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과 1-90화 (90/293)

90.

이델라 에클레어는 전날부터 운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집에서 편지가 와 있었다. 이델라는 아버지의 서명을 보고 편지를 쭉 읽은 다음 벽난로에 던져 버렸다.

‘지금 돌아오면 용서해 주마.’

‘이게 무슨 버릇없고 이기적인 짓이냐?’

‘네가 아카데미에 합격할 리 없잖니.’

아카데미에 떨어질 수 있다. 아카데미에 떨어질 것이다.

쟁쟁한 수재들을 제치고 내가 합격할 리 없다.

무작정 몸만 들고 상경하면서, 이델라가 줄곧 생각해 온 일이었다.

이델라 에클레어는 그럭저럭 영리하고 손재주가 좋았다. 시장에서 물건값을 깎을 줄도 알고 어디서든 일자리를 얻어 낼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해 온 일이니 그쯤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아카데미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건 다른 문제였다. 이델라는 홧김에 상경했다.

아버지는 이델라가 아들이 아니라서 아쉽다고 말했고 미인이 아니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이델라는 결점투성이였기 때문에 아버지의 마음에 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릴 적 이델라는 자기가 전부 잘못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머리가 크고 나서는 이 집안이 잘못됐다고 생각했고, 집을 벗어나고 싶어서 진저리가 쳐질 지경이었다.

이델라의 집안이 망하기 전, 그녀의 가정 교사는 부드러운 말씨로 말했다.

‘아가씨라면 아카데미에 갈 수도 있을 거예요.’

‘아카데미에 가면 뭐가 좋아요?’

어린 이델라가 물었다. 가정 교사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물론, 혼자서 삶을 꾸려 갈 수 있다는 점이죠…….’

그 말이 왜 머릿속에 반짝 떠올랐을까?

부모님에겐 아무런 수입도 없다. 이대로라면 모두 가라앉을 뿐이다. 이델라의 일당으로는 저택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녀가 전문직을 갖는다면.

‘아카데미에 갈래요, 허락해 주세요.’

이델라의 말에 아버지는 불쌍한 것을 보는 눈빛을 했다.

‘꿈은 밤에 꾸거라, 이델라. 그러게 내가 딸애한테 책을 너무 읽히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미안해요, 여보. 하지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훈계하기 시작했다.

이델라는 그날 집에서 뛰쳐나와, 상경하는 마차에 몸을 실었다.

망할 에클레어 가문. 망해 버려라.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으니, 그녀가 선량하고 좋은 신부가 되기는 영영 글렀다.

이델라는 마음속을 저주로 가득 채웠다. 아카데미 거리의 허름한 여관에 짐을 풀고 당장의 일자리부터 찾았다.

한 달을 주민처럼 일하고 숙식하다 보니, 외부의 학생들이 속속들이 여관을 점령했다.

이들은 여관이나 카페에서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눴다. 함께 온 가족이나 친척, 사용인들과 불안과 기대를 공유했다.

이델라는 팔자도 좋다고 생각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빼, 잠을 줄이고 공부 시간을 만들었다. 그럼에도 다른 학생들보다 공부량이 압도적으로 적은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델라는 불안감에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덜덜 떨며 시험장에 들어섰다. 시험지를 받는 순간 머릿속이 백지로 변해 버리는 경험을 했다.

심호흡을 하고 답안지를 썼지만, 정작 시험장을 나오자 자신이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조차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여관에서 접시 여덟 장을 한꺼번에 나르다가 깨뜨렸다. 변상하느라 그날 저녁을 굶었고, 아침에 일어나서도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밤새 옆방 학생이 흐느끼는 소리를 듣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 낡은 여관은 끔찍하게 방음이 안 됐다.

그리고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편지를 불쏘시개로 만들고 이델라는 짐을 꾸렸다. 불합격된 걸 확인하고 편지를 봤으면 더 끔찍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끔찍하긴 마찬가지였다.

다음 해에 다시 도전한다?

이델라는 자신 없었다.

일하며 공부를 한다는 건 이곳에 오니 더욱더 불가능한 일로 느껴졌다.

아카데미에 시험을 치러 온 학생들은 대부분 그럴 만한 재력이 뒷받침되는 상황이었다.

이델라처럼 생활비를 벌고 있는 학생은 없었다. 이델라는 일하는 학생이 상당수 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이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건 아카데미에 응시할 생각이 없는 주민들뿐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세상에는 이렇게나 부유한 사람들이 많단 말인가?

어쨌거나 합격자 명단은 확인해야 했다. 이델라는 포기하려면 제대로 포기하고 싶었다.

사실 이델라가 가장 싫은 부분은, 이 와중에도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이었다.

자기혐오에 빠진 채 이델라는 이른 식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서빙을 하고 팁을 받았다.

이 팁이 집으로 돌아가는 마찻값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설거지를 하고 여관 주인에게 인사했다. 여관 주인이 그녀에게 말했다.

‘이 시간에 밖에 나가면 걷지도 못한다. 합격자 명단 내려가면 나가지 그러냐?’

‘저도 합격자 명단 확인하러 가는 건데요?’

‘네가 왜?’

여관 주인이 의아해했다.

‘저도 아카데미 시험을 쳤으니까요.’

‘농담도!’

여관 주인이 웃었다.

이델라가 마주 웃지 않자, 그는 ‘농담이 아니라고?’ 하고 되물었다.

‘예. 이만 나가 볼게요.’

‘아카데미 시험은 귀족만 치르는 게 아니냐?’

‘아니에요.’

이델라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뒤 덧붙였다.

‘난 귀족이라고요.’

여관 주인은 멀뚱히 이델라를 쳐다봤다. 마지막까지 그는 이델라가 농담을 한 건지 아닌지 아리송하게 여기는 듯했다.

이델라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귀족이라거나 평민이라거나 하는 프라이드는 예전에 버린 줄 알았는데. 얼굴에 열이 몰렸다. 괜한 말을 해 버렸다.

그녀가 묵은 여관은 큰길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비교적 한산했다. 그녀는 손부채로 얼굴을 식혔다.

바보 같은 이델라. 어리석은…….

그러나 아카데미로 가는 길은 하나로 모였고, 그녀는 곧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인파에 휩쓸렸다.

그녀는 아카데미 앞에 도착하기만 하면 제 이름이 목록에 들어가 있는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끝없이 앞으로 떠밀었다.

이델라는 자신이 가죽신을 신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신은 색이 어둡고 튼튼해서 몇 번 밟히는 정도로 망가지지 않았다.

이델라는 압사의 위기에 세 번쯤 몰리고서야 정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명단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이델라를 옆으로 밀쳤다. 그녀는 주류에서 탈락했다. 비틀거리며 짐 가방을 끌어안고 중심을 잡으려다가, 누군가와 부딪혔다.

상대는 거대한 남자였다. 몸이 돌덩이 같았다.

이델라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품위 없게 비명을 질렀다.

넘어지고서야 상대가 두 명의 남자였다는 걸 알았다. 키 큰 남자가 다른 남자를 안고 있었다.

뭐야, 귀족과 하인? 이델라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아카데미 안에 개인이 부리는 하인이 들어올 리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진짜 뭐야.

“괜찮아? 안 다쳤어?”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이델라는 고개를 들었다. 자연스러운 반말보다 먼저 귀티 나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생 한번 해 본 적 없을 것 같은 인상의 소년이었다. 이델라가 아카데미를 상상했을 때 막연히 그렸던 아카데미 학생 같은 단정한 얼굴.

그가 손을 뻗어서 이델라는 저도 모르게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더러워진 자신의 장갑이 보였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장갑이었다.

어린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고급 장갑도 손에 꼭 맞는 맞춤 장갑도 아니었지만, 그녀는 격식을 차리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장갑을 꼈다.

귀족 사회의 예의였으니까. 안목 있는 귀족이라면 이델라의 장갑이 성에 차지 않겠지만, 이델라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켰다.

이델라는 예의를 몰라서 안 지키는 게 아니었다.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뿐이었다.

평민의 일을 하고 그걸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도 그랬다. 그녀가 수치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었다.

일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귀족이라고 고개를 들고 있는 게 훨씬 더 부끄럽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남학생이 그녀의 더러운 장갑을 차마 잡지 못했을 때 그녀는 부끄러워졌다.

남학생은 너무도 귀족 같았고 아카데미의 학생 같았으며, 그녀가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모든 것을 갖춘 듯했다.

이 사람은 그녀와 같은 걱정을 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녀와 같은 수치심을 느껴 본 적도 없을 것이다.

자신이 수치를 주었다는 자각조차 없을 것이다.

남학생은 이델라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게 예의라는 듯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숙녀의 수치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델라는 머리끝까지 열이 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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