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런 왕자를 지키는 건 알렉스의 몫이었다.
조프리 왕자는 알렉스를 받아들였다. 알렉스가 기사의 맹세를 하도록 허락했다.
알렉스는 처음에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왕자의 뒤에 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스스로 생각하던 것보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델라를 부축해 줄 수 있어? 병동까지.’
‘아시는 분이었습니까?’
‘오늘 처음 봤어.’
가슴이 울렁거렸다.
왕자는 부딪힌 여학생이 자기소개를 하기 전부터 이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렉스에게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말해 줄 필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알렉스가 올해 입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던 것처럼, 무슨 생각이 있으셨을 것이다.
왕자 전하는 영민한 분이니까. 알렉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상황에 휘둘리기만 했던 시절에, 병사들을 움직여 알렉스를 구해 낸 분이었다.
강당에 학생들이 모두 들어서자 입학식이 시작됐다.
수석 입학자가 단 위로 호출됐다. 학생들의 머리 너머로 눈부신 금발이 앞으로 움직였다.
웅성거리던 학생들이 차츰 조용해졌다. 에드워드 왕자가 계단을 올라 단 위에 서자 강당은 바늘 떨어지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정적에 잠겼다.
단 위에 선 사람이 에드워드 왕자라는 사실을 알아서가 아니었다. 에드워드 왕자에게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고 알렉스는 그의 곁에서 자주 이런 순간을 목격했다.
이렇게 눈에 띄는 사람이 지금껏 아무 소문도 없었다는 게 이상할 만큼 에드워드 왕자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학생 선서를 읽는 동안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알렉스는 사람들이 숨을 멈추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학생들은 빨려 들어갈 듯 에드워드 왕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조프리 왕자를 돌아봤다. 그는 까만 눈동자로 에드워드 왕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태도 좋은 학생처럼 보였다. 단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자신의 형제나 경쟁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여상스러운 태도였다.
조프리 왕자는 차석이었다. 들은 얘기일 뿐이지만, 그가 수석을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우수한 답을 제출했다고 했다.
‘아무래도 조프리 전하께서는 기분이 좋지 않으시겠지.’
‘총명한 분이라는 소문이 아니던가?’
‘글쎄, 아카데미 공부는 상재와 다른 분야 아니겠어.’
전하께서는 듣지 못하셨을까?
강당으로 들어설 때 학생들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들은 두 왕자의 왕위 경쟁이 시작된 것처럼 말했고 바움쿠헨 백작의 생각도 비슷했다.
에드워드 왕자가 알렉스를 경계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몰랐다.
하지만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 왕자에게 경쟁심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왕자를 가장 가까이서 모신 도트조차 ‘왕자님 앞에서 에드워드 전하 이야기는 꺼내지 말라’고 충고했지만.
실제로 왕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렉스는 알 수 없었다. 왕자는 알려 주지 않을 것이다.
지금 알렉스는 왕자를 걱정해야 하는 건가?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떠드는 자들을 무시하면 되는 건가.
알렉스는 바람대로 왕자를 지키게 되었지만 자신이 왕자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왕자는 성장한 알렉스를 한 침대에 재울 정도로 경계심이 없었고 우는 사람에게 아무렇지 않게 손을 내밀 정도로 친절했다.
조프리 왕자가 알렉스를 받아들여 준 게, 그가 자격을 갖췄기 때문일까?
그가 바보같이 울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알렉스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왕자에게 어떤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쓸모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노력할 뿐이었다.
학생 선서가 끝나자 강당 가득 박수 소리가 울렸다. 조프리 왕자도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가 단에서 내려왔다.
에드워드가 내려온 뒤에야 학생들은 조프리 왕자를 돌아봤다. 알렉스는 굴러가는 눈동자가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사방에서 자신을 힐끔거리고 있는데도 조프리 왕자는 태연해서 알렉스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얼굴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알렉스는 조프리 왕자의 옆모습을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에드워드 왕자는 조프리 왕자의 경쟁자인가? 아니면 형제인가. 어릴 적 두 사람은 세간에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이좋은 왕자였다.
조프리 왕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
난 망했다.
망했다고 늘 생각하고 있었지만, 내 상상 이상으로 망한 게 틀림없었다.
에드워드는 수석으로 입학해 신입생 대표로 학생 선서를 읽었다. 2왕자 조프리는 차석을 차지해 단 밑에서 에드워드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 친근하고 끔찍한 설정은 뭘까?
진심일까?
도대체 누가 조프리 같은 거한테 차석을 준단 말인가?
아카데미가 왕자들에게 입학 특혜를 준 게 아닌가 싶었다. 웃으면서 손뼉을 치는데 속으로 망했다는 말이 이중창으로 울려 퍼졌다.
입학시험을 걱정하긴 했다. 수석을 차지하고 싶다거나 조프리처럼 차석을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합격하지 못할까 봐.
아카데미에는 별 인재가 다 모인다더니 거짓말이었다.
아니면 역시 비리가 있다.
학생들 이름을 가려 놓고 채점한다고 맹세했지만, 실은 아니었던 것이다.
왕자들이 입학시험을 치르는데 어떻게 일개 학생을 수석으로 올릴 수 있냐고 내부 논의가 있었던 거 아닐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다. 신분제 사회의 폐단이 따로 없었다.
에드워드가 수석인 건 그렇다 치고, 적어도 차석은 그레이가 차지해야 했다.
그레이는 내게 일종의 과외 선생님 같은 존재였다. 활자 중독 기질이 있는 그레이는 내 서재에서도 쉴 새 없이 책과 논문을 읽어 댔다.
난 그렇게 공부할 자신은 없었다.
사실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라 가능하냐 불가능하냐의 문제 같기도 했다.
그레이에게 지식을 익히는 건 습관이나 놀이에 가까웠다. 예전에 공자님 말씀에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 뭐 그런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레이를 보면 그 말이 떠올랐다.
그렇게 책을 읽어 대던 그레이는 덕분에 시력이 떨어졌다. 지금은 책에 집중할 때면 안경을 썼다.
기숙사로 돌아가자 안경을 쓴 그레이가 나를 맞이했다. 그는 얇은 책자 같은 걸 읽고 있었다.
몹시 한가해 보였다.
난 문을 닫고 물었다.
“입학식 안 나갔어?”
“갔어요. 뒤에 서 있다가 좀 빨리 돌아온 거예요.”
그레이가 책자를 넘겼다.
“에드워드가 수석으로 인사 하는 거 들었어?”
“예. 훌륭하시던데요.”
“내가 차석인 건 알아?”
“예.”
“이상한 점 없어?”
“뭐가요?”
“왜 네가 차석이 아니야?”
“지금 화내시는 거예요?”
그레이가 고개를 들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투였다.
“이상하잖아. 넌 불만도 없어? 저 왕자가 내 제자라고 왜 말을 못 해? 아무리 생각해도 네가 수석이나 차석이 아닌 건 비리가 있잖아.”
“뭐가 이상해요? 애초에 전 적당히 합격만 하게 답안을 써 냈는데.”
“뭐? 왜?”
“제가 좋은 성적을 받아서 뭐 하게요?”
좋은 성적을 받는 데 이유가 있나?
“부모님께 자랑할 수 있잖아.”
“……그런 이유로 시험을 치른다고요?”
“아니야?”
“시험은 배움을 확인하는 용도잖아요?”
그레이가 모범생 같은 말을 했다. 시험에 대한 사전적인 정의라면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자기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 보는 학생이 흔한가?
“제가 제 실력으로 시험 보면 당연히 수석이나 차석일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내가 생각할 게 있어? 사실이잖아.”
“흠.”
그레이는 약간 웃었다. 안경을 올리는 척하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다 보였다.
봐. 너도 자랑하는 거 좋아하면서.
“전하께서는 자랑스러우시겠네요. 차석이시잖아요.”
그레이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네가 배움을 확인하는 용도로만 시험을 치르는 바람에 그렇게 됐네.”
“이상하게 말씀하시네요. 자랑스럽진 않으세요?”
“왜 아니겠어?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인데.”
성적을 듣는 순간 소름이 발끝까지 돋았다.
조프리는 어떻게 해도 차석인 건가 싶어서.
에드워드의 비교 대상도 될 수 없도록 조프리의 가치를 떨어뜨리자는 건, 성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난 조프리처럼 아등바등 에드워드를 이기기 위해 노력할 생각은 없었다.
노력의 결과 조프리는 차석을 차지했다. 차석이라고 하면 ‘그렇군’ 싶지만 사실 전교 2등이다.
난 그만한 결과를 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됐다. 남들 눈에 차석이나마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까.
왕비님은 그것만으로 조프리에 대한 희망을 버릴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입학시험에서 차석. 첫발부터 잘못 디뎠다. 이 소식은 당장 왕비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왕비님이 기뻐할지 반대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왕비님은 내가 어쩌면 에드워드를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리라는 점이다.
수석과 차석은 종이 한 장 차이로 보이니까.
차석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어쩌면…….
왕비님은 기대할 것이다. 희망은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다. 앞으로 일 년. 왕비님의 기대와 실망은 반복될 테고, 그렇게 해서 본편의 조프리는 완성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