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3화 (93/293)
  • 93.

    이델라는 고개를 몇 번이나 숙이고 사라졌다. 안도감에 떠밀려 그 순간에는 인사를 받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이델라에게 해 준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갑과 옷에 대한 약속도 흐지부지됐다. 이델라가 나중에 날 찾아와서 그걸 청구할까?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아카데미에서 이델라를 다시 찾아내 그것들을 사 주겠다고 말하기도 뭐했다.

    이델라가 조프리를 잊을 수 있는 기회를 내 발로 걷어차는 꼴이 될 수도 있으니까.

    이델라는 조프리를 언제 잊어 줄까?

    차라리 배상을 안 하는 쪽이 조프리를 안 좋게 여기는 데 도움 되지 않을까? 안 좋은 기억을 굳이 계속 간직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앗, 결국 이것들은 물어 주지도 않았잖아? 조프리 왕자는 참 싫은 사람이었어’ 정도의 감상만 얻어도 이델라는 날 잊어 줄지 모른다.

    문제는 이델라가 가진 재산이 정말 없다는 점이었다.

    내가 이델라의 옷차림을 망쳐 놓고 입을 싹 닫아 버리면, 이델라는 학교에서 입을 거의 유일한 옷을 망친 채 입학하게 되는 상황일지도 몰랐다.

    싫은 사람이 되는 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아시는 분이었습니까?”

    알렉스가 물었다. 나와 이델라가 자기소개하는 모습을 뻔히 봤을 텐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오늘 처음 봤어.”

    “……그렇군요.”

    알렉스가 찜찜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델라에게 관심이 생겼나?

    게임 공략 캐릭터들은 거의 만나자마자 이델라에게 관심을 보였다. 연애 게임이니까 당연할 것이다.

    캐릭터 설정부터 이델라라는 인물에게 관심을 갖도록 되어 있다면, 원작 배경이 시작되지 않은 시점이라도 알렉스가 이델라에게 호감을 느낄 수 있었다.

    “좋은 사람 같지?”

    슬쩍 떠보자 알렉스의 표정이 아리송해졌다.

    “예.”

    “으으음, 그래.”

    진짜 호감이 생겼나?

    알렉스가 끼어들어서 자기 이름을 밝히던 게 떠올랐다.

    이델라에게 자신에 대한 기억을 심어 주고 싶었나?

    메인 스토리를 꼬고 싶지 않은데. 역시 이델라랑 부딪히는 게 아니었다.

    사방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여주인공이나 공략 캐릭터들이 출몰하지 않는지 신경 썼어야 했는데.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었다. 남자 기숙사 건물에 도착하자, 이미 합격을 확인한 학생들이 방을 배정받고 있었다.

    기숙사장으로 보이는 상급생 옆에 휘황찬란한 기계가 보였다.

    저거 로또 추첨 공을 뽑는 기계 아닌가?

    동그란 유리통 안에 가벼운 공들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오버 테크놀로지인지 아닌지 아리송한 기계에서 공이 튀어나왔다.

    기숙사장이 공의 숫자를 보고 말했다.

    “303호.”

    “으으음…….”

    “이름 뭐야?”

    “파벨레 상송.”

    파벨이 대답했다. 기숙사장이 기록부에 이름을 기입하더니 “다음” 하고 말했다.

    파벨은 바로 올라가지 않고 로웰에게 가서 쑥덕거리고 있었다.

    “야. 너도 303호 배정받아.”

    “내가 마술사야? 무슨 수로?”

    “마술이나 연금술이나. 비슷한 거잖아.”

    “연금학이거든? 그 둘을 혼동하는 너 같은 머저리가 아직도 있다니…….”

    “뭐? 머저리?”

    둘이 티격태격하는 걸 보다가 내 차례가 다가왔다.

    아카데미의 기숙사는 평등한 방식으로 배정된다. 왕자라고 득 볼 것도 해될 것도 없었다.

    뽑기로 배정하니까.

    유리통 안에서 공이 사방으로 튀고 있었다. 직관적으로 평등한 방식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기숙사장은 내 얼굴을 확인하고 “이름…….” 하고 물으려다가 허리를 세웠다.

    “조프리 왕자 전하.”

    그는 나를 아는 사람이었다. 이미 내 존재를 눈치챈 학생들도 있어서 소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작은 목소리도 여럿이 모이면 엄청난 웅성거림으로 느껴지는 효과를 다시 체감했을 뿐이다.

    기숙사장이 말했다.

    “죄송하지만 전하도 배정을 거치셔야 합니다. 규정이어서요.”

    그는 난처한 듯했다. 그가 내 어깨 너머를 곁눈질했다.

    알렉스와 같은 방에 배정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알아. 내 방도 배정해 줘.”

    “예, 전하.”

    기숙사장은 지금까지의 심드렁한 태도를 버리고 정중하게 공을 뽑았다. 그런다고 특별한 숫자가 나올 것 같지 않은데.

    알렉스 방도 배정이 안 됐는데, 내 방 배정에 신중을 기한다고 뭐가 다를까?

    “306호입니다, 전하.”

    기숙사장이 면목 없다는 태도로 말했다. 구경하던 상급생 몇이 신음 비슷한 걸 냈다.

    “안 좋은 방이야?”

    “예? 아닙니다, 전하.”

    “반응이 왜 그래?”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기숙사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 방은 끝 방입니다, 전하.”

    “외풍이 들어?”

    방이 나쁠 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곰팡이가 슬진 않았겠지. 귀족들이 자는 기숙사인데.

    “네? 음? 조금 들지도 모릅니다.”

    “다른 문제가 있구나?”

    “네, 전하. 사실 그 방은…… 소문이 있습니다.”

    기숙사장이 주변을 살펴보고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문?”

    “그…… 뭔가 나온다는……. 죄송합니다, 전하.”

    “아니야. 알려 줘서 고마워.”

    귀신보다 외풍이 무섭지 않나? 기숙사장의 우선순위가 이상했다.

    “세상에, 끝 방에 전하가…….”

    “방을 바꿔 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수군거리고 있었다.

    ……귀신 진짜로 나오는 거야?

    현실 세계였다면 신경도 안 쓰였을 텐데 여긴 게임 속이었다. 귀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소동 여자 기숙사에는 없었던 것 같지만.

    이 게임은 엑스트라에게도 이상한 설정 부여하는 걸 좋아해서 방심할 수 없었다.

    역시 알렉스가 같은 방인 게 좋겠다. 난 옆으로 물러서서 알렉스를 지켜봤다.

    알렉스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가 미간을 좁히면 평소의 무뚝뚝하고 성실한 얼굴이 날카로워졌다.

    기숙사장은 나를 배정하던 때보다 훨씬 신중하게 공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공은 스매싱에 맞은 셔틀콕처럼 유리벽을 퍽퍽 치며 날아다니고 있었다. 지켜본다고 공의 숫자를 읽을 수 있으면 그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매일 것이다.

    기숙사장은 짐승 같은 시력의 소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306호를 다시 골라내지 못했다.

    “……301호입니다, 전하.”

    기숙사장이 나를 보고 말했다.

    배정받은 알렉스도 나를 돌아봤다. 왜 나한테 그래?

    “301호면 내 방에서 많이 먼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물었는데 벽에 붙어 있던 상급생이 냉큼 대답했다.

    “끝과 끝입니다, 전하.”

    “쟤는 전부터 배정에 재능이 없었습니다, 전하.”

    다른 상급생이 말했다.

    기숙사장은 망연자실해서 자기가 뽑은 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내게 다가왔다. 귀에 입을 대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허락하신다면 재빨리 공을 바꿔 오겠습니다.”

    “이미 다들 봤는데 뭘 바꾸겠다는 거야…….”

    모인 학생들이 죄다 ‘전하께선 306호시라고?’, ‘끝 방이시래.’, ‘호위 기사는 301호?’, ‘끝과 끝이래.’ 같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방금 기숙사에 들어온 남학생이 어리둥절하게 주변을 둘러봤다. 무슨 일이 난 거냐는 표정이었다.

    먼저 들어와 있던 학생이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저런.”

    남학생이 나와 알렉스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조금만 있으면 교내의 모든 사람이 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까지 왕성의 소문 전달 과정이 궁금하곤 했는데. 아카데미에 와서 알게 될 줄은 몰랐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남학생이 다음에 들어오는 학생에게 또 알려 주고 있었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는 중이었다.

    “306호는 이미 배정된 학생이 있습니다. 문이 열려 있을 테니 올라가시면 됩니다, 전하.”

    기숙사장이 설명했다.

    알렉스가 나보다 먼저 계단을 올라가려고 했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먼저 가서 뭐 하게?”

    “306호의 다른 학생을 설득해 보겠습니다, 전하.”

    “도트한테 이상한 거 배우지 마…….”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알렉스는 정정당당하고 성실한 성품이었다. 규칙을 지키고 윤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아이는 빛의 속도로 배운다는데, 도트와 너무 오랜 시간을 붙여 놓았던 것 같다. 설마 며칠 만에 캐릭터가 바뀔 줄은 몰랐다.

    “기숙사 배정에 특혜가 없는 건 아카데미 교칙이야. 알고 있잖아. 학생들 간의 평등.”

    “예, 전하.”

    알렉스의 캐릭터를 회복시켜 줘야 할 텐데. 도덕성과 성품을 올리려면 역시 요리 수업이었다.

    불만에 찬 알렉스와 계단을 올라갔다. 알렉스는 306호까지 나를 바래다주겠다며 따라왔다.

    기숙사 복도는 오래된 장소라는 느낌이었다. 방은 모두 2인실.

    공략 캐릭터들과 같은 방을 쓰는 사람이 누군지는 게임에 나오지 않았다. 게임에서는 여자 기숙사에서 여주인공이 묵는 방만 보여 줬으니까.

    여주인공과 같은 방을 쓰는 친구 캐릭터는 여주인공이 모르는 교내의 다양한 소문이나 이벤트를 알려 주는 역할이었다. 약간 도트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알렉스가 306호 문을 열었다.

    “어?”

    “……전하?”

    문을 열자마자 그레이가 보였다. 그는 나를 보고 설마 하는 표정이 되더니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래. 나도 반가워.”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안 그래도 너 에드워드 편인 거 알거든. 그래도 쌓아 온 정이 있는데 바로 거리 두기냐.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