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4화 (94/293)
  • 94.

    “이 방에 배정된 게 알렉스 바움쿠헨이 아니라 전하가 맞나 보네요.”

    그레이가 손으로 이마를 식히며 확인했다.

    알면서 왜 물어볼까?

    알렉스가 내 짐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는 정리를 돕고 싶은 듯했지만 정말로 그가 도트 역할을 할 필요는 없었다.

    나중에 내 개인 시종이 되려는 게 아닌 한에야.

    “바래다줘서 고마워, 알렉스. 너도 들어가서 쉬어.”

    “예, 전하. 저녁 시간에 맞춰 모시러 오겠습니다.”

    알렉스가 나갔다.

    난 문을 닫고 빈 침대에 앉았다. 2인실은 생각보다 널찍해서 침대 두 개가 들어가고도 두 개의 옷장과 책상, 욕실 하나까지 딸려 있었다.

    그레이는 생각하는 사람 같은 포즈를 그만두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댔다. 벽에 등을 대고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그레이. 입학식에서보다는 빨리 만났네.”

    “실망하셨어요?”

    그레이가 물었다.

    “널 일찍 만나서 실망했냐고?”

    실망은 네가 한 것 같은데.

    “아니요. 제가 연회장에서 전하께 안 돌아가서요.”

    언제 적 이야기를 하는 건가 싶었다. 그레이가 꼼꼼한 성격이긴 했다.

    서운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레이는 조프리에게 꽤 잘했다.

    그레이의 기준에서 잘했다는 뜻이다. 그가 사람을 다정하게 챙기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조프리에겐 다정히 굴었고, 난 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에드워드가 돌아오면 언제고 사라질 관심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신경 쓰였던 걸까? 나보고 연회장으로 나오라고 꼬셔 놓고 못 챙겨 줘서.

    “왜, 내가 혼자 있어서 외로워 보였어?”

    웃으면서 묻자, 그레이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혼자 계시지 않았잖아요? 알렉스 바움쿠헨이 전하 곁에서 떨어지지 않던걸요.”

    “나 인기 많다고 했잖아.”

    “예. 정말로요.”

    그레이는 한숨을 쉬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듯한 표정이 점점 구겨지더니 그가 이내 짜증을 냈다.

    “왜 골라도 이 방을 고르신 거예요? 위치도 별로고 소문도 별로잖아요?”

    “내가 안 골랐어! 너도 배정받고 올라왔잖아?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로웰 마술 쓰는 소리 하고 있다. 선을 긋고 싶으면 네 쪽에서 노력했어야지! 조프리 잘못이야?

    “왕족의 권위로 무시하실 수도 있었잖아요.”

    “나보고 이미지 챙기라고 할 땐 언제고?”

    “아, 몰라요. 제가 안 챙겨 드려도 알아서 이미지 잘 챙기고 계시잖아요.”

    그레이는 먼저 씻겠다며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뭐 저런 성격이 다 있나 모르겠다.

    기숙사는 방음이 아주 잘되는 편은 아니었다. 욕실 문이 닫히고 샤워기에서 물 트는 소리가 침대에 파묻힌 귀로 들렸다.

    옆방에서는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는 듯했다. 보통 새로운 룸메이트를 맞이한 학생들이라면 저렇게 행동할 것이다.

    그레이는 내가 룸메이트인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지만, 나라고 그가 기꺼운 건 아니었다.

    싫어해야 하는 쪽은 내가 아닌가?

    그레이와 에드워드를 떼 놓고 바라보기는 어려웠다. 에드워드가 조프리 소식을 어디서 세세하게 듣고 있었을까?

    답은 지금 욕실에서 씻고 있는 사람이 알 것이다.

    그레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면 들어가자. 씻고 저녁을 먹자.

    신발만 벗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물줄기 떨어지는 소리가 빗소리 같았다.

    걱정하던 일도 해결됐고 여주인공도 만났다. 아직 게임 본편까지 일 년이란 시간이 남았는데도 신경이 남아나질 않았다.

    여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소리를 할 때는 정말 어떻게 되는 건가 싶었다.

    해결돼서 다행이다. 아카데미 합격까지 했는데 그래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이상한 생각은 안 하겠지.

    여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가도 우울한 일만 기다릴 뿐이다. 이델라는 자기 집을 정말 싫어했다.

    싫어할 만한 집이었다.

    이제 그녀는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병행하면서 눈코 뜰 새 없이 살 것이다. 졸업만 하면 전문직을 얻어 가족들을 부양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자기만 신경 써도 될 텐데. 왜 그렇게 착할까?

    어차피 내년 초가 되면 망가질 미래 계획이지만.

    게임을 하면서 난 그녀가 안쓰러웠고 답답했다.

    그래서.

    그랬기 때문에…….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러브 트랩 메리지>에 돌아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플레이어님.』

    『행복한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 * *

    알렉스 바움쿠헨은 강당으로 들어섰다. 입학식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강당을 가득 메워서, 그는 조프리 왕자를 보호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왕국은 유례없이 희망적인 분위기 속에 봄을 맞았다. 희망을 견인하는 바퀴는 두 명의 왕자였다.

    에드워드 비스코티 1왕자와 조프리 비스코티 2왕자.

    에드워드 왕자의 빛나는 전공은 말할 것이 없었다. 알렉스는 가까운 곳에서 에드워드 왕자를 겪었다.

    알렉스는 에드워드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지 못했다. 다른 귀족들과 마찬가지였다. 알렉스가 귀족 사회에 전혀 연이 없긴 했지만, 그가 파티에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이었다고 해도 에드워드에 대한 소문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에드워드에 대해서는 추문조차 제대로 돌지 않았다. 누가 지워 놓은 것처럼. 그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왕자였다.

    에드워드의 이름이 갑작스레 퍼지기 시작한 건 출전을 앞두고서였다. 왕성에 출입하는 귀족이 에드워드라는 영리한 왕자에 대해 말하고 다녔다.

    바움쿠헨 백작은 이제 시작일 거라고 말했다.

    알렉스는 에드워드를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왕성으로 끌려갔을 때 그를 만났다.

    알렉스는 그때 성을 빠져나가려고 샛길을 찾고 있었다. 그때 왕자라고는 절대 생각할 수 없는 어떤 아이가 알렉스를 불렀다.

    ‘너 왕성 사람 아니지?’

    그러더니 단번에 알렉스를 제압하고 정체를 물었다.

    알렉스는 ‘왕자에게 잡혀 왔다’는 정보를 토해 내고서야 바닥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알렉스를 놓아준 게 아니었다.

    알렉스의 뒷덜미를 잡고 어딘가로 질질 끌고 갔다.

    알렉스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병사들에게 붙잡힐까 봐 그러지도 못했다.

    상대가 알렉스를 끌고 간 곳은 어떤 정원이었다. 상대는 익숙하게 뒷길로 정원에 들어가서 조프리 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알렉스는 상대가 무서웠다.

    그가 알렉스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거나 폭력적이어서가 아니었다. 망설임 없이 폭력을 사용하면서도 그가 어떤 악의나 사감을 보이지 않아서였다.

    대개 알렉스를 때리는 사람은 그를 굴복시키는 과정에서 저열한 쾌감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알렉스를 제압한 상대는 어떤 감정도 느끼는 것 같지 않았다.

    그에게 폭력은 쉬운 수단이었고 그는 도구를 사용하듯 감흥 없이 알렉스를 때려눕힌 듯했다.

    알렉스에게 그날의 기억은 꺼림칙하게 남아 있었다.

    에드워드를 다시 만난 건 출정일이었다. 그는 알렉스를 무감정하게 쳐다보고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는 에드워드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국경에서 알렉스는 에드워드의 곁을 지켰다. 조프리 왕자는 에드워드 왕자의 곁이 안전할 거라고 말했고 알렉스에게 안전한 곳에 있으라고 말했다.

    조프리 왕자의 말은 반만 맞았다. 에드워드 왕자는 병사들에게 보호받고 있었으나, 그 자신이 목숨을 버리려는 것처럼 위험한 상황에 뛰어들어서야 보호가 소용없었다.

    알렉스는 필사적으로 에드워드에게 따라붙어야 했다.

    알렉스는 조프리 왕자가 에드워드를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치는 잘 몰랐다. 바움쿠헨 백작이 복잡한 일이라며 에드워드의 존재를 꺼리는 건 알았지만 그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듣지 못했다.

    에드워드 왕자를 지켜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에드워드가 죽으면 조프리 왕자는 슬퍼할 것이다.

    병사들은 험지에 뛰어드는 에드워드 왕자가 명예를 아는 기사라고 생각했다. 알렉스의 견해는 달랐다.

    에드워드 왕자는 집요하게 자신을 내모는 듯했다.

    그 길에 알렉스가 따라붙으면 새파란 눈동자로 잠깐 바라볼 뿐이었다. 네가 따라올 줄 알았다는 듯이.

    알렉스는 그 모습에서 기묘한 인상을 받았으나 자신의 느낌을 정리할 단어를 알지 못했다.

    반년의 전쟁이 끝나고 에드워드는 무명을 얻었다.

    거리에서는 아이들이 에드워드에 관한 노래를 불렀고 에드워드의 이름은 과거의 위인을 환기시켰다.

    가진바 무력으로 경외를 얻은 에드워드와 반대로 조프리 왕자는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는 자선 행사에 참여해 자주 큰돈을 기부했다. 노예를 구제하고 그 가족들을 돌봤으며 무역에서 큰 성과를 거뒀고 선원의 대우를 바꿨다.

    초겨울에는 정원 공사를 벌여 일 없고 가난한 백성들이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했다.

    조프리 왕자가 주도한 정원 유행은 전국으로 퍼졌고, 귀족들은 왕자를 따라 정원 공사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인부에게 쓰는 돈도 후하게 쳐 주는 것이 관례가 되어 백성들은 숨통이 트였다.

    조프리 왕자는 자주 시장 잠행을 나갔는데 백성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초기에 왕자에게 거금을 뜯어내던 상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총에 못 이겨 잘못을 사죄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들인 돈 역시 돌려 드리겠다고 했으나 왕자는 받지 않았다.

    ‘그 가격이 적정가였어. 앞으로도 내겐 그렇게 받아 내도록 해.’

    ‘예? 전하? 그러하시면 저희에게 처벌은……’

    ‘무슨 처벌? 칭찬을 해도 모자란데. 난 돈 쓰는 걸 좋아하거든.’

    ‘예?’

    ‘그대들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파는 훌륭한 상인이더군. 다른 사람들한테만 안 그러면 돼.’

    관대한 처사에 감복한 상인들은 왕자에게 취득한 폭리를 구휼원에 기부했다.

    백성들은 에드워드 왕자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조프리 왕자를 사랑했다.

    알렉스는 그런 조프리 왕자를 모시고 있었다.

    가까이서 모시게 된 조프리 왕자는 온화하고 무른 성품이었다.

    어릴 적에 뵈었을 때도 그랬고, 멀리서 소문을 들으면서도 짐작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직접 모시니 상상 이상이었다.

    암살자가 부랑자인 척 ‘나리, 한 푼만 도와주십쇼.’ 하면 의심 없이 다가가시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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