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1화 (91/293)
  • 91.

    이델라는 턱을 당기고 허리를 폈다. 남학생의 손을 잡고 일어서려고 했다.

    그 순간 남학생이 손을 빼는 바람에 그녀는 앞으로 엎어졌다. 두 팔로 몸을 지탱하느라 흰 장갑은 쓸리고 더러워졌다.

    손바닥이 아렸다. 손의 상처가 난 게 별일도 아닌데. 상처에서 시작된 통증이 눈까지 올라와서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진짜 뭐야?

    더러운 장갑은 못 잡겠다는 걸까? 막상 잡으려고 보니 생각보다 더 더러웠던 걸까?

    그럴 수 있었다. 귀족은 그런 족속이라는 걸 이델라는 알고 있었다.

    몰락 귀족에 불과한 부모님조차도 손을 더럽히는 일은 견디지 못했으니까.

    “아, 미안해. 정말로. 혼자 일어날 수 있겠어?”

    남학생은 몸을 낮추고 말했는데 그러면서도 이델라는 쳐다보지 않았다.

    이델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내뱉었다.

    “어딜 쳐다보고 말하는 거야? 나 여기 있거든?”

    남학생이 무심결인 듯 그녀를 쳐다봤다.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몰골을 포착하고 재빨리 물러났다.

    “미안해.”

    남학생이 사과했다. 이델라는 뭐라고 대꾸하려고 했다. 그런데 목이 꽉 메어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델라가 떨어뜨린 짐을 줍고 있었다. 그에게는 이델라를 모욕할 의도가 없다.

    하지만 이델라는 모욕받았다. 입술이 떨리고 손이 떨렸다.

    이델라는 어깨를 들썩였다. 숨을 들이쉬고 다시 말하려고 했다.

    그녀의 눈에 거대한 기사가 들어왔다. 아까 그녀가 하인이라고 생각했던 남자였다. 품에 안고 있던 남학생을 내려놓으니, 남자의 허리에 찬 검이 보였다. 그는 검을 소지한 기사였다.

    기사는 무릎을 굽히더니 “제가 하겠습니다.” 하고 끼어들었다. 그가 남학생이 줍고 있던 짐을 가져갔다.

    남학생은 난처한 듯했다.

    귀족과 기사.

    이델라는 어쩐지 멍해져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저 사람들은 귀족이다. 이델라의 부모처럼 귀족이라는 걸 큰 소리로 주장할 필요도 없는, 그렇게 해서 이델라를 부끄럽게 만들 필요도 없는 귀족이었다.

    오늘 아침의 이델라처럼, 제 입으로 부끄러운 말을 해야 할 필요도 없는.

    정신을 차려 보니 두 뺨이 눈물로 왈칵 젖어 있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다고, 남학생은 그야말로 아카데미 학생의 모습이었고 이델라는 자신이 바보처럼 어릴 적 가정 교사의 말을 믿고 유일한 희망을 찾아 이곳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세계에 그녀가 속할 수 있다고 믿고.

    몇 겹으로 흐려진 시야로 냉정한 인상의 청년이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남학생의 앞에 서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조프리 왕자 전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그레이.”

    남학생이 대답했다.

    왕자 전하?

    이델라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수위가 아슬아슬하게 차 있던 눈물이 넘쳐흘렀다.

    눈앞이 맑아지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쳐다보는 남학생…… 조프리 2왕자 전하의 모습이 보였다.

    왜 몰랐을까? 왕족이 아니고서야 저렇게 빛이 나는 것처럼 보일 리 없는데.

    이델라는 그녀의 인생에서 왕자를 만날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녀는 멍하니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왕자 전하.”

    “왜 울어?”

    왕자가 벌떡 일어났다.

    * * *

    나한텐 사람 울리는 재능이 있는 게 아닐까?

    예전에 가설을 세워 둔 적 있는데 방금 확인받은 것 같다.

    여주인공은 나를 보자마자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대체 왜? 돌아 버리겠다.

    여주인공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려던 계획은 그 순간 멈췄다. 애초에 일 초 전에 짠 계획이었다.

    본편 시작도 전인데 조프리가 등장해도 되나 싶었지만.

    아니 같은 교정에 있는데 얘네 둘이 당연히 마주친 적이 있겠지!

    그러다 사람 좀 울릴 수도 있고. 이렇게 임팩트 있게 만났는데 여주인공이 까맣게 잊어버릴 수도 있고. 2학년 때 조프리랑 ‘첫 만남’을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있겠냐?

    나 망한 것 같은데?

    “저, 전하……. 저는 왕자 전하신 줄 모르고…….”

    여주인공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눈을 꾹 감는데 속눈썹이 푹 젖어서 그 밑으로 눈물이 계속 넘쳐흘렀다.

    “당연히 몰랐겠지. 내가 뭐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내 얼굴 모르는 사람 손들라고 하면 전 국민의 99퍼센트가 손들걸? 그레이, 손수건 좀 줘.”

    “맡겨 두셨어요?”

    그레이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각지게 접혀서 깨끗했다. 오늘 한 번도 안 쓴 손수건인가?

    새 손수건은 여주인공의 손으로 들어가 그녀의 눈물을 닦는 데 사용됐다. 여주인공이 계속 코를 훌쩍여서 난 “코 풀어도 돼.”라고 허락했다.

    여주인공이 새빨간 눈으로 나를 힐끗 올려다봤다. 정말요? 작은 동물 같은 몸짓이었다.

    불쌍해져서 고개를 끄덕이는데, 그레이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제 손수건이거든요?”

    그레이가 당황한 사이 여주인공은 코를 풀었다. 그레이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넌 쟤 모습을 보고도 손수건이 아까워?

    아깝겠지.

    “내가 새 손수건 열 개 사서 보내 줄게.”

    “필요 없어요. 전하 안목 별로니까요.”

    그레이가 대답했다.

    그럼 표정이나 풀든가. 여주인공 스트레스 받잖아.

    너 때문에 게임 내내 스트레스 받는 애거든? 본편 시작 전부터 힘들게 하지 마.

    난 눈짓 몸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런다고 표정을 풀면 그레이가 아니었다.

    여주인공은 넘어져서 아픈 듯했다. 다리를 잘못 접질렸나? 그래서 우는 건가?

    아니면 왕자를 못 알아보고 반말해서?

    난 부드러운 표정을 지어 여주인공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여주인공은 눈물 때문에 내 표정이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다리 다쳤어? 기숙사로 들어가자. 병동에 의사가 있을 거야. 알렉스, 짐 나 줘. 이델라를 부축해 줄 수 있어? 병동까지.”

    알렉스는 잠깐 나를 보더니 “예, 전하.”라고 말했다.

    그가 여주인공에게 다가갔다.

    “실례하겠습니다.”

    “괜찮, 앗?”

    알렉스가 여주인공을 번쩍 들었다. 로맨스의 유구한 전통에 빛나는 공주님 안기였다.

    알렉스는 안 그래도 그럴듯하게 생긴 청년 기사였는데, 그가 여주인공을 그렇게 안고 있으니 쓸데없이 잘 어울렸다.

    저래도 되는 건가?

    여주인공은 놀라서 울음을 그쳤다.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알렉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드라마였다면 음악이 깔리고 필터가 밝아질 것 같은 순간이었다.

    너무 잘 어울리는데.

    저 둘의 첫 만남도 원래는 학생회실에서 이루어져야 했다.

    여주인공이 이 일을 잊어 줄까? 망한 것 같은데.

    “……전하.”

    “왜, 그레이? 할 말 있어?”

    그레이가 머뭇거렸다. 그는 미간을 꾹꾹 누르더니 물었다.

    “따라가실 거예요?”

    “그래야겠지?”

    “그 짐 들고서요?”

    “응.”

    “예……. 마음대로 하세요.”

    “할 말 있으면 해.”

    잔뜩 운을 띄워 놓고 그레이는 물러나려고 했다. 뭐 하는 짓이야? 찜찜하게.

    “아니요, 전하도 입학하신 이상 아카데미 학생이니까요. 넘어진 학우의 짐을 대신 들어다 주고 병동까지 데려다준다……. 그림이 좋네요.”

    “빈정거리려면 제대로 하든가.”

    “정말 아니에요. 그냥 머리가 아파져서 그래요.”

    그레이는 이마를 짚고 있었다. 아무것도 보기 싫다는 듯 눈을 감고 있다.

    “잘 듣는 약이 있는데. 가져다줘?”

    “그런 약을 왜 가지고 계시는데요?”

    “도트가 챙겨 줬어.”

    “그래요.”

    그레이는 한숨을 쉬더니 “정말 이런 문제로 엮이긴 싫거든요.”라고 말했다.

    “전 갈게요. 입학식에서 봬요. 머리를 쉬게 해야겠어요.”

    “넌 항상 생각이 많더라.”

    걱정해 봐야 해결되는 일은 별로 없던데.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다년간의 경험에 따른 말이었지만 그레이는 듣자마자 발끈했다.

    “누구 때문인데요? 아, 정말 갈래요!”

    “안 붙잡았어.”

    그레이는 정말 다루기 어려웠다. 그는 보란 듯이 등을 돌리고 큰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에 에드워드가 서 있었다.

    물론 그렇겠지. 왜 쳐다본 거야?

    난 고개를 숙이고 여주인공과 내 짐을 양어깨에 하나씩 들었다. 알렉스는 멀리 가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주인공은 공주님 안기로 안겨서 “내려 주셔도 돼요.”라고 계속 주장하고 있었다.

    “다리 아프잖아. 낯선 남자라 불편해? 만약 소문이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명예를 걸고 변호해 줄게.”

    “아니요. 정말로 아프지 않아요. 저 정말 튼튼해요. 병동에 가면 꾀병 부리지 말라고 할걸요. 그리고…….”

    “그리고?”

    여주인공이 머뭇거렸다.

    “저, 저는 아카데미에 떨어졌어요…….”

    “뭐?”

    이번에야말로 난 기겁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야? 여주인공이 어떻게 아카데미에 떨어져?

    식은땀이 순식간에 등을 적셨다.

    “아카데미 학생도 아닌 제가 병동을 이용해서는 안 되잖아요.”

    여주인공이 젖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애초에 그녀가 나를 속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와, 진짜 무서워.

    “잠깐만, 아카데미 학생이 아니라는 게…….”

    내가 아는 거랑 다른 뜻이 있을까?

    실은 교직원으로 들어왔다? 말이 되냐? 여주인공은 학생이었어!

    살인적인 공부 스케줄을 직접 짜 줬잖아, 기억 안 나? 잠은 죽어서 자라는 듯한 공부-알바 무한 루트…….

    한 달 그렇게 돌리고 여주인공이 몸살에 걸려서 식겁했던 것도 기억났다. 우리 애 아프잖아? 누가 애를 이렇게 굴렸어! 나잖아?

    안 아플 수가 없는 스케줄이었지만. 뭐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잘 구현해 놨냐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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