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합격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어?”
여주인공에게 물었다. 그녀는 울음을 멈춘 상태였는데,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숙이더니 다시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역시 문제는 나였다! 멀쩡하던 애가 왜 내가 입만 열면 울지?
“대답 안 해도 돼. 울지 마.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 안 되지만!
내가 뭐라고 하는지 믿을 수 없었다. 여주인공이 아카데미에 없으면 이건 뭐가 되는 걸까?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 아니잖아?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두고 여주인공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전하. 확인할 필요도 없어요. 제가 불합격하리라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합격자 명단 확인 안 했어?”
“안 해도 괜찮아요. 저 이제 알 것 같아요. 제가 뭘 해야 될지를요.”
“뭘 할 건데?”
명단 확인 안 했다. 희망을 품기도 전에 여주인공의 말이 이어졌다.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여주인공이 젖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고향에 돌아가서, 제게 허락된 일을 할 거예요. 헛된 희망을 좇는 일은 그만둘래요.”
“네게 허락된 일?”
“고향에서는 뭔가……. 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 온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부딪혀서 깨지지 않았다면, 전 평생 후회를 품고 살았을 거예요.”
여주인공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후회는 없고 낙향할 일만 남았다는 듯이.
난 더 두고 볼 수 없었다.
“명단 확인하고 올게.”
“전하?”
“기다려. 어디 가면 안 돼.”
“제 짐 전하께서 가지고 계시는데요…….”
여주인공이 놀란 와중에도 그 사실을 지적했다. 아, 그래. 어차피 못 가겠네. 여주인공이라면 여기 든 게 전 재산일지도 몰랐다.
그런 걸 내가 끌어안고 있는 건가?
“돌려줄게. 그래도 가면 안 돼.”
여주인공 품에 짐 가방을 들려 줬다. 알렉스는 짐 가방을 끌어안은 여주인공을 안고 있는 꼴이 됐다.
짐이 추가된다고 알렉스가 무거워할까?
표정을 살펴봤는데 끄떡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
난 거대한 인파를 바라봤다. 사람이 바글거렸다.
명단을 확인하려면 가장 앞줄로 가서 수많은 이름을 살펴보며 그 안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내야 했는데, 그마저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밀리고 밀치는 아수라장이었다.
그래도 아까에 비하면 사람이 좀 줄었다. 난 심호흡을 하고 그 사이를 뚫고 들어가려고 했다.
여주인공이 물었다.
“그런데 전하, 제 이름 모르시잖아요? 그냥 가시려고요?”
네 이름을 왜 몰라? 이델라잖아.
하마터면 혀를 깨물어 버릴 뻔했다.
알렉스가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이델라를 안고 있었다. 자세가 안정적이었다.
안 힘든 모양이다.
난 좀 힘들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몇 번을 내려앉는지 모르겠다.
이델라의 이름을 말해 버렸으면 정말 이상한 취급 받아도 할 말 없었다.
“응. 모르지.”
태연하게 말하자, 이델라가 벙긋 웃었다.
“이름도 안 물어보고 가시면 어떡해요. 어떻게 확인하시려고요.”
내가 이상하다는 눈빛이었다. 울어서인지 눈이 반짝거렸다.
난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지금 알려 주면 되잖아.”
“저는 이델라 에클레어예요, 전하. 저, 정말로 이름을 확인하러 가시게요? 저 때문에 그러실 필요 없어요.”
괜한 고생이라는 표정이 얼굴에 선했다.
왜 이렇게 자신이 없지? 이델라는 공부를 시키면 시키는 대로 성적이 나오는 좋은 학생이었다.
스트레스가 일정 수치 이상 쌓이지 않으면 정해진 스케줄을 반드시 따라 주는 성실성도 갖추고 있었다.
물론 게임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여기에 있는 이델라는 그 게임 시스템이 적용되는 진짜 좋은 학생일 거였다. 지식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그게 얼마나 대단한 건데. 왜 모르는 걸까?
아닌가? 이 이델라는 그런 능력이 없는 건가? 찜찜해졌다.
어쨌든 이델라는 자기소개를 했다. 난 가슴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내 이름은 조프리 비스코티야.”
“제 이름은 알렉스 바움쿠헨입니다.”
조용히 있던 알렉스가 말했다.
이델라는 자신이 누구 품에 있었는지 다시 떠올렸는지 “앗, 그렇군요! 내려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내려 주면 도망가는 거 아닌가?
하지만 싫다는 사람을 붙잡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알렉스가 이델라를 바닥에 내려 줬다.
이델라는 치마를 탁탁 쳐서 주름을 폈다. 치마보다 더 심한 건 장갑이었지만.
그녀는 장갑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 장갑이랑 옷도 배상할게. 기다려 줘.”
“네? 아니에요, 전하. 정말로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다. 게임 시작 시점, 그러니까 이델라가 2학년 첫 학기를 시작하는 시점에 그녀가 지닌 돈은…… 정확히 얼마였는지 기억 안 나지만.
기숙사 한 달 생활비로 반이 사라지고 식비로 또 반이 사라졌던 게 기억났다. 여기에 학비가 따로 들어갔다.
양아치가 따로 없었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아카데미가 날강도라는 게 아니었다.
“이델라, 공부 어때?”
“예?”
“그러니까, 공부를 하면…… 공부한 내용이 막 기억나고, 책을 읽으면 책의 내용이 기억나고 그러지 않아?”
“예? 물론이죠? ……네?”
역시. 이델라는 내가 아는 그 여주인공이었다.
“머리가 좋구나? 공부 머리가 있는 거네.”
“네? 아니, 저기…….”
“틀림없이 합격했을 거야. 기다려. 내가 명단을 보고 올 테니까.”
이델라가 버벅거렸다. 자신감이 부족한 편인 것 같다. 무도회에 참가하려면 프라이드가 높아야 했던 것 같은데.
헤어지기 전에 문학 수업을 꼭 들으라고 말해야겠다. 프라이드를 올리기엔 문학 수업만 한 게 없었다.
“전하.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여기 계십시오.”
알렉스는 나와 이델라를 지켜보다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놀랍게도 알렉스가 몇 번 손을 사용하자 앞에 길이 생겼다. 그는 수월하게 사람들을 뚫고 명단 앞으로 도달했다.
“저한테 공부 머리가 있다고요?”
이델라가 물었다. 그녀는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얼굴이 움찔움찔했다.
나는 그냥 웃으라는 뜻으로 말했다.
“그렇다니까. 책을 읽으면 기억난다니 얼마나 좋은 기억력이야.”
“저, 한 번 읽고 외우는 그런 천재라는 뜻으로 말씀드린 게 아니에요.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야 기억할 수 있는 둔재라고요.”
이델라가 울상을 지었다.
나도 그런 기억력의 소유자는 한 명밖에 몰랐다. 다른 사람에게 바라지도 않는다.
“응. 공부하면 하는 대로 지식이 쌓인다는 거잖아. 발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지? 아카데미의 이상에 딱 맞잖아. 지식을 배워서 익히고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이델라가 눈을 깜빡였다.
“아…… 저…….”
“고향에 돌아가지 않을 거지? 아카데미에 그렇게 잘 어울리는 인재인데, 아깝잖아. 난 이 나라의 왕자야. 나라의 재원이 아카데미를 포기하고 가 버리면 아까워서 오늘 잠을 못 잘걸.”
이델라가 왜 고향에 내려가겠다는 깜짝 놀랄 결심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말려야 했다.
네가 내려가면 오늘 밤 잠을 못 자는 정도가 아닐걸.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쳤다.
“제가 정말 아카데미에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이델라가 물었다.
아카데미 입학 전의 이델라는 불안감이 많은 성격인 듯했다.
안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물론이지.”
“전 제가 불합격했을 거라고 확신해요…….”
이델라가 비밀을 털어놓듯 속삭였다.
“나도 그랬어.”
“전하께서요?”
“응.”
“그럼 제가 불안해하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죠?”
“당연하지. 이렇게 시험이 쉬워서야, 걱정되는 게 당연한 거야.”
희망 어린 이델라의 얼굴이 한순간 어두워졌다.
“네?”
“응?”
“시험이…… 쉬우셨어요?”
“아니? 내가 뭐라고 말했어? 너무 어려웠다고 했어.”
뒤늦게 분위기를 눈치채고 수습했지만 이델라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다시 공포와 불안이 차올랐다.
“저는 가야겠어요.”
“……어디로?”
“고향으로요. 여긴 제가 있을 곳이 아니에요.”
네가 있을 곳 맞아.
“전하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다면 또 헛된 생각을 할 뻔했어요. 여기 남아서 공부를 하자는…… 그런…….”
정말 좋은 생각이야.
“이델라.”
“전하, 저를 격려해 주셔서 감사해요. 전하의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잊어도 돼. 가지 마.
그 순간 알렉스가 돌아왔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한 이델라를 힐끗 보고 내게 보고했다.
“확인했습니다.”
“네?”
“합격자 명단에서 성함 확인했습니다. 이델라 에클레어 양은 아카데미 합격자가 맞습니다.”
“……정말요?”
이델라가 멍하니 물었다.
“예.”
한 마디 덧붙일 만도 한데 알렉스는 그렇게만 말했다.
그가 내 손에서 짐을 가져갔다.
“더 늦기 전에 기숙사로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