 로웰은 멍하니 알렉스를 쳐다봤다.

    알렉스가 등을 돌렸다.

    “저…… 옷을 입겠습니다, 전하.”

    “응, 그래.”

    알렉스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며 수건으로 다시 몸을 가렸다.

    “고개를 돌려 달라는 뜻 같은데요, 전하.”

    로웰이 말했다.

    “아, 미안. 나 나가 있을까?”

    “아니요, 전하.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렉스가 당황해서 말했다.

    나가 줬으면 하는 것 같은데. 난 그냥 밖으로 나갔다.

    알렉스가 샤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레이는 갈아입을 옷을 욕실까지 가져가는 것 같던데. 알렉스는 벗고 나왔으면서 묘하게 낯을 가렸다.

    같은 방을 쓴다고 벌써 로웰과 더 친해진 건가?

    문 너머로 로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알렉스가 뭐라고 하자 그는 조용해졌다.

    301호와 달리 복도는 시끄러웠는데, 기숙사생들이 전부 복도로 뛰쳐나온 듯했다. 누군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환해졌다.

    “전하! 살아나셨군요!”

    “나 언제 죽었어?”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는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학생들마다 “전하!” 하고 외쳐서 방금 관에서 일어난 기분이었다.

    “조프리.”

    그때 학생들을 홍해처럼 가르고 에드워드가 다가왔다.

    그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았다.

    “놀랐잖아.”

    “…….”

    누가?

    심장이 멎는 듯했다.

    맞닿은 몸으로 에드워드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느껴졌다.

    “네가 죽었다고 해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

    에드워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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